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사회복지법인 자제공덕회를 찾았다. 불교계 ‘최초’의 사회복지 전공자, 불교사회복지의 ‘선구자’라 불리는 보각 스님을 만나 지난 삶의 여정과 스님만의 뿌리 깊은 사회복지 철학에 대해 들었다.
최초로 불교사회복지의 길을 열다
지난 5월 20일 중앙승가대학교 대강당에서 스님과 재가자 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특별한 법회가 열렸다. 스님 최초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중앙승가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35년간 후학을 양성해온 보각 스님의 정년 퇴임 법회였다. 퇴임 법회가 있은 지 두 달여, 자제공덕회 사무실에서 스님을 만났다. 교수로서의 공식 임기가 두 달여 남아 있으니 아직은 현역이라며 멋쩍게 웃는 스님께 조금 일찍 소회를 물었다.
“실감이 안 나네요. 35년,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지나온 길, 젊은 시절의 열정, 다 추억으로 남네요. 긴 시간을 뒤로하고 머물던 곳을 떠날 생각을 하니까 조금 섭섭하고 그렇습니다. 그래도 앞으로도 현장에서 계속 일해 나갈 거니까 완전히 끝은 아니란 생각입니다.”
보각 스님이 교단에 선 것은 1985년, 신군부 세력이 불교 정화라는 미명으로 자행한 10.27 법난을 겪은 후 점차 불교계가 사회복지에 눈을 뜨기 시작한 시점이다. 1984년 중앙승가대학교에 사회복지학과가 개설되고, 이듬해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 후 지금까지 천여 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비단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두 발로 뛰며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는 데 구슬땀을 흘렸다. 어떤 사명감이 있어서였을까. 왜, 스님은 아무도 관심 없던 사회복지에 뛰어든 것일까. 그 시작이 궁금했다.
“어머니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어요. 어렸을 때 중학교 입학 시험을 치러 가는 길에 만원 버스에서 있었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또렷합니다. 중간에 거지 모녀가 버스에 올랐는데, 그들을 보고 어머니께서 제가 입고 있던 빨간 내복을 벗어주라고 하시더군요. 얼떨결에 웃통을 까고 옷을 벗어줬지요. 그런 어머니의 심성이 제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해요. 그리고 출가한 뒤로 늘 생각하는 것이, 종교는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였어요. 특히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는 더 그렇죠. 저는 실천 없는 자비는 무자비와 같다고 생각해요.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부처님의 뜻을 가장 잘 따르는 삶 아니겠어요?”
자비의 실천, 출가 수행자로서 지녀야 할 당연한 자세가 아닐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보각 스님이 사회복지를 통해 자비를 실천하리라 마음먹었을 때 주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고 한다. 거지들 빵 나눠주는 일 따위를 무슨 공부라고 하고 있느냐는 비아냥도 들었고, 환경이 좋으면 스님들이 수행을 열심히 하지 않을 거라며 핀잔받는 일도 적잖았다고 한다. 그래도 스님은 뜻을 접지 않았다. 이제 스님 이름 앞에는 불교사회복지의 ‘선구자’라는 최고의 찬사가 따라붙는다. 무관심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스님에게 지나온 세월이 선사한 감사의 훈장 같은 것이 아닐까.
어려운 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복
그간 일선에서 보각 스님이 펼친 사회복지 활동은 적잖은 성과를 거둬왔다. 대표적으로 자제공덕회를 들 수 있다. 현재 스님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사회복지법인 자제공덕회 산하에는 총 3개의 복지 시설이 속해 있다. 2003년 묘희 스님으로부터 운영을 이어받은 노인요양시설 묘희원, 길 건너편에 자리한 또 다른 노인요양시설 상락원과 중증장애인요양 시설 불이원이 그것이다. 처음 스님이 묘희원 운영을 맡을 때만 하더라도 20여 명의 어르신을 모신 작은 규모의 시설 하나가 전부였지만, 이제는 자제공덕회라는 큰 나무 아래 300여 명(시설 이용자, 직원 등)의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최초로 시설장을 맡은 삼전종합사회복지관, 정릉동에 세운 상락원(지금의 승가원장애아동시설), 자제공덕회 이름 아래 있는 시설들 모두가 제겐 보람입니다. 다 잘 풀렸으니 그런 거겠죠?(웃음) 지나온 일들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건 소쩍새마을을 불교계 대표 장애인 시설로 자리매김하게 한 것, 그리고 인도에 작은 학교 하나 세운 것이 아닐까 싶네요. 아시다시피 소쩍새마을은 사회적으로 이슈가 컸잖아요. 제가 갔을 때도 시설 환경은 물론이고 인수, 관리·운영 등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산더미처럼 많았어요. 정상화하는 과정에 진통을 좀 겪었지만 그래도 큰 잡음 없이 일을 마무리하고 지금에 이르는 기틀을 잡았으니 큰 복이 아니었나 해요. 그리고 인도에 학교를 세운 것은 스스로도 정말 잘했다고 여기는 일 중 하나인데요. 불법이 싹 튼 땅, 지금은 불법의 빛이 희미한 그곳에 다시금 불교의 씨앗을 심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 출가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만약 부처님이 아니었다면 이 좋은 길을 못 왔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부처님께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자 하는 심정이었죠. 2016년 쉬라바스티에 있는 한국 사찰 천축선원(주지 대인 스님) 인근에 학교를 지었는데, 제 법명에서 한 자(보각), 어머니 법명에서 한 자(광대행)씩 따서 보광학교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전액 무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운영 및 관리는 대인 스님을 중심으로 천축선원에서 맡아주고 있는데, 지역 사회에서 평판이 아주 좋습니다.”
보각 스님은 자신이 타고난 복이 많지 않지만 딱 하나 팔자에 큰 복이 있다고 말한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 뭔가 일이 잘 안 풀리고 어려운 환경에 처한 곳으로부터 부름을 받는 복. 그래도 이왕이면 조금 환경이 나은 곳이면 좋지 않겠느냐는 말에 스님은 웃으며 말한다. “잘되는 데는 가서 열심히 해도 티가 안 나요. 좀 부족한 데 가서 열심히 하면 티가 바로 나잖아요(웃음).”
나눌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시종일관 보각 스님 말씀에는 막힘이 없었다. 오랜 교직 생활에서 비롯된 내공일 수도 있고, 한 길만을 걸어온 웅숭깊은 삶에서 나오는 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속에는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히 열어주는 따뜻한 기운이 서려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가던 대화가 어느덧 끝을 향하고, 마지막으로 스님께 스님이 생각하는 사회복지란 무엇인지 물었다. 긴말 없이 스님은 ‘보살행’이라고 답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45년간 중생과 더불어 사셨듯, 불자라면 늘 중생구제에 관심을 갖고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덧붙여 스님은 우리가 일상에서 나눔과 베풂을 실천하지 못하는 까닭을 짚어 주셨는데, 그 말에 속이 좀 뜨끔했다.
“‘많이 들어도 몸소 수행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마치 음식 이야기를 아무리 늘어놓아도 배가 부르지 않는 것과 같다.’ 실천을 강조하는 능엄경 구절입니다. 사람들은 기회가 생기면 좋은 일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는 드뭅니다. 왜 그럴까요? 용기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나눔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지금 내가 부족한데 누굴 돕는 것이 가능할까, 괜히 나만 더 힘들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과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면 나눔이 불가능해요. 꼭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불교에서 무재칠시(無材七施)라고 해서 돈 없이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를 말하잖아요. 봉사 활동, 또 남의 아픔이나 고통에 눈물 한 방울 보태주는 것도 나눔일 수 있습니다.”
평소 보각 스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스님이라 불러주는 데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한다. 그 자부심을 지켜가기 위해서 매일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자 노력한다고. 아무리 바빠도 매일 아침 예불 올리고, 틈틈이 사경과 기도를 하고, 경전 읽기를 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스님이 거듭 전하는 당부의 말씀, “수행하라!” 그 말이 또 한 번 가슴에 깊이 와 박힌다.
“아함경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몸뚱이는 음식을 먹고 살고, 마음은 기도(수행)를 먹고 사느니라.’ 제 좌우명입니다. 불자라면 수행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하루에 밥 먹는 시간 이상은 수행하자. 다들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글_ 양민호
사진_ 최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