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의 자전적 에세이] 가슴 벅찬 석굴암 연구를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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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방의 자전적 에세이] 가슴 벅찬 석굴암 연구를 시작하다
  • 강우방
  • 승인 2019.09.26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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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석굴암 본존 궁륭천장(안장헌작가제공).

하버드 대학교는 보스턴시가 아니라 바로 옆의 케임브리지(Cambridge)시에 자리 잡고 있다. 유럽 풍의 도시여서고도의 느낌이 풍기고, 바로 곁의 아름다운 찰스강 가를 따라 거닐면 잔잔하게 흐 르는 강물 따라 마음이 평온해지곤 했다. 비록 경 주는 시골이라 해도 세계적으로드문1,000년간 의고도기 때문에 그곳에서 체험한 문화적 자 부심은 어느 나라에 가든 흔들림이 없었으며 서 양에서 동양의 사상과 예술은 더욱 빛났다. 마침 그당시미국은 티베트 불교와 미술에 열광적이 었다. 심리학자 칼융의향도 적지 않았으리라. 세계에서 모여든 학생들 사이에서 나이가 많은 편이어서 미술사학과 대학원 학생들은 늘나를 ‘ ProfessorKang’이라불다. 첫해가지나도록박사학위논문주제를잡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조사한 소금동불을 다 루어보려고 시도했으나 적합하지 못한 너무 큰 주제여서 일단 접었다.한해가 지난 후나는미 술사학과 도서관에 아침 일찍 나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떤 주제를 정할까. 그동안 내가 연구해 온것은너무미미했음을 통감하고 있었다. 문득 석굴암(石窟庵)이떠올랐다.경주에서가끔석굴암내부에 들어가 무릎 꿇고 본존을 우러러보면서 석가여래를 둘러싼 범천과 제석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10대제자들, 십일면 관음보살,그리고 감실의 불보살 등과 천정의 구조 등을 살폈다. 입 구에는 양쪽에 금강역사, 통로 양쪽에는 사천왕 상등이있어서 불교의 중요한 도상들이 망라되 어질서정연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본존의 모습 은너무도 조형이 완벽하여 저절로 신심이 나게 하다.갈때마다 석굴암의 불상들은 신앙의대 상이지,이리저리 재고 문제들을따지고 드는 학 문의 연구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때 로토함산을 올라 석굴암에 들어가 명상은 했을 지언정, 연구의 대상이 아니기에 석굴암 관련 논 문도 전혀 읽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지구 반대 쪽이역만리에 있는지라, 먼거리감이 있으므로 여기에서 석굴암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도 괜찮 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마음을 결정하다. 이제부터 석굴암 연구를 시 작하리라. 이결정을 로젠필드 교수에게 전하니 매우 기뻐했다.그러나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단 말인가. 국내에는 석굴암을 본격적으로 연 구하여낸성과가거의없었다.

사진2 석굴암 본존 항마촉지인(안장헌작가제공).

일반적으로 불상 연구자는 석굴암에서 불상 만연구하지 건축은 연구하지 않고 더욱이 건축 과조각과의관계도 추구하지 않는다. 나는 석굴 암의 불상조각과 건축을 반드시 함께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석굴암 본존을 먼저 만들고 건축의 규모가 정해졌으리라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석굴암 본존의 크기는 반드 시무엇에 의거했을 것이다. 우선 나는 요네다 미 요지(米田美代治)의『조선상대건축의 연구(朝鮮上代 建築の硏究)』(교토대학교, 1944)에서 석굴암 건축에 대 한논문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 긴논문들은 아 니나 간결한 논문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 선그의성실성이 믿음을 더했다. 그는 처음으로 신라 시대 건축가들이 석굴암 건축을 어떤 의도 를가지고 설계했는지,그에관한복원적 시도를 했는데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1:루트2’라 는비례원리를 찾아내어 석굴암 건축의 입면도 와평면도를 분석하는데 그연구성과가 나를 감동시켰다. 평소에 비례에 관심이 많았던 차에 그런 논문을 만났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연수할 때비례에 관한 책을 주섬주섬 모았지만, 기하학 적문제라 이해 못할부분이 많았다. 동양에서는 ‘1:루트2’의 비례를 흔히 썼으며, 서양에서는 이 른바 황금비례를 흔히 썼다고 한것도알게되었 다. 서양의 기하학자들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 전의 평면도가 황금비례로 되어 있음을 밝혔는 데, 동양에서는 서양 지향적 성격이 강해서 아무 건축이나 아름다우면 무조건 황금비례로 설계되 었다고 무책임하게 말하고 있다. 즉이상적 비례를황금비례로 알고 마구 사용하고있다. 형태의 아름다움은 비례에서비롯된다는 중요한 점을 사람들은지나치고 있다.그래서 나는 요네다 미 요지가 찾아낸 비례의 원리를 바탕으로 그이론 을더욱심화시키면서 석굴암 건축의 연구를 이 어갔다. 요네다 미요지는 건축가으므로 건축 의범주에서 불상을 다루려고 했으나 필자는 불 상연구자여서인지 불상의 크기가 석굴암 전체 를결정했으리라생각했다(사진 1). 그는불상의비례도나름으로분석했는데그 이론만은 따를 수없었다. 그는 건축 연구자이지 불상 연구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고맙게도 20세기 초일본과 한국에서 쓰던 곡척(曲尺)으로 불상의 부분을 쟀으며, 그치수를 자세히 중국 당 나라 시대에 썼던 자(唐尺)로환산하여 놓았다. 통 일신라때는당척을 써서 불상의 각부분크기를 정했으므로, 당척으로 환원한 숫자가 매우 중요 함을 예감했다. 요네다가 했듯이 석굴암 본존의 높이를 당척으로 환산하면, 좌상 높이는11.53척, 어깨 폭은 6척 6촌, 무릎 폭은 8척 8촌이 되는데 이런 숫자가 반드시 어디에 근거했을 것이라 확 신했다. 어느 날학생들을 모아 놓고 불상 관련 논문 을읽을때숫자가 보이면 무조건 나에게 전화하 라고 했다.곡척이니 당척이니 하는 도량형을서 양학생들은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설명하지 않 았다. 물론 나도 열심히 찾았지만 너무 막막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흔히 여래상은 장육상(丈六 像),즉1장6척, 약 5미터로 입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규범이 있다. 지금 석굴암 본존은 좌상에다 가높이가 3미터 50센티미터여서 그이론과도 맞지 않는다. 여러 가지 궁리를 하는 중이었는데, 어느 날그레이스 옌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역시 나처럼 나이 들어 대만에서 유학을 온여성 으로 나와 함께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있었고,중국당나라 조각을 연구하고 있어 서자주만나는편이었다. 어느 날늦은밤에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당 나라 현장법사(602?~664)가인도를 순례하면서 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읽다가 알수없는 숫 자를 보았다고 해서 빨리 숫자를 읽어달라고 소 리쳤다. 옌씨는다음과 같이 숫자를 읽어주었다. “여래좌상의 높이 1장 1척 5촌, 양무릎폭8척8 촌,어깨폭6척2촌.”나는귀를의심했다.어찌하 여『대당서역기』에 기록된 보드가야 마하보리사 (大正覺寺)의정각상의 크기가 신라의 경주 토함산 석굴암 본존의 크기와 이리도 같단 말인가! 싯다 르타 태자가 정각을 이룬 보드가야에 마하보리 사를 짓고 소조로 불상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지 금은 불상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현장의 기록 에서 보다시피 싯다르타 태자가 동쪽을 향해 대 모지신(大母地神)을불러악마를 항복시키는, 촉지 항마인(觸地降魔印)을수인으로 취하고 새벽에 정 각을 완성했다는 정황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바 로그모습을 토함산 석굴암의 석가여래가 그대 로충실히 반하고 있지 않은가(사진 2).석굴암 본존은 오른손을 내려 검지로 땅을 가리키며 대 모지신을 불러 자신이 정각을 이루었음을 증명케하는데, 이렇게 뚜렷하게촉지인을표현한 예 를다른나라에서 아직 보지 못했다. 신라인들은 인도의 그현장에 가서 조사한 것이 아니라 현장 의『대당서역기』를 읽고 그크기와 도상과 향방 을그대로 따른 것이다. 나는 뛸듯이기뻤다. 석 굴암을 연구하기로 결심한 지얼마되지않아이 처럼 가슴 뛰는 출발점을 찾았으니 석굴암 연구 의시작은 지금부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그내 용을 기본 자료로 국내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하 고국립박물관에서 내는 『미술자료』에 발표했다. 모두가 이출발점을 바탕으로 연구하기를 바라 는마음이었다. 이런 발견은 나의 공로가 아니다. 다만 내가 처음으로 발견했을 뿐이다. 그리고 인 도미술을 연구했으므로 석굴암과 관련한 두편 의논문을 써서 리포트로 제출했다. 로젠필드 교 수는 감동했다.인도 힌두서(書)에서찾은 모든비 례자료를 로젠필드 교수가 달라고 해서 드렸다. 아마도 힌두교에서 비롯된 인도 미술의 비례 문 제는세계에서내가처음다루었을것이다. 그러나 나는 통일 신라뿐만 아니라, 우리나 라는 물론 세계에서 으뜸가는 석굴암의 건축과 조각 연구를 하버드 대학교에서 마무리하지 않 았다. 박사학위 논문은 국내에서도 쓸수있었다. 미국에는 도시마다 큰박물관이 있어서 작품 조 사가 내겐 더절실했고 중요했다. 보스턴 박물관, 뉴욕의 메트로 박물관과 뉴욕 현대 미술관, 필라 델피아 박물관, 클리블랜드 박물관, LA 카운티 박물관, 샌프란시스코 동양미술 박물관, 캐나다 의로열온타리오 박물관 등을 다니며 작품 조사에몰입했다. 메트로 박물관은 몇번이고 가서 중 국, 인도 등동양뿐만 아니라 오세아니아 원주민 미술품에 큰감명을 받기도 했다. 박사학위 논문 을쓰느라 다른 모든 것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 래서박사학위논문쓰기를중지했던것이다. 한해더연장하여 3년의 미국 생활은그렇 게끝났다. 석굴암 연구는 귀국 후에 계속되어 2 년전 ,2017년에 끝냈다고선언했다. 세편의논 문만 쓰면 석굴암 연구는 마무리되어 책으로 출 판될 것이다. 수많은 문제점들을 찾아냈고 정답 을찾아냈다. 필생의 작업이 된셈이다. 사람들은 박사학위가 아깝지 않느냐고 하지만 나는 조금 도후회가 없다. 만일 박사학위에 연연했다면 오 늘날의 내가 없었을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평생 학위에 대한 욕심은 조금도 없었다. 학위는 학사 뿐이고 평점이 C인데도 세계 명문 대학의 미술 사학과 박사 과정의 마지막 시험까지 치르며 마 치지 않았던가. 하버드 대학교 동창회 모임이 서 울에서 있어서 항상 초청되어도 가지 않았다.사람들은 내가 하버드 대학교에서 그렇게 치열하 게연구한 줄모르고 있으며 학위를 받지 않아 실 망하고 있는 눈치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 ‘조형 언어 기호학의 창시자’가되어세계미술사학을 선도할 뿐아니라, 기호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새 로운지평을열고있다. 한편 최순우 관장님이 나의 미국 유학 생활 을공무원 파견으로처리하여봉급이 나왔다. 1 년더연장하고 싶다고 말드렸더니 허락하셨 다.

사진3 최순우선생님(내셔널트러스트문화유산기금사진제공).

최순우 관장님은 항상 은덕을 베풀어주셨는 데, 그덕분에 외국에서 오랫동안 공부할 기회를 여러 번얻었다(사진 3).가까이 모실 기회가 많지 않았으나, 오늘날의 나를 만들어 주신 분이다. 아 무리 큰실수를 해도 항상 온화한 미소만 지으며 화를 낸적이없으셨다. 그런데 내가 미국에서 공 부하고 귀국하기 한해전에타계하셨다.1984년 12월18일, 향년 68세. 미국 생활 중에 가끔 전화 를드렸는데 마지막 통화에서 말이 어눌해짐을 느꼈다. 1985년여름, 3년간 매일 극적인 체험을 하며미국유학을마치고마침내귀국했다.

 

강우방

1941년중국만주안동에서태어나,1967년 서울대독문과를졸업하고미국하버드대 미술사학과박사과정을수료했다.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과국립경주박물관관장을역임하고 2000년가을이화여대미술사학과교수로초빙돼 후학을가르치다퇴임했다.저서로『원융과조화』, 『한국미술,그분출하는생명력』,『법공과장엄』, 『인문학의꽃미술사학그추체험의방법론』, 『한국미술의탄생』,『수월관음의탄생』,『민화』, 『미의순례』,『한국불교조각의흐름』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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