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역자 |
디팩 초프라(Deepak Chopra) 지음 김윤종 옮김 |
정가 | 20,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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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 2020-09-21 | 분야 | 인문-철학 |
책정보 |
504쪽 | 신국판(152*225) | | ISBN 978-89-7479-842-0(03110) |
디팩 초프라(Deepak Chopra M.D.)
인도 뉴델리 태생으로 하버드 의대를 졸업한 내과의사이다. 통합의학 및 개인적 변용 분야의 선구자다. <타임(TIME)>은 그를 지난 백 년 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에 <허핑턴 포스트(The Huffington Post)>는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의학 부문에 1위로 그를 선정했다. <왓킨스(Watkins)>가 매년 선정하는 ‘살아 있는 영적 지도자’ 분야에서 최근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으며 2020년 발표된 순위에서는 12위를 기록했다.
그가 쓴 책 다수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를 기록했으며 전 세계 43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김윤종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정형외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 동서양의 정신적 가르침과 관련된 책을 좋아해 언젠가부터 원서들을 뒤적거리며 맘에 드는 글이 있으면 우리말로 옮겨 지인들에게 전하곤 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번역가 직함까지 달게 되었다.
1부 메타현실의 비밀
1 우리는 환영에 사로잡혀 있다
2 ‘나’는 환영의 창조자이다
3 인간의 잠재력은 무한하다
4 메타현실은 절대적 자유를 준다
5 마음 · 몸 · 뇌 · 우주, 모든 것은 변형된 의식이다
6 존재가 곧 의식이다
2부 깨어남
7 경험을 최우선으로
8 모든 이야기를 넘어
9 지름길
3부 메타휴먼으로 존재하기
10 몸을 해방하기
11 온마음으로 회복하기
12 선택 없이 깨어 있기
13 한 생명
깨어남의 한 달, 서른한 가지 메타휴먼 과정
DNA, 겸손해지다
지금까지 과학은 인간이 일종의 기계임을 증명하기 위해 줄기차게 시도해왔다.
생명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DNA 속 유전자에 각인된 ‘결정된’ 방향으로 삶이 펼쳐질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가령 조현병에서 알츠하이머병까지, “나쁜” 유전자를 갖게 되면 문제 덩어리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식이다. 심지어 불안이나 우울증 같은 것의 성향이 따로 존재한다는 이론으로까지 생각의 범위를 확장한다.
뇌과학자들은 복잡한 감정조차 뇌에서 분비되는 각종 호르몬의 상승과 하강으로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고들 얘기한다. 범죄적 성향을 보이는 경우 fMRI를 촬영할 때 특정 부위에 활동성이 증가함을 보면 뇌가 범죄의 진정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유전적 변이의 오직 5퍼센트만이 해당 질병을 확실하게 야기한다는 보고는 새롭지도 않다. 나머지 95퍼센트는 단지 위험도를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킬 뿐이다. 인간이 DNA에 저장된 정보대로 움직이고 행동한다고 믿는다면 흑인은 여전히 미국 프로야구에서 선수로 띌 수 없었을 것이며 여성은 투표권을 갖기도 못했을 것이다. DNA 구조를 밝혀 1953년 노벨상을 받은 제임스 왓슨은 자신의 경력 대부분을 쌓았던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에서 최근 퇴출되었다. 그가 유전자를 근거로 흑인과 여성이 지능이 떨어진다는 지극히 편협한 주장을 끊임없이 해왔기 때문이다.
뇌과학도 마찬가지다. fMRI 촬영이라는 신기술은 특정 활동을 할 때 뇌가 어떤 모습인지 찍어낸다. 놀랍다. 하지만 특정 뇌 활동의 모습이 동일하다고 모두 같은 활동을 하는 건 아니다. 뇌과학이 발달해 글을 쓰게 하는 뇌의 활동이 무엇인지 밝혀냈지만 똑같이 글을 써도 어느 쪽이 셰익스피어인지 어느 쪽이 바보인지 구분하지는 못한다. 시공간의 바깥 영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뇌가 100조 개의 시냅스 연결을 갖는다 해도 마음의 입장으로 보면 의미가 없다. 이는 마치, 가시광선 낱낱의 파장을 측정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어떻게 모나리자를 그릴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과 같다. “뇌가 마음을 창조한다.”라는 개념은 이제껏 언제나 거짓으로 판명되어 왔다.
과학은 삶의 모든 것을 많고 적음의 양(quantities)으로 측정한다. 하지만 경험이란 삶의 모든 것의 질(qualities)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은 숫자로 나타낼 수 없다. “오늘 몇 단위의 아름다움을 경험했니?”라는 질문은 터무니없다. 아름다움은 주관적으로 경험되며, 여기서 엄청난 간극이 발생한다. 빛의 질, 특히 색깔과 측정된 빛의 파장을 연관 짓는 것은 본질적으로 부적절하다.
과학이 유전자와 뇌에 대한 수많은 증거자료들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결정적
증거라 볼 수는 없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기계라는 신념을 깨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현실을 편집하다
DNA나 뇌는 우리를 ‘창조’하지도 않았고 우리의 행동을 이끌지도 않는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의식이야 말로 유일하게 가능한 자기-창조자임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의식적인 종(species)’이다. 우리에게 시간, 공간, 물질, 에너지는 우리의 창조성에 종속된 가변적인 경험이다. 그 말은, 그것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확장되거나 축소될 수 있다는 말이다.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치과 의자에 누워 있는 경험은 시간을 왜곡시킨다. 그렇다고 환자나 의사가 치과 벽에 걸린 시계의 분침, 시침에 영향을 주었을 리 없다. 그렇다면 개인적 경험과 기계 장치, 둘 중 어느 쪽이 현실인가? 괴이하게 들릴지 몰라도, 시계가 아니고 인간의 경험이 시간을 현실로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질문해야 한다. 의식 중 어떤 것이 (대부분) 우리의 현실을 편집하고 제한하는가? 최근 자주 듣는 단어, 바로 에고(ego)다. 에고는 현실을 편집하는 데 능숙하다.
예를 들어 양자택일은 우리 마음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편집 도구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나와 나 아닌 것(me or not me)”이다. 에고는 각각의 사람을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분리하며, 이때 셀 수 없이 많은 “나와 나 아닌 것”이란 결정을 내린다. 에고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암처럼 전이하므로, 유입된 “다른” 차이들은 사회적 불신과 반감의 기초가 된다.
한 발짝 떨어져서 그림 전체를 본다면, “나”는 현실 편집을 너무 많이 하고 있으며, 그것은 오직 이기적인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오래 되고 고정된 기호에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새로운 가능성들을 차단시킨다. 모든 사람의 과거란 호불호, 감정적인 느낌, 짐짝처럼 끌고 다니는 기억들에 대한 선택의 혼란스러운 모둠일 뿐이다. 여기에 더해지는 고정된 신념, 가족사, 출생 후부터 일어난 모든 삶을 바꾸는 경험들은 말할 것도 없다. 태어난 이후 어떤 일을 겪어 왔는지가 지금의 당신을 결정한 것이 아니다. 그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당신이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당신을 결정했다. 에고 그리고 그것이 가졌던 모든 반응은 거대한 정신적 구조물이다. 그것은 우리의 아득한 조상들 안에 있던 씨앗으로부터 자라온 것이다. 현실을 편집하는 능력은 인간이 관심을 주기로 결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원인이고, 우리는 수십억 개의 것들에 관심을 가져왔기에, 편집되지 않은 상태의 현실은 틀림없이 그보다 엄청나게 더 클 것이다. 인류의 성취는 진짜 현실의 눈곱만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지평에는 한계가 없다.
결론적으로, 당신이 자각하는 자아가 당신이 동일시하는 자아이다. 고정된 자아란 없다. 고정된 육체가 없듯이 말이다. 우체국 대기 줄에서 자리를 놓고 싸울 때, 에고가 호출되어 올라온다. 갓난아기를 보며 사랑스럽다 느낄 때, 무의식적 자아가 드러난다. 당신 주위에 펼쳐지는 모든 일의 원인은 당신 자신임을 깨달을 때, 참자아가 드러난다.
가상현실 vs 메타현실 그리고 메타휴먼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가상현실’에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가상현실은 편집된 세상이다. 가상현실은 그 약물이든 전기적 자극이든 또는 우연히든 상(images)을 창조한다. 상이 입체라고 해서 그것이 실제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뇌가 창조한 것이든 VR 장치가 창조한 것이든 똑같이 3차원 상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개인적 자아 모형은 저장된 과거 기억으로부터 상(image)을 뽑아 이제껏 공들여서 건설되었다. 이 오래된 경험들로 이루어진 골동품은 마치 “당신”처럼 느껴진다.
한편 메타현실은 순수의 부분이다. 그곳에서부터 경외심과 경이로움이 마음에 공급된다. 그것이 마음이 없는 상태는 아니지만, 이성적인 사고를 뛰어넘는다. 만약 스스로를 유한하고 국소적인 존재로 여기는 일상의 습관을 떨쳐버리고 깨어날 수만 있다면, 각자에게 존재하는 잠재력, 진정한 본성이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인간을 저자는 메타휴먼이라고 부른다.
메타휴먼은 깨어나라는 강력한 자명종이다! 과학적인 근거와 전인적 통찰을 멋지게 버무려, 환영에 불과한 정신적 구조들을 벗어나 한계 없는 실재를 목격할 수 있도록 해준다. 오직 그때서야 인간의 잠재력이 최대치에 도달할 것이다
과학을 신봉하는 시대에 디팩 초프라의 ‘경고’는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이 책에서 자아, 마음, 뇌, 몸, 그리고 온 우주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의 유일한 창조자가 오직 의식뿐임을 성공적으로 논증해내고 있다.
평균적인 사람은 우리가 얽혀 있는 마법/꿈/환영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다. 온실가스의 축적을 신의 징벌이라 설명할 수도, 일련의 대단히 불행한 사건들의 결과라 할 수도, 아니면 인간의 불완전함이 다시 한 번 일을 망쳤다고 할 수도 있다. 자기-파괴는 분명 우리 본성의 일부이지만, 자기-창조가 무한대로 더 강력하다. 깨어남으로써, 인간들이 잘못한 일을 메타휴먼들이 바로잡을 수 있다. 깨어남은 한 번에 오직 한 사람씩 일어난다. 실재는 숫자놀음이 아니다. 오직 한 물건이 뛰노는 우주이니, 당신과 나 정도라면 창조 자체를 움직임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우리는 “나의” 몸, “나의” 마음이라고 말하도록 조건화 되어 있다. 그것들이 우리가 경험하는 움직임과 생각을 행한다고 자동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메타현실에서 움직이고 생각하는 자는 의식이다. 우리는 한 가지 단순한 이유로 이 관점으로 전이할 수 있다. 그리고 전이해야만 한다. 뇌가 상위 의식으로 도약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의식만이 할 수 있다. 바이올린의 현이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적 마음이 물리적 표현의 도구로서 바이올린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과 같은 이유로, 몸마음(bodymind) -몸과 마음을 나눌 수 없는 하나로 이해하여- 은 의식의 물리적 표현이다.
126쪽 「인간의 잠재력은 무한하다」 중
의식이 우주와 함께 노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 곧 우주이다. 그것은 헬륨이 될 수도 은하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의식이 노는 방법이다. 그것은 뇌세포가 되어서도, 심장박동이 되어서도 놀 수 있다. 이렇듯 형태변환(shape-shifting)은 멈추는 법이 없다. 당신이 행복하거나 슬프다 느낄 때, 당신은 두 개의 상반된 의식의 상태(mode)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 또한 의식이기에, 그리고 당신의 뇌 또한 그렇기에, 여기에는 오직 하나의 결론만이 가능하다. 창조란 의식이 자기 자신을 경험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금 장신구를 만들 때, 그 형태는 천차만별로 변하지만 결국 금 -이것을 창조의 본질적 “질료(stuff)”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이다. 궁극의 진리(Truth with a capital T)을 찾는 인간의 여정에서, 오직 이것만이 자격이 있다.
186쪽 「마음 · 몸 · 뇌 · 우주, 모든 것은 변형된 의식이다」 중
자기-창조는, 의식이 끝없는 팽창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 외에 그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과거 언젠가, 호모 사피엔스 또한 어떤 문을 열어젖혔으니, 그것이 자기-각성(self-awareness)이다. 우리는 우리의 잠재력으로, 원한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명이 아무리 변해도, 인간이라 함은 각성의 존재임은 변하지 않는다. 때문에 유일한 질문은, 과연 어느 정도의 각성을 우리가 떠안기로 선택하는가 뿐이다. 메타휴먼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가깝다. 그것은 단지 각성의 정도가 더 높은 상태일 뿐이다.
218쪽 「존재가 곧 의식이다」 중
내가 이 세 가지 자아 -에고, 무의식적 자아, 그리고 참자아-를 각기 다른 범주로 나눈 이유는 오직 이것들을 묘사하기 위함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셋 모두와 중첩되어 있다. 근원으로부터 어떤 각성된 의식이 일어날 때, 모든 충동에 무의식적인 요소가 들어 있고 종국에는 에고의 요소가 들어간다. 흔한 예는 우정이 로맨틱한 사랑으로 변하는 경우이다. 친구 사이에서는 전체적으로 에고 수준의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자신들의 사회적 페르소나를 서로에게 보여준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우정이 깊어짐에 따라, 무의식이 더욱 친밀하게 스스로를 드러내며, 때로 두 사람이 충분히 안정감을 느끼면 우정의 진정한 핵
심, 즉 사랑이 스스로 드러난다. 이것은 최종적인 목표로 보이겠지만, 참자아의 수준에서 타인은 필요하지 않다. “나 이다(I am)”인 순간, 순수 의식의 주변을 진동하며 에워싸는 사랑 그 자체다.
결론적으로, 당신이 자각하는 자아가 당신이 동일시하는 자아이다. 고정된 자아란 없다. 고정된 육체가 없듯이 말이다. 우체국 대기 줄에서 자리를 놓고 싸울 때, 에고가 호출되어 올라온다. 갓난아기를 보며 사랑스럽다 느낄 때, 무의식적 자아가 드러난다. 당신 주위에 펼쳐지는 모든 일의 원인은 당신 자신임을 깨달을 때, 참자아가 드러난다.
265~267쪽 「경험을 최우선으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