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왕족의 청춘은 글공부보다 무예 연마
상태바
[싯다르타] 왕족의 청춘은 글공부보다 무예 연마
  • 심재관
  • 승인 2021.02.24 18: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석가족 태자의 교육

후대에 만들어진 전설적인 붓다의 전기는 싯다르타의 젊은 시절, 그러니까 왕실에서 배웠을 법한 교육내용을 꽤 그럴듯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때때로 역사적 사실처럼 받아들여졌고 신앙 속에서 하나의 사실로 자리 잡은 듯 보인다. 그러나 싯다르타의 ‘역사적 일생’이 우리에게 정확히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인도 고대사에서 석가모니의 시대는 우리가 연구할 수 있는 거의 최고층 역사에 해당하며 석가모니 당시 생활상을 그려볼 수 있는 고고학적 단서는 매우 희박하다. 그 이전의 베다 시대는 더 말할 나위 없거니와, 싯다르타가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에 대한 실증적 단서는 제로에 가깝다. 그렇지만 후대에 창작된 싯다르타의 젊은 날에 대한 기록은 되새겨볼 만하다. 비록 상상력에 의한 창작이지만 때때로 상상력은 신앙심을 살찌게 하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베다를 학습했을까

이 질문은 당연히 그럴듯하게 들릴 수 있지만,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싯다르타가 고대 힌두교의 지식체계인 베다를 학습했는가는 몇 가지 전제에 대한 의문이 풀려야 대답할 수 있다. 첫째로 그가 살았던 카필라바스투의 주변 지역이 그 당시 이미 완전히 힌두화된 사회로 정착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왕족인 싯다르타가 익혀야 할 교양 지식으로 베다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이미 브라만교(베다 경전을 근거로 성립된 종교, 바라문교로 한역하기도 함)의 종교적인 권위와 지식체계가 그 지역 사회에 완전히 수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마가다 지역에 브라만교가 얼마나 완전히 정착되었는가에 대한 정황은 불확실하며, 가능성도 희박하다. 

두 번째는 브라만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우 폐쇄적인 베다의 교육체계가 얼마나 개방적으로 변화했는가를 고려해야 한다. 브라만교의 종교의식이나 지식체계는 의외로 상당히 복잡하고 전승이 까다롭다. 이것이 다른 가문이나 부족, 또는 다른 계급에 전해지기 매우 어려운 구조를 갖는다. 적어도 크샤트리야 계급인 싯다르타가 베다를 배울 수 있을 정도로 브라만교의 지식 전승 구조가 매우 개방적으로 바뀌었는가는 매우 강한 의문을 남긴다. 위의 전제들이 다 해소되었다 하더라도 싯다르타가 누구에게서 언제 어떤 베다를 배웠는가 하는 점이 다시 의문으로 남는다. 

매우 후대에 창작된 붓다의 설화 속에는 싯다르타가 어린 시절 베다 수업을 받았던 것으로 묘사된다. 예컨대 싯다르타가 어려서 삼명(三明)에 밝았다고 전하고 있다. 삼명은 세 가지 지식을 말하며, 세 가지 베다인 『리그베다』, 『야주르베다』, 『사마베다』 등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베다 전통에 조금만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당혹스러운 말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각각의 베다는 각 베다의 전승을 맡은 가문에 따라 독립적으로 전승되며, 그 교육의 내용과 기간이 오래 소요되기 때문이다. 각각의 베다에 속하는 가문들끼리 자신들의 베다 내용을 서로 교차해서 가르치거나 혼합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대 인도 사회에서 지식 유통

후대의 브라만 전통에 따르면, 학생기의 생활은 1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의 부모와 단절된 채 교육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물론 자신의 집과 스승의 학교는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베다 교육에 입문한다는 것은 규정된 입문식을 거쳐 스승과 함께 거주하며 수년에서 십 수년간 베다의 내용을 암송하고 학습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위탁 교육이라 할 수 있는데, 입문한 제자는 스승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그를 보살피고 때때로 스승을 위해 탁발하는 의무도 있었다. 이러한 교육방식이 구체화 되기 시작한 것은 베다 후기시대인 대략 기원전 800~900년경쯤으로 추정하기 때문에 불교가 등장할 무렵에는 확실히 이러한 교육방식이 공고화되었으리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거의 전적으로 브라만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본래 이러한 교육방식이 시작된 이유는 초기 베다 시대에 만들어졌던 베다의 찬양시나 만뜨라들이 결집되고 정형화되면서, 이를 후대에 안전하고 체계적으로 전승해야 할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에는 특정 집안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전승되었던 것들이, 여러 가문의 찬양시나 만뜨라가 함께 결집된 이후에는 엄격하게 공인된 교육체계를 통해 안전하게 확산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브라마짜리야(Brahmacārya)라고 부르는 교육체계의 등장이었다.

지식의 유통을 고려했을 때, 브라마짜리야라고 부르는 이 베다의 교육체계는 상당히 폐쇄적이고 독점적이었다. 이들이 전하고자 하는 베다의 지식은 신비스러운 것이며 인가된 가문의 자손들에게만 허락되었다. 더구나 이 지식은 후기 베다 시기에 더 정교하고 방대해진 베다의 의례들을 통해 브라만들의 직업적 소양으로 발전하게 된다. 베다의 의례는 고대 인도인들의 일상적 삶에서 거의 분리되지 않으며 많은 의례는 전문적인 사제들의 도움을 통해 치러졌다. 그들이 오랜 기간을 통해 암기한 베다의 찬양시들이나 주문들은 수많은 제사를 치르는 과정에서 그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지식은 고대 인도사회에서 브라만들의 독점적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적어도 당시 이러한 교육체계와 그 수혜자들은 브라만들에게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고, 소위 재생족(再生族)이라 말하는 브라만(인도 카스트제도에서 가장 높은 성직자 계급), 크샤트리야( 왕과 무사 계급), 바이샤(상인 계급) 등이 모두 이 혜택을 누렸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아타르바(Atharva) 베다』 시기에는 브라만에게 한정된 교육체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싯다르타가 세 가지의 베다를 학습했다는 것은 더 이상한 일이다. 하기도 힘들뿐더러 그렇게 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분명 후대에 베다 교육이 확산하기를 원했던 브라만들의 전략적 의도였을 것이다. 

 

왕족들 제사 집전한 왕실 사제

고대 인도의 왕실에는 브라만을 두었던 것으로 그려진다. 먼저 카필라바스투의 왕실 안에도 왕족을 위해 제사를 집전하던 왕실 사제, 즉 뿌로히따(purohita)가 있었다고 가정하자. 고대 인도의 서사시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이 사제는 통상 주술적인 능력이나 베다에 능숙한 자들로 그려지곤 했는데, 왕에게 종교적 자문을 하거나 왕족들의 제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주로 『아타르바 베다』를 전승하던 브라만이 이 왕실 사제를 맡는 것이 전통처럼 보이는데, 왕실의 대소사를 위해 주문이나 점성술이 능했던 사제들이 필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뿌로히따는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종교적인 비즈니스를 위해 다른 사제들을 왕궁 밖에서 데려오는 일 등과 같이 왕실의 허드렛일도 했다. 뿌로히따가 언제부터 왕실에서 거주하기 시작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카필라바스투의 왕실 규모가 뿌로히따를 둘 정도로 규모가 있었다면 존재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한다.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게 보이는데, 인도 서북부의 꾸루-빵짤라 지역 문화와 동부 갠지스 마가다 문화는 아직 완전히 융화하지 못한 흔적을 보이기 때문이다. 싯다르타 당시, 꾸루-빵짤라의 전형적인 브라만의 종교사회체계가 동부까지 완전히 확산하였는가는 여전히 의문이다.

싯다르타가 왕실 사제로부터 베다를 배웠다 하더라도, 이는 매우 기초적이고 단편적인 베다의 맛보기 지식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지식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베다 문헌을 제대로 공부하고자 했다면 아마도 왕실 밖에 있었던 베다에 정통한 브라만을 수소문했을 것이다. 앞서 말한 바처럼 베다를 전승하던 브라만에게 직접 베다를 배우기 위해서는 그들의 거처로 가서 숙식을 같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브라만이 왕실에 와서 교육했다고 해도 그 기간은 최소 수년 동안이다. 베다를 교육받는다는 것은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라기 보다 ‘그 지식의 내용을 축적하고 전승’하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왕족일 경우 글공부를 하거나 무예를 배울 생각이라면 선생을 왕실 안으로 초빙했을 것이다. 그것이 스승에게나 왕가의 입장에서도 수월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인도 고전과 불경들은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문자보다 구술과 암기 교육

후대에 창작된 붓다의 전기는 싯다르타의 문예와 무예에 대한 학습능력을 꽤 과장되게 표현하고 있다. 『보요경(普曜經)』의 예를 참고해보자. 어린 싯다르타는 어느 날 1만 명의 석가족 어린이들과 몰려서 글공부를 위해 학교에 간다. 거기서 스승 비슈바미트라(Viśvamitra)를 만난다. 스승을 만나자마자 그는 자신에게 어떤 문자를 가르칠지 묻는다. 스승이 세상에는 단지 두 문자, 즉 브라흐미(Brahmi)와 카로슈티(Kharoṣṭhī)가 있다고 말하자 싯다르타는 스승이 아는 두 문자 외에 64개의 문자가 있다며 이를 열거한다. 이 전설은 스승의 지식을 압도적으로 뛰어넘는 어린 싯다르타의 모습을 보여준다. 같은 내용이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 등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이 전설은 어린 싯다르타의 총명함을 찬탄하기 위한 장치이지만, 매우 후대에 작성된 전설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알려진 최초의 문자 출현은 기원전 3세기경 아쇼카 대왕의 브라흐미 비문이 전부이며, 심지어 당시 이 문자를 교육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마우리야 왕조 이전에 어떤 문자가 통용되고 있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며 여러 개의 문자가 있었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 『보요경』에 등장하는 스승 비슈바미트라 역시 인도의 전설과 신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 높은 브라만 현자로서, 불경에서 이 인물을 차용해 설화를 작성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리그베다』의 찬양시 일부를 지었던 저자도 비슈바미트라였으며, 인도 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na)』에서 주인공인 왕자 라마를 교육한 인물도 비슈바미트라였다. 

싯다르타가 당시 문자로 교육을 받았을 가능성도 거의 없을뿐더러 문자를 통해 기록하거나 필사하는 교육형태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육자의 역할을 맡았을 브라만들의 교육형태는 전적으로 구술과 암기에 의한 교육이었다. 교육의 내용이었던 지식과 기예는 대부분 직접 스승의 말과 행동만으로 직접 전승했다. 지식의 형태들은 매우 압축적인 시문(詩文)의 형태로서, 운율과 악센트가 동반되었기 때문에 설사 석가모니 당시 문자체계가 존재했었고 이를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스승 없이 기록의 형태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지식이 아니었다.

베다에 대한 교육도 아주 조금씩 다른 계급의 자제들에게 전승했을 가능성도 매우 적다. 만일 싯다르타가 살던 당시는 베다의 교육이 계층을 뛰어넘어 전승할 수 있었던 상황이라고 가정해도 그 내용은 아주 극히 일부(예를 들면 베다 만뜨라 몇 개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고대 인도문학에서 왕자들이 ‘세 가지 베다를 익혔다’는 표현은 뛰어난 교양과 박식함을 표현하기 위한 상투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바처럼, 세 가지 베다를 모두 익힐 수 있는 상황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마도 크샤트리야나 바이샤와 같은 계급의 자식들은 자신들의 생존과 계급적 특성을 살리는 본업의 교육에 더 오랜 시간을 투자했을 것이다. 

전륜성왕 수업을 받는 태자, 인도 국립뉴델리박물관 소장. 

 

왕족들이 꼭 익혀야 할 무예

싯다르타가 왕족이며 왕자였다는 신분을 가정할 때, 그는 아마도 대부분의 많을 시간을 왕실의 예절과 크샤트리야로서 무예를 익히며 보냈을지 모른다. 이러한 전제는 고대 인도 문학의 서사문학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를 참고로 하지 않을 수 없다. 빤다바(Pandava)와 라마(Rāma)와 같은 주인공들은 대체로 왕자들이었으며 어린 시절 대부분은 스승에게 무술을 배우는 일이 주된 일상이었다. 싯다르타의 전설적인 어린 날의 묘사도 거의 이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도 석가족이 초기 힌두사회가 보여주는 계급사회를 이루고 있었는가를 다시 전제해야 한다. 

사실 후대의 창작된 불전에 의하면, 싯다르타는 문예이든 무예이든 이미 배우기도 전에 통달한 상태였기 때문에 스승들이 찾아왔을 때 그들의 도움은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왕실에서는 당시 29가지의 무예에 정통했던 싯다르타의 외삼촌 크샨티데바(Kṣantideva)를 초청해 무술을 가르치려 했다. 그러나 크샨티데바의 무술시범을 미리 지켜본 싯다르타는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라 배울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때 외삼촌이 싯다르타에게 전하려 했던 무예로 몇 가지가 열거된다. 씨름, 말과 코끼리 타는 법, 마차 모는 법, 궁술과 검술, 창 쓰는 법 등이었다. 

이 가운데 모든 고전 인도문학을 통틀어 가장 정교하게 그 기술이 설명되는 것은 궁술(弓術)이다. 당시 왕족들이 꼭 익혀야 하는 무예였다.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빤다바 형제들이 스승 드로나(Droṇa)에게 무술을 배울 때 가장 공을 들였던 수업 역시 궁술이었다. 심지어 드로나는 자신의 제자 아르주나(Arjuna)를 지상 최고의 궁수로 만들기 위해, 타고난 천재적 궁수 에깔라브야(Ekalavya)의 엄지손가락을 자르도록 만든다. 에깔라브야가 아르주나의 맞수가 될 가능성을 미리 제거해버린 것이다. 이렇게 귀하게 길러진 아르주나는 신화적인 궁술을 선보이는데,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모두 화살로 맞추어 순식간에 비가 그치도록 하는 기적을 선보인다.

이러한 경이적인 무예의 경지는 싯다르타의 교육과정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보요경』이나 『불본행집경』 등에 언급된 것처럼 싯다르타는 결혼을 위해 신랑 간택시험인 스바얌바라(Svayaṃvara)에 참여해 무예로 경합을 벌인다. 이 무술 대회에서 싯다르타는 놀라운 무예의 경지를 선보인다. 고대 인도사회에서 스바얌바라는 신부 측이 적절한 신랑을 고르기 위해 신부와 결혼할 의사가 있는 여러 상대자에게 공개 시험을 치르게 했던 관습이었다. 주로 왕족이나 무사 계급에서 이루어졌던 이 시험은 대체로 활쏘기 같은 무술로 치러지는데, 시험에 참여해 우승한 싯다르타는 부인을 얻게 된다. 

이런 이야기는 싯다르타가 무사로서, 또는 왕자로서 익혀야 할 교육의 단면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역사적 싯다르타’는 베다 학습에 거의 근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그의 교설이 우파니샤드에 등장하는 은유와 유사한 면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후대의 편집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베다의 종교적 토양을 고려하면 당시 석가족의 인물이 베다를 학습했을 가능성, ‘여러 베다’를 공부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뿐만 아니라 싯다르타가 활동하던 시기의 갠지스강의 주변 유역들은 여전히 브라만들의 종교가 낯설었던 지역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인도-아리아인들의 종교문화가 벵갈 동부까지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싯다르타가 정말 왕자였다면 그리고 일정한 계급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적어도 후대의 전기문학에서 그리고 있는 것과 같이 그는 어릴 적 레슬링과 궁술, 또는 검술과 같은 무예를 연마하며 청춘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림. 윤진이

 

심재관
상지대 교수. 동국대에서 고대 인도 의례와 신화 연구로 석·박사를 마쳤다.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힌두교의 문헌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필사본과 금석문 연구를 포함해 인도 건축과 미술에도 관심을 확장하고 있다.

 


관련기사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