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국과 불교] 이성계 미륵을 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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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국과 불교] 이성계 미륵을 발원하다
  • 주경미
  • 승인 2021.10.27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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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의지 담은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땅속에서 발견된 이성계의 불교 사상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발전시켰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려시대까지 국교였던 불교가 조선 건국과 동시에 쇠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 건국을 지지했던 불교계 활동이 있었기에 새로운 왕조의 창건이 가능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조선 건국 초기의 불교문화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조선왕조실록』 등 유학자들이 찬술한 역사 기록에 고려 불교계가 조선 건국 과정에 참여한 내용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 초기 불교문화와 태조 이성계의 불교 사상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는 역사 기록이 아니라 우연히 땅속에서 발견된 불교 문화재들이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금강산 월출봉에서 태조 이성계가 발원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일괄품이 발견되면서(사진 1),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이성계의 불교 사상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사진 1.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일괄품, 1390~1391년, 강원도 금강산 월출봉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는 금강산 월출봉에서 방화선 공사를 하던 도중 땅속 석함(石函) 안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석함을 제외한 사리장엄구 일괄품은 곧바로 당시 서울에 있던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졌고, 1933년 7월 박물관 소장품으로 정식 등록됐다. 현재 보물 제1925호로 지정된 이 사리장엄구 일괄품은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현존 유물은 총 9점으로, 은제도금 사리기 2점, 은제 귀이개 1점, 동제 사리기 1점, 백자 5점 등으로 구성된다. 이 중 5점의 유물에 새겨진 명문(銘文)들에는 발원자와 제작연대 등이 기록돼 있는데, 주요 발원자는 태조 이성계와 그의 부인 강씨다. 현존하는 역사 기록에는 이성계 부부가 사리장엄구를 발원했다는 내용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만약 이 사리장엄구 일괄품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이성계 부부의 불교 사상은 역사에서 완전히 잊혔을 것이다. 명문에 의하면 이 사리장엄구 일괄품은 1390~1391년 사이에 제작됐다. 이는 이성계가 조선 건국 직전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잡고 있던 시기다.

 

역사 속에서 감춰진 사리장엄구 발원과 역성혁명

태조 이성계는 1335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출생한 동북 지방 호족이다. 14세기 중반경부터 부친과 함께 공민왕의 반원운동에 참여하며 뛰어난 무장(武將)으로서 고려 조정에서 활약했다. 14세기 후반은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흥성하기 시작한 변혁기로, 고려에서도 이성계를 비롯해 정몽주, 정도전, 조준 등 개혁을 주장하는 신진사대부들이 등장한 시기다. 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 회군과 함께 우왕을 몰아내고 창왕을 즉위시키면서 권력을 잡았다. 그다음 해인 1389년 1월에는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즉위시켰으며 당시 최고 권력자인 수문하시중이 됐다.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경제적·정치적·군사적 측면에서 총체적인 개혁을 시도하며 새로운 왕조의 창건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성계가 금강산에 사리장엄구를 발원해 봉안한 것이 바로 이 시기다.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결국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양위 받는 형식으로 즉위했으며, 국호를 조선으로 바꿔 역성혁명을 완수했다. 이러한 즉위 과정으로 볼 때 1390~1391년 발원된 금강산 사리장엄구는 기록에 남지 않은 역성혁명의 일부 과정이며, 이성계가 미륵하생신앙을 중심으로 한 불교적 정치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물질문화적 증거물이다.

즉위 이전부터 조계종 승려들과 교유하며 각종 불사(佛事)에 참여했던 이성계는 불교 신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위 후에도 그와 꾸준히 교유했던 가장 중요한 인물은 조계종 승려였던 무학 대사다. 14세기 말 불교 금석문(金石文, 금속이나 돌로 만든 각종 유물에 있는 명문)에 기록된 이성계의 이름은 그의 불교적 공양 행위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1383년 이색과 나옹의 문도들이 발원해서 건립한 경기도 여주 신륵사의 ‘신륵사 대장각기비’에 이성계는 발원자 중 하나로 기록돼 있다. 1384년 건립한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 안심사의 ‘안심사 지공나옹비’ 역시 이성계를 발원자 중 하나로 기록하고 있다. 

1385년 건립한 경기도 고양시 태고사의 ‘태고사 원증국사탑비’에도 이성계 이름이 발원자로 기록돼 있다. 조선 건국 이후인 1394년에는 입적한 고승 혼수를 위해 왕명으로 충주 청룡사 ‘청룡사 보각국사환암 정혜원융탑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이러한 불교 금석문들에 이성계와 함께 발원자로 등장하는 홍영통, 정순택주 황씨, 낙랑군부인 김씨 등은 금강산에 봉안된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의 명문에도 함께 발원자로 참여하고 있어 흥미롭다.

 

사리장엄구 5점에 새겨진 14세기 초 불교문화

사리장엄구는 석가모니 붓다의 사리(舍利, śarira)를 봉안하기 위해 마련한 각종 장엄구로, 사리를 직접 담는 사리기와 성물(聖物)인 사리에 바쳐진 각종 공양품, 사리 공양 의례에 사용하는 각종 의례용품을 포괄한다. 발굴 당시 상태가 명확하지 않아 확실하지 않지만, 현존하는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는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기와 은제도금 팔각탑형 사리기, 청동완, 여러 개의 백자 발, 백자 향로(香爐)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제작 시기, 발원자, 제작자 이름이 기록된 5점의 사리장엄구들은 14세기 전반 불교문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기년명(紀年銘) 작품이다.

사리를 직접 봉안하고 있는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기는 내부의 유리제 원통형 사리기와 라마탑 형태의 뚜껑, 연화형 대좌, 명문이 새겨진 원통형 은판 등으로 구성된다(사진 2). 원통형 은판에는 이성계와 그의 부인 강씨, 장인(匠人)으로 추정되는 물기씨(勿其氏) 등 세 명의 이름과 이성계의 직위가 새겨져 있다. 이는 1389년 공양왕 즉위 이후에 받은 직위로, 사리장엄구 제작 시기는 1389년 이후로 추정된다. 얇은 은판을 두드려서 입체적으로 만든 라마탑형 사리기는 고려 말부터 유행한 새로운 사리기 형식을 보여준다. 탑 사방에는 합장인의 불입상(佛立像)을 새겨 놓았으며, 탑 윗부분의 연화문과 상륜부는 수준 높은 타출기법(打出技法, 금속제품을 안팎으로 두드려 문양을 도드라지게 표현하는 기법)으로 입체감 있게 표현했다.

사진 2.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기, 1389년 이후, 전체 높이 15.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기는 조금 더 큰 은제도금 팔각탑형 사리기 안에 봉안돼 있었다. 은제도금 팔각탑형 사리기도 은판을 두드려서 문양을 새긴 후 도금해서 만든 것으로, 탑 표면에는 면마다 합장인의 불입상이 새겨져 있다(사진 3). 이 사리기 역시 안쪽의 팔각형 은판 표면에 제작 연대와 발원자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1390년 3월에 승려 월암, 황희석, 홍영통, 낙랑군부인, 박자청 등 여러 명이 발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중 박자청은 조선 초기 공신 중 한 명으로, 태조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 문묘, 창덕궁, 문소전(文昭殿) 등의 토목공사를 감독했던 건축가이자 무신이다. 박자청은 당시 30대 초반이었으며 사리장엄구를 직접 제작했던 장인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

사진 3. 은제도금 팔각탑형 사리기, 1390년, 전체 높이 19.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새 시대를 기원한 이성계의 미륵하생신앙

1391년 4월에 제작된 백자 그릇 표면에는 월암과 송헌시중과 만여 명이 발원해서 만들었다는 발원문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송헌시중이 바로 이성계다(사진 4). 이 백자 그릇의 명문에는 “미륵의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고, 삼회(三會, 미륵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진리를 설하는 세 번의 큰 법회) 때에는 다시 이것을 열어서 부처님을 예배하겠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는 고려 말부터 유행한 미륵신앙과 매향(埋香)의례와 관련된다. 향을 묻어 놓고 미륵이 하생(下生)하기를 기원하며, 향후 이 향으로 미륵불에게 봉헌할 수 있기를 소망했던 불교도들의 매향의례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 해안가에서 널리 행해졌다. 이는 혼란한 사회에서 새로운 시대를 기대하는 미륵하생신앙과 관련있다. 아마도 이 백자 그릇은 함께 봉안된 백자 향로(사진 5)와 함께, 매향의례를 위해 공양한 향합(香盒, 향을 담는 합), 혹은 공양품으로 생각된다.

사진 4. 백자 그릇 1, 1391년, 높이 19.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5. 백자 향로, 14세기 후반, 높이 12.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또 다른 백자 그릇 한 점은 가장 바깥쪽 그릇이었는지 구연부(그릇의 언저리)가 다소 깨진 상태이며, 그릇 안쪽과 굽 부분에 명문이 새겨져 있다(사진 6, 7). 굽 부분에는 1391년 4월 방산 사기장 심룡과 비구 신관의 이름이 있어서 이 백자 그릇이 강원도 양구의 방산 도요지에서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그릇 안쪽에는 “금강산 비로봉 사리안유기”로 시작하는 발원문이 새겨져 있으며, 명문의 내용은 이성계와 만인이 미륵을 기다리며 발원해서 금강산에 사리를 봉안한다는 것이다(사진 7). 이 사리안유기는 이성계가 미륵, 즉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며 당시 불교 성지인 금강산에 사리를 봉안한다는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이성계의 미륵하생신앙을 보여준다. 미륵하생신앙은 미륵이 이 세상에 출현해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기대하는 열망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리장엄구의 명문은 미륵하생신앙을 바탕으로 한 전륜성왕 사상, 혹은 불교적 정치사상과 세계관을 즉위 전 이성계가 가지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한편, 이 사리장엄구의 명문들 속에 함께 등장하는 사람들은 즉위 이전부터 이성계와 개인적 친분을 가졌던 고려의 불교도들로서, 이성계의 새로운 왕조 창건을 지지하고 동참했던 인물들로 보인다.

 

이성계 사리장엄구의 불교미술사적 가치 

금강산 출토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일괄품은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려는 이성계의 건국 의지와 이를 향한 고려 귀족들의 지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자, 신왕조의 새로운 조형 양식을 예고하는 공예품으로서 의의가 크다. 특히 백자 사리기 및 향로들은 조선시대 경질백자의 선행양식으로, 강원도 양구 지역에서 시작된 새로운 도자공예의 기술 발전 양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가 제작된 14세기 후반에는 불교가 지배적인 사상이었으며, 이성계 자신도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이 사리장엄구 명문에는 조선의 개국공신이 된 고려 구(舊) 귀족들의 이름도 등장한다. 이제까지 조선 건국 과정에서 이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거의 잊혀져 왔지만, 불교계와 고려 귀족 세력의 역할도 상당히 중요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는 미륵을 기다리며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려는 이성계와 그의 신왕조 창건을 지지하던 고려 불교계 세력의 불교적 정치사상을 담고 있다. 이성계 사리장엄구는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향한 의지와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한 그의 불교적 제왕관(帝王觀)을 드러낸 조형물이다. 이 사리장엄구를 당시 가장 유명했던 불교 성지인 금강산에 봉안한 것은 고려 태조의 금강산 설화나 금강산의 미륵신앙 등을 고려한 선택으로 보인다. 고려 후기 미술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제작기법과 도상 등에서 조선 초기 신양식을 예고한 이 사리장엄구 일괄품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미술 양식을 제시하는 불교미술품이자, 유교적 사료 편찬자가 빠뜨린 조선 창건 과정을 보여주는 금석문 자료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주경미
서울대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에서 동양미술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부경대, 서강대, 부산외대 등에서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충남대 고고학과 강사이자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성계 발원 불사리장엄구의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저서로는 『중국고대 불사리장엄연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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