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오대산 그림을 보았을 때 높고 낮은 푸른 산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지
실로 와서 보니 다투어 흐르는 온갖 골짜기들 구름을 뚫고 나 있는 길이 낯설지 않네
-고려의 문신 진화의 ‘매호유고’ 가운데
고려의 산수화가 전해지지 않아 그 격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대산은 시인 묵객들이 선호하는 주요 방문지였음이 분명하다.
정조는 김홍도와 김응환에게 명하여 관동지역과 금강산을 화폭에 담게 한다. 김홍도의 스승이었던 강세황의 글에 전하기로, 화폭의 수가 약 100여 폭에 이르렀다 한다. 정조는 이 그림들을 가지고 ‘해산첩’을 만든다. 그림들 가운데 네 폭에 오대산이 담겼다.
글·사진. 유동영
월정사
한계산 동쪽이 설악산이고 설악산 남쪽이 오대산이다. 산이 높고 크며 골짜기가 깊어 산 기운이 최대로 쌓인 것이 다섯 개이므로 오대라고 부른다. 최북단은 상왕산인데 산이 매우 높고 험준하며, 정상은 비로봉이다.
그 동쪽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가 북대인데 감로정이 있다. 비로봉 남쪽이 지로봉이고, 지로봉 위가 중대인데 산이 깊고 기운이 맑아 조수가 살지 않는다.
-미수 허목의 ‘오대산기’ 가운데
사고
모든 산봉우리가 사고를 받들며 두 손을 마주잡고 인사를 하고 있어, 온갖 신령들이 보살펴 주는 듯하다. 사고는 위아래로 두 개의 서각이 있다. 아래에는 금궤를 보관하였으며 위에는 왕실의 족보인 선처를 봉안하였다.
-김창흡의 ‘오대산기’ 가운데
비스듬히 서쪽으로 가서 산록 하나를 오르자 작은 암자가 나타난다. 금강대라고 하는데, 그윽하여 거처할 만은 하나 깊은 골짜기에 있어 볼만한 것은 없다.
-김창흡의 ‘오대산기’ 가운데
옛 문헌에는 영감사의 뒷산을 남대로 지칭했고 나옹 스님과 사명 스님 또한 영감사에 주석했다.
상원사
상원사의 동종은 안동의 문루에 있던 것을, 조선 세조대에 중창 불사 하며 옮겨 온 것이다. 비천이 들고 있는 악기는 공후와 생황이다.
상원사(上院寺)는 지로봉 남쪽 기슭에 있으니, 산중의 아름다운 사찰이다. 절의 동쪽 구석에 큰 나무가 있는데, 가지와 줄기가 붉고 잎은 회(檜)나무와 비슷하다. 서리가 내리면 잎이 시드는데 노삼(老杉)이라 부르며, 비파(枇杷)나무라고도 한다.
- 허목의 ‘오대산기’ 가운데
중대
‘산의 중대에 사자암이란 암자가 있었는데 국가를 보비하던 사찰입니다. 대의 양지쪽에 자리잡고 있어 이 대를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모두 거쳐가는 곳입니다. 세운 지 오래되어 없어졌으나 빈터는 아직도 남아 있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한탄하고 상심하니, 만약 이 암자를 다시 세운다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기뻐하고 경축함이 반드시 다른 곳보다 배나 더할 것입니다’ 하였다.
-권근의 ‘오대산 사자암 중창기’ 가운데
어느 스님이 조선 태조에게 위와 같이 말하였고, 권근은 중창기에 그 내용을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