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카(Cars, 2006)>는 40번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기존 66번 국도와 그 선상의 마을이 지도뿐 아니라 사람들 기억에서도 사라졌던 실제 미국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인간은 늘 목적지까지 최단 거리, 즉 직선으로 뻗은 경제적인 길을 찾는다. 길이 없으면 개척해서라도 직진하는 인간의 합리성에 구불구불 돌아가는 곡선 길은 버려진다. 등산길은 어떨까. ‘정상 찍기’에 목적을 둔 사람이 등산로를 따라 지체 없이 정상에 오르면 그 길은 직선 길이다. 등산로에서 벗어나 군데군데 위치한 사찰에 굳이 들렀다 가는 길은 우회하는 길, 즉 곡선 길이다.

이번 특집을 기획하며 북한산에 직선을 그을지, 곡선을 그릴지 고민했다. 그러다 퍼뜩 떠오른 한 마디, ‘바쁠수록 돌아가라.’ 이번 북한산 산행은 직진본능을 억누르고 멀리 돌아가기로 한다. 아 참, 1985년 공식 지도에서도 삭제된 미국 66번 국도는 지금 어떻게 됐냐고? 추억의 도로로 회자하며 길을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자 2003년 국도로 다시 복원됐다. ‘66번 도로일주’는 많은 이들의 버킷리스트에도 올라 있다. 때로는 직선보다 곡선, 직진보다 우회다.

사진. 유동영 

비봉탐방지원센터 ▶ 금선사 ▶ 비봉 ▶ 승가사 ▶ 구기탐방지원센터

| 어디서 찍을까, 산행의 쉼표

7730번 버스를 타고 이북오도청에서 내려 약속장소인 비봉탐방지원센터로 향했다. 꽤 경사가 있는 길이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평일 이른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비 예보 때문인지 길에 사람이 없었다. 단 한 명, 편한 티에 레깅스를 입은 앳돼 보이는 여성이 지원센터 앞에서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북한산 비봉 코스를 함께 오를 동행인, 등산을 시작한 지 1년 됐다는 32살 윤성혜 씨였다. 오늘 잘 부탁한다는 기자의 말에 스스로 ‘산린이(산+어린이의 합성어로 등산 초보자를 일컫는 신조어)’라 칭하며 수줍어한다.

최근 몇 년 사이 2030 젊은 등산객 비중이 부쩍 늘었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등산을 인증하는 문화, 쉽게 등산크루(소규모 등산 모임)를 꾸릴 수 있게 만들어진 플랫폼의 보편화, 힐링 열풍 등이 영향을 끼쳤다. 여기에 코로나19로 실내 스포츠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등산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녀는 어떻게 등산을 시작하게 됐을까.

“작년에 퇴사와 남자친구와의 결별로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지친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클라이밍, 서핑, 등산 등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됐죠. 그중 제일 좋았던 등산에 정착하게 됐어요. 그전까진 집에서 영화나 애니메이션 보는 걸 좋아하는 ‘인도어파(집 안이나 실내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였어요.”

등산을 즐기는 사람이 원래 인도어파였다니 희망이 보였다. 아웃도어 활동과 담쌓고 산 기자도 산행에서 매력을 찾을 수 있을까. 얘기를 나누다 보니 두 갈래의 길이 나왔다. 표지판은 오른쪽으로 등산로, 왼쪽으로 목정굴을 가리켰다. 이번만큼은 직진이 아닌 우회, 직선이 아닌 곡선을 그리기로 하지 않았던가. 산행의 첫 번째 쉼표를 목정굴에 찍기로 한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계곡물 옆 계단을 오르자 깜깜한 석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 정조가 농산 스님 기도로 후사를 봤다는, 순조 임금의 탄생 설화가 깃든 기도처다. 목정굴에서 이어진 길을 따라가면 템플스테이 명소로 유명한 금선사(월간 「불광」 8월호 ‘청불이 온다’ 특집 참고)가 나온다. 경내에는 200년 넘은 소나무를 비롯해 여러 나무가 멋대로 서 있었다. 보리수나무를 살리기 위해 요사채를 휘게 지었을 정도로 자연과 하나 된 사찰. 외국인들이 금선사를 특히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문득 산이 좋아 산을 계속 찾는다는 그녀가 궁금해졌다. 산의 어떤 점이 좋았을까.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고요한 자연 속에서 천천히 호흡하며 산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졌어요. 자연스럽게 제 마음이 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됐고요. 산속에서 명상하니 저도 몰랐던 제 마음의 세계가 열리더라고요. 잃어버린 나를 만나게 됐다고 할까요.”

대체 산속에서 명상은 어떻게 하는 건가.

“평소엔 등산하다가 평평한 장소가 보이면 앉아서 명상을 시작해요. 그런데 지금처럼 걷고 대화하면서도 명상을 할 수 있어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틈날 때마다 명상하면서 저에 대해 알려고 노력 중이에요.”

비봉탐방지원센터 ▶ 금선사 ▶ 비봉 ▶ 승가사 ▶ 구기탐방지원센터

| 등산(登山) 넘어 입산(入山)의 경지로

금선사를 나서 비봉으로 오르는 길,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봉까지 이어지는 길은 대부분 바윗길이었다. 방수 기능 없는 면 옷은 비에 흠뻑 젖어 체온을 떨어뜨렸고, 밑창이 얇은 운동화는 빗물에 자꾸 미끄러졌다. 반면 그녀는 등산 중 비 오는 상황이 익숙지 않다면서도 능숙하게 배낭에서 모자와 바람막이 재킷을 꺼내 장착 후 씩씩하게 걸음걸이를 옮겼다. 그렇다. 미끄럼을 방지하는 등산화와 체온을 유지하는 바람막이는 안전 산행을 위한 필수품이었다. 2030세대 등산 문화를 글로 배운(?) 기자는 ‘간소하고 편한 차림’이란 단어에 꽂혀 아무 준비 없이 산행에 나섰고(간소함과 허술함은 다르다!), 결국 양손을 바닥에 짚어가며 엉금엉금 기어가듯 산을 올라야 했다. 이끼 낀 미끄러운 바위를 디딜 때는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친절한 동행인의 도움을 받았다. 초면에 이런 진한 스킨십이라니!

“이제 비봉까지 500m 남았대요. 제 손 잡으세요. 받쳐드릴게요.”

산에서의 500m는 평지에서의 500m와 천지 차이. 한참 빗길을 오르고서야 우뚝 선 비봉 앞에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지 안내판이 보였다. 북한산 비봉능선의 향로봉과 사모바위 사이에 있는 비봉은 신라 진흥왕이 백제의 한강 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직접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순수비를 세운 곳이다. 비석이 세워진 봉우리라고 해서 비봉(碑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신라의 전성기를 알리는 진흥왕 순수비. 백제 관점에서 보면 동맹 관계였던 신라에 뒤통수를 맞고 땅을 뺏긴 아픈 역사일 것이다.

수 세기가 지난 지금, 사람들은 비봉 정상에 세워진 이 비석 옆에 서서 손으로 브이(V) 자를 그리며 등정 인증 사진을 찍는다. 기분이 묘했다. 한강 이북을 차지한 승자는 비봉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는 왜 정상에 오르려 하는가. 비봉에 직접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날씨로 인한 추락 위험으로 진흥왕 순수비가 있는 꼭대기까지는 오르지 않았다). 운무망망. 운무가 잔뜩 끼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구름 속 신선이 되어 여기가 극락인가 생각하는데 그녀가 더 재밌는 표현을 알려준다.

“이렇게 구름과 안개가 잔뜩 끼어 시야 확보가 안 되는 상황을 등산족 사이에서 ‘곰탕’이라고 표현해요. 모양새가 마치 뽀얀 곰탕 국물과 비슷하다고요.”

그러더니 불쑥 핸드폰을 내밀며 사진을 부탁한다. 맞은편 사모바위가 나오게 찍어달라는 주문이다. 인스타그램(사진 및 동영상을 공유할 수 있는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올릴 인증 사진이었다.

“처음엔 완등 인증 사진을 SNS에 공유하는 게 조금 어색했는데, 이제 등산의 소소한 재미가 됐어요.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과 댓글로 소통을 하는 재미도 있고요.”

2030 젊은 등산객 사이에서는 개인 SNS 인증 외에 ‘도장 깨기’ 형식의 챌린지도 유행 중이다. 산행 커뮤니티 플랫폼인 ‘블랙야크 알파인 클럽(BAC)’이 운영하는 ‘명산 100’ 챌린지 프로그램은 우리나라 100대 명산으로 선정된 산 정상에서 인증 사진을 찍어 올리면 10개 산을 완등할 때마다 기념배지를 증정하는 방식으로 회원들에게 완등의 성취감을 부여한다. 그녀 역시 블랙야크 100대 명산 챌린지 프로그램에 참여 중이다. 이미 20개가 넘는 산의 정상 등정 인증으로 2개의 기념배지를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챌린지를 잠시 중단한 상태라고. 

“챌린지 자체가 목적이 되면 산행 자체를 즐기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더라고요. 산을 오르다 보면 굳이 정상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내려오고 싶을 때도 있는데 정상 등정 인증에 집착하면 그게 안 되잖아요. 가보니 너무 좋아서 두 번 세 번 가고 싶은 산이 있어도 챌린지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되고요.”

‘정상 찍기’를 목적으로 두지 않고 산행 자체를 즐기는 그녀는 이미 등산(登山)을 넘어 입산(入山)의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우리는 언제부터 ‘승자’, ‘꼭대기’, ‘정상’, ‘더 높이’, ‘더 멀리’에 집착하게 됐을까. 왜 전문산악인이 아닌 취미로 산행을 즐기는 사람에게조차 산은 도전하고 정복해야 하는 대상일까. 산에 들어선 것 자체가 산행이거늘…. 산에서 무언가를 얻어가겠다는 집착을 버리고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비봉을 내려왔다. 꼭대기까지 오르지 못해 미처 보지 못한 진흥왕 순수비에 미련은 없었다.

| 산, 나를 비추는 거울

목이 탔다. 그녀가 챙겨온 물을 조금씩 나눠 마시며 왔는데 이제 그 물마저 동이 났다. 산행의 두 번째 쉼표를 찍을 사찰은 승가사. 절에 도착하면 물부터 얻어 마실 작정이었다. 그런데 맙소사, 일주문을 지나자 눈앞에 돌계단이 펼쳐졌다. 젖은 솜뭉치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고행하듯 108계단을 올랐다. 오른쪽 아래 승가사 9층 석탑이 눈에 들어왔다. 튼튼한 기단 위에 코끼리, 사자 등 동물들이, 그 위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탑을 지키고 있었다. 불어오는 비바람에 잠시 땀을 식혔다.

대웅전에 들러 잠시 참배하고 전각 뒤의 짧은 계단을 오르니 바위굴이 나왔다. 보물 1000호로 지정된 승가사석조승가대사상이 모셔진 승가굴이다. 조선 시대 세종대왕 비 소헌왕후의 병을 낫게 해 약사전으로 불렸다고 한다. 안쪽 왼편에 약수 뜨는 곳이 보였다. 드디어 나왔다, 사막의 오아시스! 다디단 약수를 벌컥벌컥 마시며 해골 물을 맛있게 마셨다는 원효 대사를 떠올렸다(평

소 기자는 물 냄새에 예민해 약수를 마시지 않는다). 모든 일은 마음에 달렸다. 목을 충분히 축인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가 그동안 괴로웠던 이유가 회사나 남자친구 때문이 아니라 제 마음을 몰랐기 때문이더라고요. 5성급 호텔에 있어도 내 마음은 지옥일 수 있고, 길바닥에서 자더라도 그 순간에 행복을 느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 눈높이와 기준에 맞춰 사느라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놓친 채 엉뚱한 데서 행복을 찾았던 거죠.”

그녀의 진심 어린 이야기를 들으며, 절의 맨 뒤쪽 암벽에 새겨진 마애석가여래좌상을 향해 천천히 108계단을 올랐다. 계단이 정말 많은 절이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등산과 명상을 시작한 후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제 마음을 들여다보며,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받아들이며 매 순간 감사함을 느끼게 된 거 같아요. 건강한 신체에, 자연이 주는 음식에, 좋은 친구들에, 내가 지금 가진 모든 것들에 감사해요.”

마애석가여래좌상 앞에 선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합장했다. 근엄한 표정의 거대한 불상이 마치 네 마음 다 안다는 듯 그녀를 굽어봤다. 불자는 아니지만, 등산과 명상을 시작하면서 내적 성찰을 강조하는 붓다의 가르침에도 관심을 두게 됐다는 그녀다. 자연스럽게 환경과 채식에까지 관심이 이어졌다고.

“원래 물건 사 모으는 걸 좋아했는데 쓰레기를 만들지 않기 위해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있어요. 지금 메고 있는 등산 가방도 중고로 구매했어요. 친구들과 함께 산에 오르며 쓰레기를 줍는 클린 산행도 종종 하고요. 또 완벽하진 않지만, 간헐적으로 채식을 하며 육류를 줄이고 있습니다.”

그림 관련 전공을 한 그녀는 앞으로 그림 그리기와 등산·명상을 연결해 시너지를 낼 방법을 고민 중이다. 산에서 스스로 마주하고, 그 생각을 실천하며 사는 것. 바로 그녀만의 ‘산(山) 사용설명서’였다. 산에서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