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중요한 세미나 혹은 토론에 감초(?)처럼 등장하던 스님이 자취를 감췄다. 전국비구니회 집행부로서 여러 기획을 하고 일정을 소화하던 모습도 사라졌다. 종종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가야산의 한 암자 이야기가 스님 소식의 전부였다. 늘 바빠 보이던 스님 일상에 쉼표가 보였다.
해인사 국일암으로 달려가 차 한 잔 청해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쳤다.
사진. 유동영
| 국일암은 나의 운명
명법 스님은 뜻하지 않게 해인사 국일암 감원 소임을 맡았다고 했다. 지난해에는 화엄탑사구미불교대학에서 화단을 가꾸고 불교대학에서 강의했고 사찰을 운영했다. 아픈 사형을 대신해 국일암을 오갔다. 청도 운문사 회주 명성 스님 구순법회, 이낙연 총리 조찬모임 등 전국비구니회 일정도 소화했다. 그러면서 불교대학 강의와 글쓰기, 국화축제와 송년의 밤 행사 등 여러 일을 했다. 부처님과 문중, 불자들 시은 갚는 데 몸과 마음을 바삐 썼다. 여기저기에 불려(?) 다녔다.
: 서울에서 만나기가 어려워졌어요.
“사형스님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어요. 국일암 관리가 힘들어졌죠. 구미 절 주지소임을 회향하고 국일암에 들어오자마자 코로나19 확산으로 해인사 산문이 폐쇄됐어요. 강의도 다 취소되고 5월까진 암자 밖으로 거의 못 나갔는데 보기에 따라서 어느 순간 사라진 거죠(웃음).”
: 국일암과는 무슨 인연이 있나요?
“출가 본사에요. 은사스님은 물론 사형사제와 추억이 깃든 곳이죠.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진 암자에요. 언제 창건됐는지 기록은 없지만 남한산성을 축조한 벽암 스님이 주석하신 도량이 국일암이죠. 은사스님이 오셔서 쓰러져가는 암자를 다시 일으켰고, 한국 최초의 비구니 선방이 열렸어요.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출가한 혜해 스님 같은 분들이 그리고 불필 스님도 약관의 나이로 정진하셨던 암자랍니다. 벽암 스님 유적으로도 중요하고 비구니 수행처로도 의미가 있는 곳이에요.”
명법 스님 말씀과 몇몇 기사와 자료를 살피니 국일암을 알 수 있었다. ‘국일암(國一庵)’이라는 이름은 임금이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 스님에게 준 시호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에서 따왔다. 인조는 조정 지원 없이 3년 만에 축성한 노고를 높게 사서 시호를 내렸다. 나라의 제일이라며 ‘국일(國一)’이라 했고, 수장을 뜻하는 ‘도(都)’, 선사 앞에 ‘대(大)’까지 붙였다.
명법 스님은 “벽암 스님이 가야산에서 정진할 때 국일암에 주석했다”며 절 이름에 ‘국일’이 들어간 곳은 여기뿐이라고 했다. 차담을 나누는 공간에 벽암당(碧巖堂) 편액이 붙은 이유가 있었다! 영정 진본은 성보박물관에 있다고.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쇠락했던 국일암을 은사스님이 중건하고 부산, 마산까지 탁발 다니면서 비구니 선방을 운영했다.
| 암자의 시계는 돌아간다
사라졌다가 국일암에서 재등장한 명법 스님은 세 가지 불사 원력을 세웠다. 벽암 스님 조명, 비구니 혹은 출재가 수행공동체, 편의시설 조성이다. 덧붙이자면 움직이는 절 ‘무빙 템플(Moving-Temple)’에서 사부대중이 함께 공부한 경전을 책으로 엮는 일도 있다. 3년 동안 『유마경』을 강독했고, 2년 남짓 『화엄경』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 국일암에서 할 일이 많네요.
“원형이 훼손되지 않아 고맙기도 하지만 절이 많이 낙후됐어요. 오래된 해우소가 문화재급이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사용하긴 불편하죠. 해우소는 해우소대로 보존하고 사람들의 편의시설이 필요해졌어요. 벽암 스님 부도와 자리들도 정비하고, 생전 자취도 살리고, 조사 모시는 장소도 여법하게 해서 사격을 높여야 해요. 당분간 국일암에 집중하려고 했는데, 큰 절 일도 맡았어요.”
: 해인사 성보박물관 일인가요?
“코로나19로 대중 강연은 힘들고, CEO 과정으로 1년 커리큘럼의 불교대학을 준비하고 있어요. 문명의 발자취를 불교 입장에서 다시 보고 문화 형성과정을 이해하면서 미래를 가늠하는 거죠. 주제는 ‘문명의 이동과 불교’에요. 불교 조각이 인도에서 해인사까지 오게 된 과정, 청대 중국문화를 경험한 추사 김정희의 서체 이야기, 고려대장경과 미래 매체 이야기, 백남준 비디오 이야기 등 무궁무진해요. 가야산 일원 역사문화유적을 답사하면서 템플스테이도 할 거예요. 그래서 무료는 아니에요(웃음).”
: 다시 바빠지네요. ‘무빙 템플’은 여전한가요?
“네. 공부를 꾸준히 하면서 『유마경』에 이어 지금은 『화엄경』까지 왔어요. 경전 원문을 진득하게 깊이 들어가서 보고 음미하고 싶어서 시작했죠. 요즘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가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계산해도 삶은 그대로 흘러가지 않는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그 너머로 나아가게 돕는 게 종교의 힘이구나 싶어요. 합리적 이성이 서구 지성과 근대 문명을 만들었지만,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극복되는 방식은 의식 전환과 삶의 실천으로서 전환이에요. 현대적인 언어와 사유로 우리 삶과 『유마경』, 『화엄경』을 연결하는 지점을 풀어 쓰려고 해요.”
: 예를 들면요?
“『화엄경』에는 부처님 공덕을 여러 보살들이 찬탄하는데, ‘이게 삶이 돼야 하는구나’ 자꾸 되뇌어요. (보살의 인격 세계 발전 과정을 열 단계로 나눈 「십지품」만 봐도 범부가 도달하기 어려운 지점인 것 같은데요?) 이기적인 우리 마음과 생각의 단계를 뛰어넘는 차원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 속 세계가 모두에게 있고 여기에 종교의 본연이 있어요.”
: 인공지능 시대에 오히려 영성적이고 종교적인 부분이 더 부각된다는 예전 스님의 주장과 맥락이 같네요.
“서구는 이성으로 종교를 합리적으로 해석했다는데, 오히려 그런 부분이 종교를 왜곡했다는 말들이 나와요. 포스트모던 이후 종교를 신학이 아니라 철학적 과정으로 보자는 논의들이 있어요. 거기서 종교가 왜 다시 필요한가를 고심하죠. 경전을 공부하면서 다시 바라봐야 할 불교도 여기서 찾고 있어요.”
| 내려놓는다는 것
언젠가부터 명법 스님은 페이스북에 국일암의 소소한 일상을 공유했다. 아침저녁으로 밥 달라고 오는 고양이들이 3층으로 포개 앉은 모습에 웃었고, 날이 밝기도 전에 지저귀는 새들 탓에 늦잠을 포기했다. 다육이와 난 몇 촉을 가꾸고 다락을 정리했고, 암자 앞 밭에서 고사리를 수확했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해인사 통제소에서 출입 차량 통제하는 당번도 섰다. 긴 장마로 눅눅해진 법당의 방석들을 꺼내 햇볕에 말렸다. 딱딱한 발제문만 쓰던 스님 글이 일상처럼 부드러워졌다. 스님 얼굴도 밝아졌고, 웃음도 그랬다.
: 페이스북에 소소한 일상이 자주 보여요.
“몸을 많이 쓰게 됐어요. 혼자서 예불을 하고, 잡초를 뽑고 청소하고, 하루가 금방 가요(웃음). 뭘 남기는 것보다 비우고 흔적을 지우는 삶이 진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해우소를 보세요. 남기지 않는 삶이에요. 근심(배설물) 덜어놓으면 그게 자연으로 돌아가서 계속 순환하죠. 그런 삶이 좋을 수도 있겠네요.”
: 국일암이 스님을 한 단계 성숙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무도 모를 일이에요(웃음). 국일암은 제게 빈 공간이자 더 내려놓고 자기를 수행하게 하는 공간이에요. 이런 삶을 공유하고 싶어요. 소수의 인원이 1주일이나 한 달 동안 국일암에서 생활하면서 생태적이고 불교적인 삶을 경험한 뒤 일상으로 돌아가면 자신의 변화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이번 장마 등 여러 징후가 기후위기를 알려주고 있는데 우리 삶을 바꿔보는 체험을 국일암에서 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지구는 일회용품이 아니니까. 앞에 있는 밭도 신도들과 공동경작도 하고 함께 수행도 하고….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어요.”
명법 스님은 “불사를 마치면 책 쓰고 (대중과)수행하며 살고 싶다”며 “가을부터 가을배추와 무를 심겠다”고 함박웃음이다. 해인사 국일암 그곳엔 스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