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스님 "이제 수행자 불사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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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스님 "이제 수행자 불사하렵니다"
  • 최호승
  • 승인 2021.01.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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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 20년 소임 회향한 금강 스님

“미황사를 아름다운 절로 만드는 사람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음력 12월 1일, 그러니까 초하루다. 평소 같으면 초하루 법회 풍경은 기도하는 불자들로 북적인다. 하지만 코로나19 방역조치로 절집이 조용해졌다. 그래도 몇몇 불자들이 뜨문뜨문 미황사를 참배했고, 미황사에서 마지막 초하루를 보내는 주지 금강 스님과 인사를 나눴다. 떠남을 아쉬워하는 불자들은 스님에게 아련한 시선을 보내며, 스님의 다음 행보를 걱정했다. 감사 인사를 전하던 스님은 불자들에게 부단한 정진을 당부했다.

 

사진. 유동영

지난 20년 동안 금강 스님은  미황사를 1년 내내 사람들로 붐비는 도량으로 만들었다.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스님의 뒷모습에 아쉬움은 없었다.

 

아름다운 절, 아름다운 회향

지난 1월 만난 금강 스님은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해남 미황사와 이별을 준비 중이었다. 30대 중반이던 2000년부터 주지 옷을 입었으니 꼭 20년 만이었다. 미황사를 오가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스님과 눈을 맞추거나 합장으로 배웅했다. 미황사에 소복하게 쌓였던 눈이 따뜻한 남도 햇살에 녹아내렸고, 스님은 따뜻한 차를 내렸다. 

스님이 미황사를 떠나는 소식은 우연히 알려졌다. 미황사 주지 임명 등 행정을 관리하는 본사인 대흥사에 따르면, 대흥사와 주지 소임을 회향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 소식이 공식화되면서 미황사 신도회와 해남 지역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미황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은 지역 신문에 “금강 스님은 다 쓰러져가는 미황사를 아름다운 사찰로 일궜다”며 “달마산에 미황사가 있어 산이 아름답듯이 미황사는 금강 스님이 계셔야 아름다운 절”이라는 호소문을 실었다. 잠시 도량을 비우고 전국을 순례 중이던 스님은 뒤늦게 이 소식을 접했다. 난감했단다. 급히 미황사에 돌아온 스님은 ‘미황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아름다운 마무리는 더 중요했다. 스님은 후임으로 오는 주지스님과 미황사를 도와달라고 설득했단다. “미황사가 항상 제 역할을 하도록 돕는 사람은 여러분이고, 나를 붙잡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라고 사정했다. 

Q. 떠난다는 소식에 미황사를 아끼는 사람들이 만류하며 호소했는데, 스님이 설득했다고 들었다 

“소식이 알려지면서 해남 사람들이 서명 운동을 했어요. 너무 깜짝 놀랐죠. 제가 부탁했습니다. 세상에 좋아하는 게 있으면 그만큼 싫어하는 게 생기는 법이에요. 분별심이죠. 미황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칫 미황사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될 것 같았어요. 다음 주지스님에게도 미안하고요. 그래서 사정했습니다.” 

 

Q. 긴 시간 설득했나

“그렇지는 않았어요(웃음). 미황사에서 분별심, 차별심 없게 살았기에 금방 마음이 통했습니다. 제 맘을 다 알아요. 붙잡는 맘이라도 있느니 ‘내가 잘 살았구나’하고 느꼈습니다. 미황사에 오는 스님도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Q. 떠나기 전 도배도 하고 다음 주지스님을 향한 배려가 남다르다

“그게 절집 미덕이죠. 토굴에 혼자 사는 스님도 해제하고 떠날 때는 다음 스님이 적어도 한철 정도는 살 수 있도록 장작을 쌓아두고 떠납니다. 20년이나 미황사에서 살았는데, 제가 아무리 잘 정리해도 후임 주지스님에게는 안 맞는 옷처럼 불편할 거예요. 당장 방부터 지저분하면 힘들죠.” 

 

Q. 마을, 사람 그리고 미황사와 20년 
20년 동안 한 사찰의 주지를 하기란 여간 어렵다. 임기가 4년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4년간 5번을 했으니 잘 살았다는 말도 된다. 지난해 문화재청은 금강 스님을 문화유산보호 유공자로 선정,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나열하자면 길다. 미황사 대웅전 천불벽화와 반자 문양 복원, 미황사 응진당 나한벽화 복원·보존, 미황사 괘불탱 복원·모사 및 미황사 괘불재 축제, 도량 전각과 요사 26채 복원·건립, 조선 시대 목조상 65구 전수 조사 및 전남 유형문화재 등재 등등. 국가는 금강 스님의 노력을 인정했다. 

 

금강 스님은 “문고리를 잡아당기면 설봉 대사의 사리함이 열릴 것 같다”며 문고리를 당겼다.

Q. 20년 동안 머문 미황사를 곧 떠나는데 하루하루가 남다를 것 같다

“공부하는 마음 잃지 않고, 천년고찰이자 산중사찰인 미황사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수행 프로그램도 시작했죠. 한 달에 한 번씩 집중수행 프로그램 참사람의 향기도 하면서 초심을 잃지 않았어요. 산중사찰에서 할 수 있는 역할도 최대한 했고요. 그래서 그런지, 20년 주지 소임 회향에 미련이 하나도 없나 봅니다.”

 

맞다. 어찌 보면 미련이 없다. 국가가 인정한 스님의 공로보다 주목해야 할 노력 때문이다. 땅끝마을 시골 절이 전 세계인의 여행 버킷리스트에 들어가고, 절과 마을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든 스님의 원력을 미황사에서 다 이뤘다. 주지 소임을 맡은 첫해였던 2000년부터 어린이 한문학당을 진행했고, 2002년 시작된 템플스테이와 발맞춰 미황사 산문을 열었다. 2005년부터는 7박 8일 단기출가 형식의 참선 집중수행 프로그램 참사람의 향기를 이끌었다. 이외에도 부처님오신날 어르신 노래자랑, 괘불재, 해맞이·해넘이 법회…. 미황사는 1년 내내 사람들로 북적이는 도량이 됐다. 해마다 1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미황사를 찾는 이유로 스님의 따뜻함을 말하곤 한다.

사실 스님은 처음 주지 임명장을 받고, 고민이 깊었다. 주지는 바쁘다. 온갖 행정업무에 가람 수호는 물론 신도회 조직과 전법 관련 업무 등 사찰과 관련 있는 모든 일에 마음을 써야 한다. 그 일을 하면서도 천년고찰이자 산중사찰의 역할을 고민하고, 출가수행자이자 부처님 제자로서 걸어야 할 길도 고심했다는 게 스님 설명이다. 

금강 스님이 달마산 도솔암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듯 먼곳을 응시했다.

Q. 행정도 책임지고 기도도 하고 많이 바빴을텐데

“미황사 주지 임명장을 받은 날 저녁,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년고찰을 잘 보존할 수 있을까? 수행하는 마음, 공부하는 길에서 멀어지지 않을까? 직전까지 백양사 운문암에서 정진했고, 선지식 서옹 스님 모시고 참사람 운동을 해서 수행 전법 열망도 컸던 때였어요. 초심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됐고, 1,000일 기도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현공 스님과 만든 아름다운 절

금강 스님이 미황사와 맺은 첫 인연은 1989년이다. 대흥사 북미륵암에서 100일 기도를 마친 직후였는데, 당시 미황사는 폐사에 가까웠다고. 오늘처럼 미황사를 정비한 주인공은 10년 동안 미황사 주지로서 불사에 매달렸던 현공 스님이다. 현공 스님이 불사에 지쳤을 무렵, 조건부(?)로 금강 스님이 주지를 맡았단다.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미황사의 역사가 시작한 셈이다. 현공 스님은 흔적만 남았던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 달마전, 부도암 등을 복원해 미황사 사격을 높였다. 스님은 불사금을 마련하고, 인부들과 스스럼없이 지내고 다독이는 등 불사를 마무리했다. 축대를 쌓은 돌의 재료부터 위치까지 현공 스님의 탁월한 안목이 스며있다고 금강 스님은 전했다. 그래서 금강 스님 자신은 전법에 몰두할 수 있었단다.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해남 미황사는 두 스님이 함께 만들었다는 얘기다. 

 

Q. 인터뷰 초반에 “집을 짓지 않아서 미련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어떻게 미련이 1%도 없을 수 있을까 돌이켜봤죠. 지금 우리가 보는 미황사의 아름다운 모습은 전 주지 현공 스님이 다 조성했어요. 처음 주지를 맡을 때 현공 스님과 약속했습니다. 꼼꼼하고 미황사 중창 원력 가진 현공 스님이 그 역할을 이어가고, 전 사람들 관련한 일을 하겠다고 했죠. 과분하게 제가 모든 칭찬을 받았지만, 모두 현공 스님의 덕입니다. 만약 제가 불사를 모조리 했다면 아쉬움이 남을지도 모르지만, 사람일만 해서 괜찮습니다.”

 

Q. 해남 하면 땅끝마을, 땅끝마을 하면 미황사, 미황사 하면 아름다운 절이라는 말이 이제 너무 자연스럽다

“미황사를 어떤 이미지로 전할까 많이 고민했어요. 지역을 넣어서 ‘땅끝마을’, 아름다울 미(美)가 들어가는 절 이름에서 ‘아름다운 절’을 따서 이름을 붙였죠. 부끄럽지만 제가 그랬어요(웃음). 외우는 것보다 이미지가 떠오르도록 이름을 만들었어요. 주지로 처음 왔을 때 시골의 작은 절이었던 미황사의 홈페이지를 만들고 세상과 소통하면서 이미지가 널리 퍼졌죠.”

 

Q. 얼마 전 별세한 펜화가도 항암치료 중 절수행과 작품활동을 할 만큼 미황사는 예술가들의 안식처 같다

“처음엔 글 쓰는 사람을 위해 방 한 칸을 비웠습니다. 박남준 시인은 물론 동화작가, 소설가 등 많은 문인이 다녀갔죠. 해남군, 전라남도와 함께 남도 스케치 여행 프로젝트 중 절에서 하룻밤을 묵게 하면서 화가들도 미황사에 자주 왔어요. 미황사를 좋아하게 된 예술가들이 글이든 그림이든 작품으로 미황사를 알려줬습니다. 물론 예술가들과 저도 소통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요. 여러 차례 미황사를 오고 간 예술가들이 미황사를 사랑해줘서 감사합니다.”

 

Q. 미황사는 지역과 하나의 공동체라고 할 만큼 가까운데 사례 몇 가지만 들려달라

“작은 학교 살리기를 했습니다. 음악회를 열고 통학버스를 마련해 폐교 위기였던 분교를 50명이 넘는 본교로 만들었죠. 진도, 완도와 달리 도서 지역으로 분류되지 않은 해남은 신규교사 이동이 많은 곳입니다. 지역에 애정을 갖도록 미황사 템플스테이를 진행하다 도 전체로 확산하기도 했고요. 지역을 위해 산중사찰 미황사가 해야 할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Q.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얼마 전 제대한 친구가 왔는데, 10년 전 한문학당 출신이었어요. 한문학당 프로그램 중 도량 불을 전부 소등하고 밤하늘 별을 보는 게 있습니다. 한 여름밤에 별을 선물하고 싶어 만든 프로그램인데 그 친구는 별을 정말 좋아했어요. 강원도 화천에서 복무했는데, 늘 하늘의 별을 보면서 미황사를 생각했답니다. 한문학당에서 쓰던 천체망원경을 선물로 줬어요(웃음).”

 

Q. 미황사에는 달마산이라는 빼어난 산이 있고, 한국형 차마고도인 순례길 달마고도가 있다

“신라 시대에 달마산은 바위마다 부처님이라고 해서 만불산으로 유명했고, 고려 시대에는 달마 대사 법신이 상주한다고 해서 지금의 달마산이 됐습니다. 산에 오래 살면서 산길을 걷다보니 옛길이 보이더군요. 미황사를 중심으로 좌우로 땅끝, 월송마을까지 길이 닿았어요. 1,200여 년 전 땅끝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온 길이자 땅끝에서 월송마을 장에 가는 길이며, 달마산의 암자끼리 소통하는 수행의 길이기도 했죠. 공사 감독이 돼서 기계도 사용하지 않고 흙과 돌로만 옛길을 복원했습니다. 17km가 조금 넘는데 평평하고 흙길이라 발이 피곤하지 않아요. 달마산 둘레길인 ‘달마고도’를 걸으면서 만나는 산의 기암절벽, 확 트인 광경, 바다 등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죠. 미황사와 지역에 선물을 하나 남긴 것 같아 좋습니다.”

한문학당 아이들과 늘 함께 왔던 부도전에서 금강 스님이 또 한번 회상에 잠겼다. 소요 대사의 4대 법손 설봉 대사 부도를 바라보며 합장하는 스님의 모습에 큰  존경심이 담겼다. 스님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출가수행자의 삶과 죽음을 한번쯤 생각해보길 바란다.

 

시대의 큰 스승 만드는 여정

미황사와 금강 스님을 아끼는 사람들은 스님의 다음 행보가 무척 궁금하다. 스님은 1994년 종단 개혁에 중앙승가대 학생 대표로 참여할 때부터 마음속에 심어둔 씨앗의 열매를 맺으려고 한다. 당시 마음에 품었던 원력은 두 가지, 산중사찰의 역할과 교육 그러니까 인재불사다. 사찰은 모름지기 지역 문화의 중심에 서서 지역민과 호흡하며 그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원력은 미황사를 롤모델로 만들면서 꽃을 피웠다. 이제 남은 원력은 교육과 인재불사다. 조계종 교육아사리로 10년 넘게 활동했고, 박사학위도 마쳤으며, 중앙승가대에서 불교상담과 사회학으로 3년간 후배스님들을 가르쳤다. 

 

Q. 미황사 주지 소임을 마친 뒤 걸어갈 길은 어느 방향인가

“산중사찰의 모델을 만들고 인재불사를 하겠다는 게 원력이었습니다. 산중사찰의 모델은 미황사로 이뤘지만, 각 사찰 특성에 맞게 차분하게 정리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제 인재불사가 남았죠. 할 수 있다면 중앙승가대에서 10년 정도 후배스님에게 제 원력을 다 쏟아붓고 싶어요. 한 시대의 큰스승을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미황사에서 사는 20년 동안 매일 아침 눈 뜨면 “이렇게 좋은 도량에서 눈을 뜰 수 있어 감사하다”며 하루하루 정성스럽게 보냈다는 스님. 20년을 하루 같이 살아온 스님이 미황사를 떠난다. 씨앗으로 심었던 원력이 미황사에서 발아해 뿌리내리고 나무가 됐다. 이제 금강 스님은 인재불사로 숲을 만들고자 한다. 출가수행자로서 부처님 제자로서 시대의 스승을 만드는 길에 한결같은 금강 스님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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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에서 사는 20년 동안 매일 아침 눈 뜨면 “이렇게 좋은 도량에서 눈을 뜰 수 있어 감사하다”며 하루하루 정성스럽게 보냈다는 금강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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