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설교(The Fire Sermon)
인간의 역사에서 불처럼 유용하면서 불처럼 위험한 것이 있을까? 인간 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이 불의 사용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오늘날의 첨단 문명을 가능케 한 산업혁명 또한 불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불은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문학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T.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1965)의 장시 「황무지(The Waste Land)」의 제3부는 ‘불의 설교(The Fire Sermon)’다. ‘불의 설교’는 붓다가 불을 섬기던 제자들을 데리고 가야산을 넘다가 설한 「불타오름 경(Āditta-sutta)」의 다른 이름이다. 이 경에서 불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 온갖 번뇌를 상징한다. 이 ‘불의 설교’가 향락과 부패에 찌든 현대사회를 ‘황무지’로 상정한 엘리엇의 시 속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황무지」는 서구 신화의 중요한 축을 차지하는 성배(聖杯) 이야기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서구 신화 속에서 어부왕은 벌을 받아 성불구자가 되었는데, 예수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했던 잔에 담긴 피를 성기에 바르면 치유된다고 한다. 어부왕의 성불구는 ‘도덕성이 마비된’ 불모의 황무지 같은 현대사회를 상징하며, 이를 치유하는 방편으로 ‘불의 설교’가 등장하는 것이다.
카르타고로 그때 나는 왔다
불이 탄다 탄다 탄다 탄다
오 주여 당신이 저를 건지시나이다
오 주여 당신이 건지시나이다
탄다
-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에서
이 대목에서 ‘불’은 세상을 황무지로 만든 욕망과 갈애를 태워버리는 역할을 함으로써 ‘구원’을 상징하게 된다. 시인은 ‘탄다’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함으로써 인간 내면에 깊숙이 자리한 악을 제거하려는 열망을 표출하고, 그로 인한 구원을 “주여 당신이 저를 건지시나이다”라고 표현한다. 「황무지」에서는 불이 모든 욕망을 불태워버리는 ‘정화(淨化)’의 작용을 하지만, 붓다의 ‘불의 설교’에서 불은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상징한다.
“법을 전하러 길을 떠나라”
바라나시에서 60명의 제자를 아라한으로 만든 붓다는 그들을 모아놓고 이른바 전도선언(傳道宣言)을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신과 인간을 구속하는 모든 굴레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대들 역시 신과 인간을 구속하는 모든 굴레로부터 해방되었다. 이제 법을 전하러 길을 떠나라.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연민의 마음으로 길을 떠나라.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말고 혼자서 가라.”
바라나시에서 충분한 실험을 거친 붓다의 전법은 이렇게 해서 세계만방으로 떠날 준비를 갖춘다. 바라나시는 붓다의 교리가 구체적인 모습을 보였고, 그 결과 최초로 교단이 형성된 곳이다. 그런데 바라나시에서 탄생한 승가를 붓다는 연속적으로 끌고 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특이한 일이다. 60명의 우수한 인재를 발굴해놓고는 그들로 하여금 각자 길을 떠나게 하고, 당신 또한 홀로 길을 떠난다.
이는 붓다가 내려놓음을 얼마나 철저하게 실천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며, 붓다의 인생 목적이 오직 최대한 많은 중생의 평화와 행복에 있음을 말해준다. 교단을 만든 이 중 최초의 제자들을 각자 다른 길로 가게 만든 다음, 자신 또한 혼자 ‘외롭게’ 길을 떠난 경우가 어디 있는가? 붓다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깟사빠 삼형제의 귀의
붓다와 우루벨라 깟사빠의 만남은 애초에 붓다가 의도한 것이었다. 전도선언 이전에 붓다는 당신이 갈 길을 우루벨라로 잡았는데, 우루벨라와 그 인근에 바른길을 갈 수 있는 외도 수행자 깟사빠 삼형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깟사빠 삼형제는 우루벨라를 중심으로 커다란 수행자 교단을 이끌고 있었는데, 그들은 머리를 땋아 묶고 불을 숭배하였다. 네란자라 강 상류 쪽에 큰형인 우루벨라 깟사빠가 5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고, 중류쯤에는 둘째 나디 깟사빠가 3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막내 가야 깟사빠는 강의 하류에서 2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붓다는 야사와 그의 친구들을 아라한으로 만든 뒤 오늘날의 보드가야 인근에 해당하는 우루벨라로 간다.
“깟사빠님이시여,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당신의 처소에서 좀 쉬어갈 수 있겠습니까?”
500명의 수행자를 이끄는 깟사빠의 권위는 대단했다. 깟사빠는 곁눈질로 붓다를 바라보았다. 붓다는 당시 35세의 젊은 나이였으므로, 노숙한 깟사빠에게는 시봉하는 제자들도 없이 단신으로 온 붓다가 애송이로 보였다. 깟사빠는 가볍게 대답했다.
“우리 사원에는 많은 수행자가 머물고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나그네가 쉴 만한 곳은 없습니다.”
“깟사빠여, 당신에게 제자들이 많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없다면 당신의 사당에서라도 묵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붓다는 이미 깟사빠의 사당에 무서운 독룡(毒龍)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붓다에게 독룡 따위가 무서울 리는 없었다.
“사당이라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러나 사당 안에 사나운 독룡이 있어서 당신을 해칠지도 모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며칠 쉬어갈 수 있게만 해주십시오.”
“사당에서라면 얼마든지 쉬어가십시오.”
사당에는 그들이 섬기는 3개의 불꽃이 쉬지 않고 타오르고 있었다. 붓다는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든 뒤 가부좌하고 앉아 곧 삼매에 들었다. 붓다가 삼매에 든 사이 독룡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나타났다. 붓다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평안하게 앉아 있었다. 독룡은 갑자기 화가 났다.
“아니,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내가 누군 줄 알고 나의 처소에서 인사도 없이 잠을 잔단 말이오?”
독룡은 독기운이 가득한 연기를 세차게 내뿜었다. 독룡의 공격을 이미 예상했던 붓다는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어 ‘내가 이 용의 피부와 가죽과 살과 힘줄과 뼈와 골수를 전혀 다치지 않게 하면서, 나의 불로써 용의 불을 소멸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독룡에게 불꽃을 토하였다. 사당은 불이라도 난 것처럼 검은 연기와 붉은 불꽃에 휩싸였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깟사빠의 제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던졌다.
“벌써 몇 번째야. 저 수행자도 독룡의 먹이가 되는구나.”
이튿날 아침, 웅성거리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깟사빠도 사당으로 다가갔다. 그는 어젯밤에 온 사문이 분명 시체가 되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붓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사당에서 나왔다. 깜짝 놀란 깟사빠가 물었다.
“간밤에 아무 일도 없으셨습니까?”
“당신이 말한 위험한 독룡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까?”
붓다가 발우를 열어 보였다. 발우 안에는 작은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불기운이 모두 없어져 버린 독룡은 자그만 뱀에 불과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깟사빠는 몹시 당황했지만, ‘이 사문이 대단하긴 해도 나와 같은 아라한은 아닐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붓다는 근기에 따라 교화 방법을 달리한다. 붓다의 교화 방법 중에 신통력은 어쩌면 최후의 수단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우루벨라 깟사빠에게는 신통력을 먼저 보여주었다. 깟사빠는 자신이 깨달음을 완성한 아라한이라는 상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에, 이를 굴복시키기에는 신통력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깟사빠는 붓다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가졌지만, 겉으로는 위엄을 갖추고 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어야 할 때는 붓다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큰 제사가 있던 날이었다. 마가다국과 앙가국에서 많은 신자가 사원에 입장했다. 깟사빠는 오늘만은 제발 붓다가 나타나지 않기를 고대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붓다가 신통력이라도 보이게 되면 자신의 위신이 크게 꺾일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깟사빠의 기대대로 붓다는 그날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붓다가 발우를 들고 나타나자, 깟사빠는 몹시 반가운 척하며 말했다.
“어이쿠, 왜 이제야 오셨어요? 어제 오셨으면 맛있는 음식이 많았었는데요.”
“제가 오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럴 리가요?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깟사빠는 다시 한번 붓다의 위신력에 놀랐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깟사빠는 붓다에게 고개 숙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마하박가』에 따르면, 그 외에도 붓다에게 많은 기적이 일어난다. 붓다의 신통력에 따른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신들이 붓다를 돕기 위해 벌인 기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우루벨라 깟사빠는 감탄하면서도 붓다에게 귀의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불 숭배자들을 물로 제압하다
어느 날 폭우가 쏟아졌다. 지대가 낮은 우루벨라는 강물이 범람할 때마다 위험에 처하곤 했다. 깟사빠의 처소는 언덕 위에 있어서 안전한 편이었지만, 강가에 있는 붓다의 처소는 누가 봐도 안전하지 않았다. 깟사빠는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붓다를 찾았다.
“고따마여, 고따마여! 어디 계십니까?”
깟사빠와 그의 제자들의 목소리는 성난 물소리에 섞여 멀리 가지 못했다.
“나는 여기 있습니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붓다가 당신 주위의 물을 없앤 뒤 먼지 날리는 땅 위에서 경행하고 있었다. 붓다는 허공으로 날아올라 배 위에 올라섰다.
그래도 깟사빠는 생각했다. ‘이 사문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러나 그는 나와 같은 아라한은 아니다.’
붓다는 드디어 깟사빠에게 직접적으로 말했다.
“깟사빠여, 당신은 아라한도 아니고 아라한의 경지에 들지도 못했습니다. 아라한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더 공부하셔야 합니다.”
그러자 깟사빠는 붓다의 말이 진정으로 옳다고 생각하고 무릎을 꿇은 후 붓다의 발에 머리를 대고 예를 갖추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싶습니다. 저를 당신의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당신은 500명이나 되는 수행자의 지도자입니다. 나의 제자가 되고 싶다면 그들에게 먼저 알리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각자의 길을 선택하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깟사빠는 제자들을 모두 소집하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제 진정한 영웅을 만났습니다. 나는 그분의 제자가 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각자 자신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은 한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스승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깟사빠와 500명의 제자는 머리카락을 잘라 제사 도구와 함께 네란자라 강물에 띄워 보내고는 붓다에게 간절히 청하였다.
“세존이시여, 당신께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오십시오, 비구들이여. 나의 가르침 안에서 수행하면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붓다가 출가를 허락하자 우루벨라 깟사빠와 500명의 수행자에게 저절로 가사가 입혀지고 발우가 들려졌으며, 그들은 마치 출가한 지 60년이 된 장로처럼 바뀌었다.
밤낮없이 타오르던 배화교도(拜火敎徒) 사당의 불은 꺼지고, 아무것도 모르는 강물은, 아니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강물은 말없이 우루벨라 깟사빠와 500명의 수행자가 버린 땋은 머리와 제사 도구들을 싣고 북쪽 가야로 흘러갔다. 가야에는 우루벨라 깟사빠의 동생 나디 깟사빠가 300명의 제자를 이끌고 수행하고 있었다. 강물에 몸을 담그고 기도하던 나디 깟사빠는 머리카락들로 뒤덮인 강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뭉텅뭉텅 잘린 머리카락은 자기와 같은 배화교도들의 것임이 틀림없었다. 떠내려온 제사 도구들도 배화교도들의 것이었다.
“아니, 형님의 제자들이 왜 머리를 자르고 제사 도구들을 버린 것일까?”
나디 깟사빠는 300명의 제자를 데리고 허겁지겁 우루벨라로 달려갔다. 나디 깟사빠는 다시 한번 놀랐다. 그토록 위엄 있던 형이 삭발한 채 한 젊은 사문의 발아래 예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디 깟사빠와 그의 제자들 역시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셋째 동생 가야 깟사빠도 형들의 출가 소식을 듣고 자신의 제자 200명과 함께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순식간에 붓다의 승가는 엄청난 규모가 되었다. 60명의 제자를 뿔뿔이 흩어 보냈던 붓다가 순식간에 1,000명의 승단을 이끌게 되었다.
세상 밝히는 횃불이 되게 하리
붓다는 깨달음을 얻으면 설법해주겠다고 했던 빔비사라 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라자가하로 길을 나서기로 했다. 우루벨라에서 라자가하로 가는 길에는 큰 산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가야산이다. 가야산의 원어인 팔리어 가야시사(Gayāsīsa)는 한자어로는 상두산(象頭山)이라 번역되었는데, 정상 부분이 코끼리 머리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붓다가 배화교에서 개종한 1,000명의 비구를 데리고 가야산을 넘어가다가 잠시 쉬던 때였다. 붓다는 시를 읊듯이 말했다.
“온 세상이 불타고 있다.”
우루벨라 깟사빠가 붓다에게 합장하고 여쭈었다.
“온 세상이 불타고 있다니 무슨 말씀이신지요? 제 눈에는 불이 보이지 않습니다.”
붓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온갖 망상이 부싯돌을 쳐 어리석음의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지 않느냐? 너희 스스로를 잘 관찰해보아라, 비구들이여! 모든 것이 타고 있다. 눈이 타오르고 있고 눈에 비치는 형상이 타오르고 있고, 형상을 인식하는 생각도 타오르고 있고, 눈으로 보아 생기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모두 타오르고 있다. 그렇게 타오르는 불은 곧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이다. 잘 보이지 않느냐?”
그 불이, 불의 설교가 온 세상 사람들에게 활활 타올라, 이제는 탐진치 삼독을 활활 불태워버리는 참으로 위대한 광명이 되었다. 그 불씨 잘 보존하여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환히 밝히는 횃불이 되게 하리라!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장.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