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펜 첨삭 받은 어느 교수의 글

“선생님, 오늘 수업 끝나고 저랑 한잔하실 수 있나요?”
강의를 시작하기 전 D대학 정보통신학부 유 아무개 교수가 쭈뼛거리며 말을 건넸다. 지난번 강의 때 혹독한 평가를 내려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던 터라 얼른 “그러자”고 대답했다. 그런 뒤 속으로 ‘왜 보자고 하는 걸까? 지난번 평가로 자신이 받은 마음의 상처를 하소연이라도 하려는 걸까?’ 은근히 마음이 켕기었다.

두 달 정도 과정으로 진행되는 직장인 글쓰기 교실엔 대략 열댓 명의 수강생이 몰려든다. 수강생 분포의 다양성만 보아도 실용글쓰기가 얼마나 넓은 범위에서 쓰이고 있는지 저절로 알게 된다. 민간 기업, 공공기관 직원, 공무원, 연구원, 교사, 마케터, 대학생, 심지어 목사, 스님까지 이 교실을 찾아온다. 

그 가운데 유 교수는 처음 만났던 ‘현직 교수 출신’ 수강생이었다. 피부는 검지만 어질게 보이는 얼굴에 테가 두꺼운 안경을 쓴, 한눈에도 삶을 한없이 진지하게 살아갈 듯한 스타일의 중년 남자였다. 얼굴엔 늘 웃음을 띠고 있지만 강의 때는 맨 앞자리에 앉아 강의 내용을 한 자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안경 속에 눈빛을 빛냈던 기억이 지금도 떠오른다.

첫 강의가 끝나자 유 교수가 이런 제안을 했다. 그동안 전공 분야 내용으로 3권의 책을 썼는데, 냉정한 평가를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3권의 책을 쓴 사람이 왜 내 강의를 듣고 있을까. 정보통신 분야에 대해 아는 게 없는데 과연 내가 그걸 이해할 수나 있을까.’ 

수락하기도 거절하기도 어정쩡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데 유 교수의 간절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가 아는 동료들 가운데는 이런 걸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요. 선생님께 평가를 받아야 지금 제가 잘 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거 같아서요.” 

결국 유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책 전체를 살펴보기엔 너무 부담되니까, 머리말 부분만 보내달라고 했다. 그리고 조건을 하나 걸었다. 단순한 총평 수준이 아니라 글 전체를 첨삭할 테니 수업 시간에 공개첨삭 교재로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유 교수는 흔쾌히 동의를 표했다.

그날 밤 유 교수는 책 머리말을 피디에프(PDF) 파일로 전송했다. 인쇄해서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첫 문장부터 빨간 펜이 그어졌다. 둘째 문장, 셋째 문장…. 첨삭을 마치고 나니 ‘내가 너무 심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온통 빨간색이었다. 3페이지 가까운 머리말 문장 가운데 빨간 줄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한 줄도 없었다. 오탈자, 비문, 수동태, 어색한 표현, 모호한 내용 등등.

다음 강의 시간이 됐다. 유 교수는 이날도 책상 맨 앞에 앉아 자신의 글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눈빛을 빛내며 기다렸다. 첨삭 표시를 한 피디에프 파일이 빔 프로젝트 화면에 쏘아지자 유 교수의 입에서 “아!” 하는 짧은 탄성과 함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보였다. 

글쓰기 산업스파이가 된 까닭

유 교수와 단둘이 이자카야 술집에 앉았다. 꼬치 몇 개와 생맥주를 시켰다. 생맥주를 몇 모금 들이켜고 난 뒤에야 유 교수의 입에서 용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선생님, 제가 이 글쓰기 강좌 신청한 이유가 뭔지 아세요?”

“다음 책을 더 잘 쓰시려고 그러는 거 아닌가요?”

“하하하, 아닙니다. 사실 제가 산업스파이 하러 선생님 강좌 듣고 있는 겁니다.”

“……?”

“제 학교는 이공계 중심 3년제 전문학사 과정이에요. 인문 교양 과목이 거의 없어요. 제가 15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사회에 내보내다 보니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어요. 전문 기술만 갖고는 회사 안에서 중견 간부로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죠. 커뮤니케이션, 특히 보고서 작성 능력이 있어야 차장도 달고 부장도 달고 임원도 하는데, 우리 학교 실정으로는 그걸 키워주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선생님 강의를 듣고 배워서 학생들에게 실용글쓰기를 가르치려고 했어요. 산업스파이처럼요. 하하하.”
“산업스파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정말 좋은 일이네요. 제가 할 일이 있으면 적극 도울게요.”

“선생님, 그런데 지난주 한 가지 사실을 뼈아프게 깨달았습니다. ‘글쓰기는 아무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구나, 난 한참 더 배워야 하고 선생님 같은 분을 모셔야 우리 학생들이 글쓰기를 배우겠구나’라고 생각한 거죠.”

“무슨 말씀을요. 교수님 제가 도와드릴 테니 실용글쓰기 강좌 개설하세요.”

“지난주에 학장님을 만나서 제가 글쓰기 강좌를 하며 깨닫게 된 이야기를 모두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승낙을 받았습니다.”

“무엇을요?”

“선생님을 저희 학교 겸임교수로 모시는 걸요.”

전문대생 최초의 퀄컴 장학생

이듬해 3월부터 일주일에 저녁 강의가 하나에서 둘로 늘어났다. 이미 하고 있던 직장인 글쓰기 교실에 D대학 강의가 더해진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학생들을 만나는 것이 즐겁고 기뻤다. 글 속에서 그들의 고민을 만나고 그것을 작게나마 덜어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글쓰기 강사로서 더없는 자부심과 자존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중간고사를 보거나 학기가 끝날 때는 학생들과 맥주 파티도 열었다. 그 무렵 주머니 사정이 그렇게 넉넉하진 않았지만 D대학에서 받은 겸임교수 월급의 절반쯤은 아낌없이 학생들에게 쓰고 싶었다. 취업 자기소개서를 봐달라고 부탁하는 학생도 많았고 개인적인 인생 고민을 털어놓는 친구도 있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가는데, 유 교수가 잠깐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선생님, 세계적 무선통신 기술 회사 퀄컴사에서 매년 우리나라 정보통신학부 대학생 10명을 선발해 장학금을 줘요. 선생님, 저 좀 도와주셔야겠어요.”

“뭘요?”

“3학년 학생이 여기에 도전하려고 해요. 그런데 퀄컴 장학생은 여태까지 4년제 명문대 학생들만 받았어요.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해보려고요. 제가 심사위원에게 특별히 부탁하는 편지를 쓰려고 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제가 문장 실력도 형편없고 글로써 누구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 없어서요.”

며칠 후 유 교수의 편지 메일이 왔다. 짧은 편지였지만 감정을 절제하면서 간곡한 의사가 전달되도록 고쳤다.

“저는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D대학에 몸담고 있으면서 한 번도 이런 장학생 선발(4년제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에 지원해본 적이 없습니다. 피해의식의 소산일 수도 있겠지만 엄연한 현실도 무시하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학과장을 맡고 있는 정보통신과는 3년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비록 학부 2학년에 불과하지만 가능성 있는 학생들을 선발해 방과 후나 방학 기간에 학습과 연구와 실험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의 개인 사정, 고민과 꿈도 차차 알게 되고,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품게 되었습니다.

이런 제 상황을 깊이 헤아려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자격이 된다면 전문대학 학생이기 때문에 선발이 안 되는 일이 없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미국의 소수자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처럼 전문대학 학생에게 플러스가 되는 방향이면 더욱 좋겠지만 그건 제 욕심이겠지요.”

열흘 뒤 다시 유 교수에게 메일이 왔다.

“1박 2일의 신입생 OT에서 막 돌아와서 메일을 드립니다. 어제 제가 추천한 학생에게서 장학금 수여식에 다녀왔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많이 기뻐하고 있더군요. 이번 일이 저한테는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옵니다. 장학생으로 선발되기까지 여러분들의 도움이 있었고, 백 선생님도 그중 한 분이십니다.”   

백승권
글쓰기 컨설팅 전문업체 커뮤니케이션컨설팅앤클리닉 대표로 업무용 글쓰기 강사로 활동 중이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 조계종 화쟁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