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계룡산 갑사 영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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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계룡산 갑사 영규대사
  • 노승대
  • 승인 2021.12.2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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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음력 4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에 16만 명에 이르는 왜군이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고 부산포에 상륙했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이 터진 것이다.

조선군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육군이 18만 명, 수군은 2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 개국 후 200년간 큰 전쟁이 없어 머릿수만 많았지 오합지졸이었다. 왜군의 전략은 빠르게 한양을 점령해 선조의 항복을 받는 것이었지만,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북행길에 올라 도망쳤다. 한양에 모인 왜군 장수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결국 왜군은 8개 부대로 나눠 8도를 하나씩 점령키로 했다.

의외의 변수는 또 있었다. 이순신이 서해로 진출하려는 일본 수군의 진로를 끊었고 민간에서는 의병과 승병이 일어나 왜군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일본 내 영주들끼리의 전쟁과는 판이한 양상이 벌어진 것이다.

서산 대사의 제자 영규 대사는 최초로 승병을 일으켜 조헌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고 전라도를 점령하려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군을 금산에서 저지하려다 조헌과 함께 전사했다. 영규 대사의 흔적은 금산 보석사와 옥천 가산사, 출가 사찰인 갑사 일대에 남아 있어 이번에는 갑사로 내려가며 대사와 관련된 유적을 순례했다.

 

계룡면사무소 앞에 있는 영규 대사 정려각. 금산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갑사로 가던 중 이 자리에서 순절했다 한다. 밀양 박씨로 이 근처 널티가 고향이다.

 

‘의병승장영규지문’이 새겨진 비석. 임진년 8월 20일에 입적한 뒤 10월 21일에 동지중추부사에 추증되었지만 승려의 신분이어서 명정을 못 받았다.

 

숙종 36년(1720) 이르러서야 명정을 받고 정려각을 세웠다. 지금의 정려각은 1813년에 다시 세웠고 1995년에 보수했다. 용마루 도깨비망와. (*망와望瓦: 지붕마루 끝을 장식하고 막음 짓는 기와)

 

계룡초등학교 뒤쪽의 영규 대사 묘. 1986년 처음 찾아왔을 때는 조그만 봉분에 한적하고 쓸쓸한 곳이었다. 1994년 무렵 대대적으로 중수했다.

 

옛 분묘 앞의 상석과 비석. 비석은 1810년에 세웠고 전면에 의병승장군영규지묘(義兵僧將軍靈圭之墓)라 썼다. 상석에도 의병승장기허당영규지묘라 새겼다.

 

갑사로 들어가는 곧은 도보 숲길. 양쪽으로는 느티나무, 말채나무, 상수리나무, 팽나무 등 노목들이 늘어서서 길손을 반긴다. 절이 깊숙하고 아득해 보인다.

 

계룡갑사 글씨는 1887년 충청도 병마절도사(지금의 육군사령관) 홍재희가 쓴 것이다. 임오군란때 민비를 장호원으로 피신시켜 승승장구하던 그 사람이다.

 

훗날 홍계훈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과 민비에 충성을 다 했지만 1895년 민비가 시해될 때 왕실 호위대장으로서 죽었다. 절 마당에서 바라본 계룡산.

 

백제시대에 창건된 갑사는 정유재란으로 모두 사라진 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됐다. 대웅전은 전쟁이 끝난 뒤 6년 후인 1604년에 중건됐다.

 

축댓돌이 마치 모자이크하듯 이어 맞추어 자연스러운 미감을 연출하고 내부는 3불4보살, 7존 형식 소조불로 장엄했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

 

금고는 법당에서 의식을 행할 때 두드리는 둥근 쇠북이다. 보통 거는 틀을 간단하게 만들지만 갑사 쇠북틀은 매우 특이하고 화려하다. 희귀한 유물이다.

 

표충원은 공주 출신 영규 대사를 기리기 위해 영조 14년(1738)에 세운 사당이다. 안에는 서산 대사, 사명 대사, 영규 대사 3인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이 사당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고종 31년(1894)에 다시 세웠다. 영규 대사 기적비는 위당 정인보가 지었으며 1973년에 세웠다.

 

영규 대사는 기골이 남보다 배나 크다고 했을 만큼 장신이었고 얼굴은 말상이었다고 했다. 성격도 괄괄해 조헌과 단번에 뜻이 맞았고 결국 함께 죽었다.

 

보물 갑사 동종은 임진왜란 8년 전인 1584년에 만들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전쟁물자 헌납으로 공출됐다가 다시 찾아왔다. 옛 종틀이 함께 있다.

 

공우탑은 갑사의 암자를 건립할 때 소가 냇물을 건너다가 죽자 그 넋을 위로하고자 세웠다고 한다. 친일파 윤덕영이 냇가로 옮겨 세운 것을 다시 옮겼다.

 

갑사 뒤 암자 터에 있던 승탑은 1917년 대적전 앞으로 옮겨 세웠다. 기단부의 사자, 구름, 용의 조각이 대담하고 섬세하다. 고려 승탑으로 보물이다.

 

대적전은 갑사가 지금 자리로 옮겨가기 전의 법당 터에 세워진 전각이다. 안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앞마당에는 옛 법당의 주춧돌이 곳곳에 있다.

 

대적전은 조선시대 말기에도 중수된 듯하다. 용마루의 용두도 조선시대 말기 양식이고 법당 내부의 벽화에도 민화풍의 사군자가 여기저기에 그려져 있다.

 

갑사 철당간은 대적전으로 올라오는 언덕길 아래에 있다. 신라시대에 처음 만들었고 꼭대기에 설치되었던 깃발을 거는 장치는 사라졌다. 보물로 지정됐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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