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전생부터 복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출가 전부터 영화 스님과 동행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미국 노산사가 워낙 작고 사람도 없어서, 영화 스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들이 그렇게 귀하고 중요한 것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영화 스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좋았을 뿐입니다.
2018년과 2019년에는 영화 스님을 모시고 한국에 올 수 있었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포르투갈의 리스본,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프랑스의 파리에도 영화 스님과 함께 여행했습니다. 영화 스님을 따라서 다니는 건 매우 즐거운 일이었는데, 그건 영화 스님이 권위적이거나 무게감이 있기보다는 마치 친구처럼, 자상한 아버지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겁니다.
영화 스님은 제자들을 대할 때 항상 밝으셨고 농담도 잘하셨습니다. 그저 스님과 가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행복했습니다. 게다가 지금 돌이켜보니 영화 스님은 곁에 있는 제자들을 늘 가르쳐주고 계셨습니다.
얼마 전 유튜브를 보다가 선화 상인(上人, 상인은 중국에서 큰스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의 제자 중 원로인 항래(恒來, Heng Lai) 스님의 인터뷰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항래 스님은 스승인 선화 상인과 함께 아시아 지역을 여행한 경험을 이야기했는데, 선화 상인이 제자들과 여행하면서 그 기회를 가르침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인터뷰를 보면서 저도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영화 스님도 그렇게 제자들을 늘 가르치셨기 때문에 마치 그 이야기가 데자뷰처럼 느껴졌습니다.
출가 전, 영화 스님과의 여행
영화 스님 곁에 있으면 좋긴 했지만, 결가부좌 자세에서 오는 다리 아픔과 다른 여러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스승님과 함께 다니면 사전에 계획을 세우거나 효율적인 방향을 제시해도 잘 되는 경우가 별로 없었습니다.
사실 영화 스님 곁에 있으면 번뇌로 운 일이 참 많았는데, 그래도 스님이 “같이 갈까?”라고 묻기만 하면 무조건 “오브 콜스 마스터! 아이 원투 고!”라고 답하며 따라나섰습니다. 아무리 큰 사업의 기회가 있다고 해도 문제 될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영화 스님 곁에만 있으면 이 세상의 문제와 장애는 마음속에서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루는 영화 스님을 모시고 캘리포니아 남부에 있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북쪽의 샌프란시스코 지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영화 스님은 가는 방향대로 사람을 만나지 않으시고, 완전히 북쪽에 있는 곳에 가셨다가, 그다음 다시 한참 남쪽에 있는 곳에 들렸다가, 이렇게 왔다 갔다 더 오래 걸리는 방법으로 다니게 했습니다.
영화 스님은 우리보다 나이도 훨씬 많으시고, 식사도 하루에 한 번만 하셔서 엄청나게 마르셨는데, 우리같이 나이가 젊은 제자들도 따라다니는 게 힘에 부칠 정도였습니다. 스님은 새벽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면서도 표정은 늘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날도 전 새로 뽑은 포르쉐로 영화 스님을 모시고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영화 스님은 가야 할 장소들을 다 알려주시지 않고, 그저 북쪽으로 갔다가 남쪽으로 갔다가 다시 북쪽으로 갔다 서쪽으로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비효율적인 노선에 저는 마음이 곧 시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째서 사부님은 효율적으로 남쪽부터 차례대로 들리지 않나요. 오늘은 참 이상하다. 영화 스님은 원래 이렇게 안 하시는데...’ 라는 의문과 여러 생각들로 머리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지만, 사부님과 즐거운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물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영화 스님이 저의 조급한 성격과 뭐든 더욱 효율적이고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저의 계산적인 사고방식을 훤히 꿰뚫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이 뭔가 이유가 있어서 이렇게 다니게 만드시나 보다 생각하고, 10시간 이상의 운전에 대해서 불평도 하지 않고 그냥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너무 피곤해져서 결국 더 효율적이고 빠른 방법으로 다녀야 한다는 마음도 다 떨어져 나가버렸습니다.
아무튼 다시 마스터와의 여행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날 새로 뽑은 포르쉐에 영화 스님, 현인 스님 그리고 산호세의 구글 엔지니어인 췬을 태우고 신나게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시끄러웠어도 영화 스님과 함께라면 그 정도는 사소한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어디를 가는 중 버클리 사찰(Berkeley Buddhist Monastery) 옆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생각 그대로 말하고, 있는 그대로 보여줘라”
우리가 버클리 건물 옆을 지나치는데, 그때 선화 상인의 원로 제자인 항실(恒實, Heng Sure) 스님이 건물 밖을 걷고 있었습니다. 항실 스님은 선화 상인의 여러 큰 사찰들에서 워낙 원로이시고, 1년의 반은 호주에 있는 도량에 계셔서 만나기 어려운 분인데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급히 차를 세웠고, 현인 스님, 췬도 일제히 차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차를 세우는 순간 우리는 심지어 다 같이 “아악!! 항실 스님이닷!”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현인 스님과 췬은 이미 차에서 내렸고, 저는 마지막으로 내리면서 뒷좌석에 계시던 영화 스님을 쳐다보고는 “스님은 안 내리세요?”라고 물었습니다. 영화 스님은 그냥 어이없다는 미소를 지으면서 뒷좌석 그늘로 쓱 피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난 됐다”라고 하셨습니다.
현인 스님, 췬 그리고 저는 항실 스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급히 차에서 내려서 삼배를 올리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버클리 시내 길바닥에서 삼배를 올렸습니다. 우리는 그저 기뻤습니다.
여행 일정을 마치고 위산사에 돌아온 후 영화 스님은 법문 시간에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막 웃으셨습니다. “역시 내 제자들은 충성심도 없어! 길에서 날 버리고 다 내려서 항실 스님에게 절을 하지 뭐야.”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농담으로 할 수 있는, 그런 스님을 무서워하거나 불편하게 느끼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영화 스님은 제자들에게 수행자는 생각하는 그대로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내면에서는 화가 나고 불안한데, 외적으로 예의 바른 척하려면 얼마나 마음이 고생스럽습니까? 영화 스님은 수행을 통해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이미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마음에 번뇌가 있다고 해서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영화 스님은 늘 우리 마음 어디에서 왜 번뇌가 일어나는지 볼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현안 스님
미국에서 사업을 하던 중 노산사(盧山寺, Lu Mountain Temple)에서 영화 스님을 만나 참선을 처음 접했습니다. 수행 정진하다가 불법을 더 깊게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미국 위산사(潙山寺, Wei Mountain Temple)에서 영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습니다. 현재는 스승의 뜻에 따라 국내로 들어와 청주 보산사(寶山寺, Jeweled Mountain Temple)에서 참선(챤 메디테이션, Chan Meditation)을 지도하며 수행 정진하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보물산에 갔다 빈손으로 오다』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