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보금자리를 떠나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학교를 정년퇴직하고 만년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요즘 노인 인구가 많아지고 그래서 흔히들 새로운 인생을 얘기하곤 한다. 그런데 나는 몇 해 전부터 신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아, 내가 달라지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60 무렵부터 그런 조짐이 나타났던 것 같다.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신체적인 변화 때문이었다. 차를 운전하며 작은 길로 들어서는데 감각이 예전 같지 않아서 처음에는 ‘어, 왜 이렇지?’ 하고 넘겼다. 해마다 한 번쯤 그런 일이 되풀이되자 그제야 알았다. 그건 자연스러운 신체 기능의 퇴화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환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건강과 영양 모든 게 좋아진 요즘에는 정년도 달라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우선 후속 세대에게 일을 맡기고 현역에서 물러서는 게 사회 운영상 타당하다. 학교 같으면 학생들이 달라지는데 그만큼 그들과 소통이 더 나은 젊은이들이 일을 맡아야 한다. 우리보다 새로운 감각으로 훨씬 잘 해낸다. 혹 우리에게 못 미더운 부분이 있다면 이미 세상이 다르게 요청하고 있어 그에 맞춰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꺼이 다음 세대에게 맡기는 것이 현명하다. 아직 하던 일을 감당할 수 있다 하더라도 건강이 예전과 조금씩 달라진 것은 더더욱 물러나는 것이 타당함을 증명한다.
대신 나잇값을 하려면 그동안 익혔던 지식을 어떻게든 활용할 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크든 작든 나름의 축적된 지혜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의 책무가 아닐까. 나는 평생 책과 더불어 살아왔고 학생들과 머리를 맞대고 지내왔으니 우선 거기서부터 시작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십 년 동안 함께 공부했던 제자들의 제안도 비슷했다. 그래서 두어 가지 공부방을 지속하기로 했다.
그중 하나가 선재행원(善財行苑)이다. 불교사를 연구하는, 이제 중진이 된 몇 사람과 함께 선재동자의 순례 행을 따라 해보려는 모임이다. 5년 기한으로 계획한 일정의 처음 해는 줄곧 부처님의 생애를 세세하게 살펴보기로 했다. 평생 불교의 의미와 역사를 찾아 헤맨 끝에 불교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무엇보다도 석존의 삶을 여러모로 깊이 따라가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얻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함께 하는 모임은 즐거운 환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갖가지 보완자료를 덧붙여 가며 저절로 ‘우리도 부처님같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재미있게 엮어보자고 제안했고 모두 그에 동의했다.
마침 연초에 우연하게도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대탑을 세밀하게 살펴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5년 전에 한 번 찾은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두 가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했다. 하나는 선재동자의 순례 행을 수백 장면의 방대한 화면으로 구성한 『화엄경』 「입법계품」 내용이다. 또 하나는 부처님의 생애를 『방광대장엄경』에 따라 120장면으로 엮은 것이다. 석존의 생애를 살피는 것은 불자들의 기본이다. 다들 경험했겠지만 똑같은 생애인데도 나이가 달라지면서 다가오는 느낌은 계속 달라진다. 깜깜한 절벽에서 저 앞이 탁 트이는 확철대오의 순간은 바라지 않는다. 그저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그런 작은 기쁨을, 순간순간 맛볼 그런 기대를 하며 그 위대한 발자취를 따라나설 생각이다.
20여년 전 불화 속에 깃든 뜻을 풀어낸 책에서 우리나라 팔상탱 속에 담긴 석존의 삶의 주요 장면을 얘기한 적이 있다. 가령 불모 마야부인이 무우수(無憂樹) 가지를 붙잡고 오른편 옆구리로 싯다르타 태자를 탄생하는 장면은 룸비니의 부조상이나 한국의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팔상탱 두 번째 불화) 그림과 크게 다를 바 없이 표현된다. 물론 옷차림이나 주변 환경은 나라에 맞게 바뀌어 있다. 그렇지만 장대한 생애 중에 어떤 장면을 엮어 가장 바람직한 부처님의 생애를 드러내는지는 다소 차이가 있어 재미있는 그림 찾기가 된다. 그런 같고 다름 속에 불법의 이치 또한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이 작지만 나름의 의미 있는 모임이 내가 그동안 축적한 자료를 활용할 수 있는 첫걸음이 되리라고 기대한다. 평생 머릿속에 그려왔던 몇 가지 주제를 견지하며 내 본령을 확인하는 동시에 나와 가까운 사람들과 소통하며 나를 정리하는 일이 곧 이런 자리가 아닐까.
정병삼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명예교수. 1977년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1991년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를 받았다. 간송미술관 수석연구원을 지냈고,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문화재청 사적분과 문화재위원, 조계종 성보보존위원회 위원, 한국의 전통 산사 세계유산 등재추진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맡아 활동했다. 주요 저서로 『의상화엄사상 연구』 『그림으로 보는 불교이야기』 『나는 오늘 사찰에 간다』 『일연과 삼국유사』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