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걸, 불교에 빠지다] 나혜석과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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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걸, 불교에 빠지다] 나혜석과 불교
  • 한동민
  • 승인 2022.02.28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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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과 ‘보리심’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은 당대 선망의 대상으로, 혹은 또 다른 경멸의 언사로 쓰였던 ‘신여성’의 대표주자였다. 수원박물관 소장

‘나혜석’이라는 이름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은 당대 선망의 대상으로, 혹은 또 다른 경멸의 언사로 쓰였던 ‘신여성’의 대표주자였다. 그래서 나혜석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매혹적이면서도 논쟁적이다. 식민지라는 시대적 아픔과 나혜석이라는 인물이 갖는 독특한 마력 때문일 것이다. 이는 동시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유랑과 추방과 방랑’의 시대에 ‘자유로운 인간이고자 한 여성’ 나혜석의 분투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현실에 기인하기도 한다. 

나혜석은 일본 유학을 한 신여성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유화가다. 3·1운동으로 구속된 이력과 만주의 안동현 부영사의 부인이자 세계여행을 하는 등 당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 경험과 함께 다양한 인물들과 교유했다. 그럼에도 파리에서 최린과의 스캔들과 이에 따른 이혼, <이혼고백서>를 통한 가부장적 가족제도와 남성 중심적 성 담론에 대한 문제 제기는 조선사회를 흔들었고, 그 충격의 자장 속에서 나혜석도 끝내 길 위의 죽음을 맞이한 인물로 그려졌다.     

신여성이자 화가로서, 문학가로서, 혹은 독립운동가로서, 페미니스트로서 나혜석이 갖는 다양한 존재적 중층성에 더해 그녀가 던진 인간과 여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래서 나혜석은 여전히 의미 있는 이름으로 호명되고 있는 것이리라.   

나혜석과 김우영은 1920년 4월 10일 서울 정동예배당(현 정동제일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남편 김우영과 함께 세계여행을 떠나기 전의 모습. 나혜석은 11년이 넘는 결혼 생활 동안 세 아이를 낳았고, 외교관의 아내로 세계 일주 여행을 하기도 했다.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불교와의 인연

나혜석은 수원 종로교회에서 운영한 사립 삼일여학교를 졸업했고, 일본 유학 중인 1917년 12월 동경 조선교회의 조선인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당시 유학생들은 기독교에 우호적이었고, 나혜석을 둘러싼 벗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었다.    

나혜석이 불교계와 맺은 유의미한 인연의 시작은 1929년 수원포교당(포교사 손계조)에서 개최한 개인 전람회에서였다. 20개월의 세계여행을 마치고 셋째 아들 김건을 동래 시댁에서 낳은 뒤 백일이 지나자 1929년 9월 23~24일 이틀에 걸쳐 용주사포교당, 즉 지금의 수원사(水原寺)에서 ‘나혜석 여사 구미 사생화 전람회’를 개최한 것이다. 이는 나혜석 개인도 그렇거니와 수원 최초의 미술전람회였다. 이듬해 전국 최초로 수원에서 프롤레타리아미술전람회(제1회 프로미전)가 개최될 수 있었던 것도 나혜석 미술전람회가 개최된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후.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수원포교당 미술전람회 개최 이듬해인 1930년 나혜석은 김우영과 이혼했다. 이후 1935년 수원으로 낙향하기 전까지 서울 수송동 목조 2층집에 혼자 살며 그림 그리기에 전념했다. 이곳에서 1933년 2월 ‘여자미술학사’를 열고 개인지도를 하고, 초상화를 그려 생활을 유지했다. 

이 수송동 시절 나혜석은 불교를 받아들였다. 1931년 김일엽이 속세를 접고 승려가 되기로 했다는 속내를 털어놓자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고 면박을 주기도 했으나, 1933년 김일엽의 입산 출가 이전에 나혜석은 확고한 불교신자가 되어 있었다. 출가 전인 1928년부터 김일엽은 나혜석보다 앞서 불교에 귀의했다. 김일엽은 「불교(佛敎)」지의 문예란을 담당하며 점차 불교에 귀의하게 됐는데, 그 이면에는 백성욱(白性郁, 1897~1981)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나혜석의 불교 입문에는 김일엽의 영향이 있었다. 

나혜석은 집에서 가까운 수송동 각황사에 다니며 불교 공부를 했다. 1910년 건립된 수송동 각황사(覺皇寺)는 도심포교의 전진기지였고 이후 조계종의 본사가 됐다. 나혜석의 수송동 시절인 1931년 각황사에서는 매달 일요강좌를 개최했으며, 김태흡(金泰洽)을 비롯해 이탄옹(李炭翁), 유엽(柳葉), 최영환(崔英煥), 손일봉(孫日峯), 박포명(朴抱明), 유화봉(柳華峰), 이지광(李智光) 등이 불교 강연을 맡았다. 김일엽도 출가 이전 각황사에서 김태흡(김대은)에게 『법구경』 등을 배웠다. 나혜석도 강사 최영환, 즉 최범술(崔凡述, 1904~1979)을 알게 되면서 이후 합천 해인사와 사천 다솔사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1931년 아베 일행과 불국사 앞에 선 나혜석.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예술혼과 보리심

“예술만이 완전한 것이 아니고, 생활 혼자만도 완전한 것이 못되고, 생활과 예술이 합치되는 데서 참된 완전이 온다”고 믿었던 나혜석에게 이혼은 엄청난 충격적 사건이었다. 생활과 예술을 일치시키고자 한 나혜석에게 이제 남은 것은 치열한 예술적 성취에 대한 욕심, 즉 ‘작가적 예술혼’이었다. 1930년 이혼 이후 나혜석은 그림에 대한 투지를 불태우며 예술작품으로 고난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래서 ‘역경에 처한 자의 요령은 노력과 근면’이라는 슬로건으로 치열하게 창착에 몰두했다. 이에 1930년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입선, 1931년 제10회 선전에 특선, 1932년 제전 입선 및 제11회 선전 무감사 입선 등 부단한 작품활동을 펼쳤다.

1933년 이미 불교적 세계관을 담지한 나혜석은 ‘작가적인 예술혼’과 ‘불교적 보리심’으로 자신을 지탱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제 나혜석의 정신세계는 ‘예술혼’과 ‘보리심’, 즉 예술과 불심으로 지탱되고 있었던 셈이다. 

나혜석은 1935년 2월 즈음 서울 수송동 생활을 접고 고향 수원 지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귀촌을 통한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에 전념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여름이면 나혜석은 명승지를 찾아 그림 여행을 떠났다. 1931년 금강산 만상정을 시작으로 1932년 해금강 총석정 어촌, 1933년 수덕사, 1934년 해인사 등지를 찾아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주변 사람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삶을 보냈다. 

한편 김일엽이 1933년 본격적으로 입산수도하면서 나혜석과 김일엽의 관계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불교의 세계로 더욱 깊이 침잠되는 삶으로 변화된 나혜석에게 김일엽의 수덕사와 수덕여관은 중요한 공간이 됐다. 1935년 여름 두 달 가까이 나혜석은 수덕사 앞 수덕여관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그 결과 풍경화 40여 점으로 1935년 8월 24~25일 이틀간 예산읍공회당 2층에서 조선중앙일보 예산지국 후원으로 나혜석 개인전람회를 개최했다. 2달 뒤인 10월 24일부터 서울 진고개 조선관에서 소품 200여 점을 대상으로 개인전람회를 열었다. 전업 작가로 평가받고 싶었으나 언론을 비롯한 미술계에서 철저히 외면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는 나혜석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더욱이 큰아들 김선이 폐렴으로 사망하면서 정신적 고통을 더했다.

동시에 수덕사로 입산 출가한 김일엽과의 관계와 수덕사 인근 수덕여관을 근거지로 활동한 나혜석의 존재는 김태신의 『라훌라의 사모곡』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김태신은 1938년 2월 말 봄방학 때 수덕여관에서 나혜석을 처음 만난 이후 1944년 12월까지 10차례 나혜석을 만났다. 나혜석은 1943년 수덕사 만공 스님과 서산 부석면 간월암 복원 불사에 500원의 거금을 시주했는데, 이는 서산군수 박영준(朴永俊)이 나혜석의 작품 <독서>를 매입한 대금이라고 한다. 이후 나혜석은 1944년 12월 해방 직전까지 수덕여관을 근거지로 삼아 치열하게 그림을 그리는 ‘화가 나혜석’으로 살았다. 

김상호 일행과 해인사 장경각 앞에서.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임환경 스님이 주석하던 해인사 홍제암에서 법복을 입고 찍은 사진. 해인사 법무로 활동했던 최범술과의 인연으로 해인사를 방문한 나혜석은 해인사 홍도여관에 머물며 작품활동을 한다. 여기에서 <해인사 홍류동 계곡>을 그렸다.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자유인

수원시립미술관에는 나혜석 소장 사진첩이 있다. 90장이 넘는 사진은 나혜석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불교와 관련한 사진이 있는데, 승려로 입산하기 전의 <김일엽 씨>, 경주 불국사 관련 사진 2점, 해인사 관련 사진 4점 등 7장이다. 

기독교인이었던 나혜석이 1930년대 불교인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각황사 일요강좌 및 각황사 강사 최범술 등을 통해 해인사와 다솔사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나혜석의 마지막 글로 평가되는 수필 <해인사 풍광>(1938)과 해인사 관련 사진을 통해 해인사와 나혜석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만당(卍黨)의 핵심 인물로 해인사 법무로 활동했던 최범술과의 인연으로 해인사를 방문한 셈이다. 해인사 홍도여관에 머물며 작품활동을 한 나혜석은 <해인사 홍류동 계곡> 그림을 남겼다. 

최범술의 은사였던 임환경 스님이 주석하던 홍제암에서 환경 스님과 법복을 입고 찍은 사진은 홍제암을 중심으로 활동한 임환경 스님의 전신을 온전히 보여주는 귀중한 사진이다. 더욱이 만해 한용운의 뜻을 따르던 불교계 비밀조직 만당의 주도 인물이었던 김상호, 최범술, 강유문 등과 해인사 장판각 앞에서 찍은 사진은 나혜석의 불교계의 위상과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보여주는 것으로 나혜석이 친일 문제에서 자유로운 이유를 설명한다. 

나혜석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이였던 염상섭(廉想涉, 1897~1963)조차 나혜석의 마지막을 ‘절간에 숨어 여생을 마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세속적 관점에서 이러한 평가가 나혜석의 후반기 삶에 대한 이해 방식이었다. 그러나 나혜석은 단순히 숨어 여생을 마친 것이라 보기 어렵다. 물론 적극적으로 평가해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비승비속의 삶, 무소유의 대승적 삶을 살아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적어도 나혜석은 파킨슨병으로 손떨림 현상이 심해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육체적 절망에 직면할 때까지 화가로서 작품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속세를 떠나 산사 주변에 머물렀던 나혜석의 마지막 생애는 비승비속의 삶이자 치열한 창작활동을 펼쳤던 자유로운 삶이었던 셈이다.   

 

한동민 
일제 강점기 한국사회운동과 한국근대불교사로 중앙대에서 석·박사를 마쳤다. 현재 수원화성박물관장으로 있다. 저서로 『경기도 전통사찰을 찾아서』, 『불교계 독립운동의 지도자 – 백용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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