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새로운 사회와 국가를 건설하려는 세력은 신진 사대부들만이 아니었다. 화엄종, 천태종, 조계종 등 여러 불교 종파의 고승들도 새 왕조 건설에 앞장섰다. 이성계에게 새로운 왕조 창업을 종용한 무학 대사가 대표적이다. 불교계 재편과 수호를 위해 조선 건국에 동참한 조선 최초이자 마지막 왕사, 무학 대사에 대해 살펴보자.
이성계의 신왕조 건설 발원한 무학
무학 대사는 1344년 18세에 출가해 소지 선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혜명 국사에게서 불법을 배웠다. 진주 길상사·묘향산 금강굴 등에서 수도하다가 1353년 원나라 연경에서 공부하며 인도 출신의 지공 스님으로부터 법을 인가받았다. 이후 고려로 돌아온 무학은 나옹 스님의 제자가 된다.
고려 말 무학은 스승 나옹과 함께 지공의 유훈을 받들어 양주 회암사 중창 불사에 참여했다. 회암사를 불교계 본산으로 삼아 불교계를 중흥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회암사 중창은 신진 사대부 반대 세력에 의해 중단됐고, 추방된 나옹은 신륵사 근처에서 순교했다. 나옹 입적 후 무학은 나옹과 지공의 추념과 조선 건국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여기에는 조계종 무학뿐만 아니라 천태종과 화엄종의 대표적인 고승도 동참했다.
그러던 중 무학은 당시 신흥 무장 세력으로 떠오르던 이성계와 조우한다. 무학은 이성계의 요청으로 명당 길지 등을 논의한다. 1384년 안변 석왕사 토굴 석왕사에서는 이성계에게 왕의 조짐이 있는 꿈을 풀이하며 왕조 창업을 종용한다. 신진 사대부 정도전보다 먼저 이성계를 혁명의 대열에 끌어들인 것이다. 무학이 이성계에게 왕조를 창업하라고 종용한 지 5년 후 왕조 창업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위화도 회군이 단행된다.
무학은 이성계의 지역 기반인 동북과 선대의 고향인 전북 지방 일대의 사찰에서 이성계의 왕조 창업을 위해 기도했다. 경남 진주 금대암에서는 조선 건국을 위한 기도를, 전남 순창 만일사에서는 이성계의 왕조 창업을 위한 1만일 기도 올렸다고 전한다. 의정부 회룡사에서는 이성계와 함께 국가 창업을 위해 기도했다.
건국 후에도 이어진 불교 수호 행보
조선 건국 이후 무학은 이성계의 왕사로 책봉된다. 무학은 양주 회암사를 삼화상의 도량으로 삼고, 이곳을 중심으로 불교를 재편하기 위해 한양 천도를 주도한다. 또한 한양도성을 지키는 4대 사찰과 한양의 외사산 중 하나인 관악산 일대 사찰을 지정하고 정비한다. 선각 국사 도선의 비보사상을 계승해 한양을 중심으로 사찰을 재편한 것이다.
불교계 일선에서 퇴진한 후에는 양평 용문사와 회암사 등의 사찰에 머물면서 이성계와 태종 사이 갈등을 푸는 역할도 했다. 태종이 왕위의 정통성을 찾기 위해 함흥에 머물던 이성계를 환궁시키고자 할 때, 이를 성사한 것도 무학 대사였다. 회암사에서 머물 때는 태상왕 이성계를 움직여서 불교를 보호하고 비보사찰을 유지했다. 태종이 불교를 탄압하려 할 때 이성계는 무학 대사가 머물던 회암사에서 단식으로 저항해 탄압시책을 중지하게 했다.
무학은 민중을 위해 자비를 몸소 실천한 고승이기도 했다. 유불일치를 주장한 무학은 태조에게 “갓난아이 보호하듯 백성을 보호하면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당부하며 왕조 건국기 죄수들의 석방을 청했다.
무학 입적 후 1405년(태종 5) 한국불교는 역사상 가장 큰 탄압을 당하게 되지만, 무학의 불교 개혁과 수호를 위한 노력은 향후 조선불교의 씨앗이 됐고 한반도에 깊이 뿌리 내려 오늘에 이른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