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에세이] 아이들이 25년만에 맺어준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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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에세이] 아이들이 25년만에 맺어준 인연
  • 김기중
  • 승인 2020.02.19 14: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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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일이다. 당시 첫째는 초등학교 1학년, 둘째는 유치원생이었다. 둘은 잘 놀기로 아파트 내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어딜 가나 동네 꼬마들을 몰고 다녔다. 아이들 가운데 둘을 유독 잘 따르는 꼬마가 있었다. 셋은 놀이터와 아파트 골목을 매일 헤집고 다녔다. 함께 매미를 잡고 비둘기를 쫓아다니고, 나무를 타곤 했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돌아오며 어둑해진 놀이터에 들러 아이들을 찾았다. 꼬마도 함께 있었 다. 꼬마의 할아버지로 보이는 노인 분이 서 계셨 다. 이럴 수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아니신가. 머리는 하얗게 세셨지만, 단박에 알아 봤다. 놀란 마음을 안고 다가갔다.
“혹시, 정OO 선생님이시죠?”
“네.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아하, 자네….
이름이?”
“김기중입니다. 선생님께서 1993년도에 제담임 선생님이셨죠.”
“아하, 그래. 맞아!”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던 선생님 얼굴이 놀라 움과 기쁨이 섞인 표정으로 바뀌었다. 손자가 매일 따라다니던 아이들의 아버지가 고등학교 시 절 제자였으니 말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는데, 이런 인연이 또 있을까. 담임교사와 제자의 인연이 대를 넘어 25년 만에 이어진 셈이다.
“우리 손자가 자네 아이들이랑 참 재밌게 놀아. 자네가 애들 아버지였구먼. 참 재밌는 인연 이네.”
선생님과 한동안 놀이터에 서서 지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님은 퇴임하신 뒤 무료 방과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기자로 열심히 살아가는 나를 보고 선생님은 “대견하다”라며 웃으셨다.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자 고등학교 때 기억 들이 떠올랐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갔을 때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본격적인 대학 입시가 시작됐지만, 중학교 때 영어 기초가 약했던 터라 어려움을 겪었다. 선생님은 영어 교사셨 다. 담임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과목이니 나름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선생님은 학생들을 진심으로 대하시는 분이 셨다. 아침저녁으로 마주치면 공부 잘하고 있느 냐, 어느 과목이 부족하니 더 해야겠다며 잔소리를 많이 하셨다. 저녁 자율학습을 몰래 땡땡이치 고 친구들과 오락실에 갔다가 걸려 혼꾸멍이 나기도 했다. 선생님은 ‘지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한다’라고 화를 내시며 충고하셨다.
그때는 그게 참 듣기 싫었다. 꾸중 받는다고 생각 했다. 돌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잔소리, 충고는 관심이 없으면 하지 않는 법이다.
전 세계 인구가 78억 명에 이른다고 한다. 둥근 지구 위 사람들은 지구 크기와 비교할 때 아주 작은 점과 다름없다. 78억 개의 점은 시시각각 움직인다. 이 점이 우연히 만나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만났던 점이 25년을 뛰어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 점에 이어진 다른 점인 자녀와 손자의 인연으로 다시 만날 확률은 또 얼마나 될까.
점은 만나면 선이 된다. 오래 이어지면 면을 이루기도 한다. 인연이란 그렇게 공간과 시간을 거쳐 점을 선, 면으로 만든다. 인 (因) 과 연 (緣) 은 그래서 오묘하다. 인이 어떤 것이고 연이 무엇인지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인연이라는 게 있음을 살아가며 종종 확인한다. 인이 중요한지, 연이 중요한지 굳이 따질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인과 연이 만들어낸 과 (果) 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자세도 중요하다.
매년 30명 안팎 학생들을 가르치고 바른길로 인도한 선생님에게 나는 아마도 수많은 제자 가운데 한 명일 터다. 그러나 아이들이 맺어준 특별한 인연으로 나도 조금은 특별한 제자가 된 것은 아닐까.
선생님과의 인연은 3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선생님 집에 놀러 갔던 두 아이를 가끔 찾아오 고, 간혹 아파트 단지에서 뵐 때면 안부를 건네곤 한다.
선생님 집에서 놀던 아이들을 데려오던 어느 날, 둘째가 나를 보고 넌지시 묻는다.
“아빠. 할아버지가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었 다고 했잖아. 그런데 아빠는 고등학교 때 공부 잘했어?”
뜬금없는 질문에 픽 웃으며 답했다.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그런데 아빠. 할아버지가 우리한테 아주 잘해주셔. 좋은 할아버지인 것 같아.”
나는 빙그레 웃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그건 아빠도 잘 알아.”

글.
김기중

 

김기중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좀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 싶어 기자가 됐다. 재밌는 기사, 정보가 되는 기사를 쓰려고 고군분투 중이다. 문화부 출판팀장으로 ‘김기중 기자의 책 골라주는 남자’를 연재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인터뷰집 『뒷모습에 길을 묻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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