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 후 한국에 돌아왔을 때 정말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없었던 일인데, 한국에서 스님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이 저를 윗사람 대하듯 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매우 공손하게 대해줬습니다. 이와 달리 미국에선 삭발하고 승복을 입었어도,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스님이어도 미국인들에겐 우린 그냥 또 다른 사람일 뿐입니다. 미국의 그런 환경에서 출가하면, 스님들은 항시 테스트를 거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출가자이든 상관없이 우리의 행동과 말에 대해서 액면가로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엔 좋은 점도 있습니다. 출가자라고 우아한 척, 아는 척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의견이나 경험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출가자를 윗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에, 스님이 무슨 말을 했을 때 동의하지 않으면 기분이 상하는 대신, 동의하지 않는다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미국 위산사에서는 스님과 재가자가 다 함께 수행합니다. 출가자는 하루 24시간, 1년 365일 사람들의 눈과 귀에 노출돼 있어서, 추하고 못난 모습을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아상을 숨길 곳이나 시간 따위는 별로 없습니다. 영화 스님은 출가한 제자들을 그렇게 훈련합니다. 재가자들이 와서 잘못을 지적하거나 막대하거나, 모욕할 때도 출가자들은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래서 출가법은 재가자의 수행법과 좀 다릅니다. 우리의 아상이 몰래 빠져나가서 쉴 틈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스승이 출가법을 바르게만 사용하면 그건 마치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빠른 초고속 기차와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출가가 깨달음의 필수조건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재가인으로 수행하는 게 낫습니다. 만일 반야지(般若智, Prajna Wisdom)를 얻고 싶다면, 거기엔 딱 하나의 뚜렷한 길만 있는 게 아니란 걸 기억하세요. 아주 많은 길이 있습니다. 최소 팔만사천개의 법의 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반드시 출가자가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불교의 역사에 재가인이 깨달은 증거도 있습니다. 바로 방거사(龐居士) 이야기입니다. 그는 깨달은 선 수행자입니다. 깨달은 후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선사의 사찰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강설합니다. 그렇게 많은 스님을 겁먹게 했습니다.
여러분이 현명한 스승을 찾을 수만 있다면, 출가자로 수행하는 게 훨씬 더 좋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혼자 수행하는 것보다 깨달을 기회가 더 많습니다. 재가인의 라이프스타일은 자신의 탐닉을 위해서 디자인된 반면에 출가자의 것은 반야지혜를 펼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영화 스님에게서 한 달 만에 깨달은 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선화 상인과 같은 훌륭한 선지식의 지도가 있었기 때문에 출가하지 않고서 선화 상인의 출가한 제자보다도 더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깨닫길 원한다면 결가부좌로 앉길 권합니다. 일단 여러분이 결가부좌로 앉기 시작하면 점점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는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로 앉지 않고도, 명상하지 않고도 깨달음을 얻은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그렇게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미 깨달았다면 반가부좌나 결가부좌를 분별할 필요가 없지만, 아직 깨닫기 전이라면 차라리 분별하는 게 나을 것입니다.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은 우리들이 더 빨리 깨달을 수 있도록 이런 훌륭한 수행법을 남겨주셨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기만 하면 그건 문자반야(文字般若, literary prajna)라고 부릅니다. 그건 마치 땅속에 씨앗을 심어놓기만 한 것과 같습니다. 아직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건 먹을 수도 없고, 팔 수도 없습니다. 수확도 아직 못했습니다. 그래도 일단 심어야 합니다. 아직은 쓸모가 없지만 문자반야는 중요합니다. 바른 씨앗을 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책만 읽고서 이해했다고 믿으면 큰 곤란에 처합니다. 문자반야는 아직 참된 지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화 상인께서도 말씀하시길 참된 지혜 없이는 법을 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참된 지혜는 대승의 반야지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명상, 즉 관(觀)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관조반야(觀照般若, Contemplative prajna)입니다. 우리가 선(禪)을 배우고, 절하고, 진언을 외우고 이런 모든 것이 바로 관조 반야의 한 형태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진언을 외우다가 갑자기 ‘만두가 먹고 싶다’라는 생각이 올라옵니다. 또는 ‘아! 배고파, 너무 피곤해’라는 생각이 올라옵니다. 그러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참을성이 없지? 왜 화가 날까? 내 마음은 교만하구나. 그런 걸 잘라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관(觀, Contemplation)입니다. 우리 마음속 우치를 관하고, 스스로의 탐욕을 보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분노와 우울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자기 실수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지혜가 부족합니다. 지혜란 우리 자신의 탐진치를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지혜로운 것입니다. 만일 타인의 탐진치를 볼 수 있다면, 그곳엔 지혜가 전혀 없습니다. 이건 매우 힘든 일입니다. 무엇이 불쾌한지 계속 봐야 합니다. 자신의 허물을 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의 진실을 보는 걸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지혜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추함을 직면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관조지혜입니다.
관조의 과정은 “왜?”, “왜?”, “왜?”를 묻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정화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보고 씻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불이나 참선할 때, 진언이나 염불하고 있을 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관입니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왜라고 묻고 원천으로 가십시오. 왜 탐욕스러운지 그 원천을 볼 때까지 그걸 뒤쫓아보십시오. 그렇게 스스로를 정화합니다. 그걸 찾아서 잘라버려야 합니다. 하나를 잘라버리면, 그 아래 더 깊이 자리 잡고 있던 문제가 드러납니다. 계속 추적하면서 또 잘라버립니다.
각 선정의 단계마다 다른 관조 지혜가 있습니다. 관조 반야에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진전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매우 어려운 과정입니다. 집착이 없는 상태가 되면, 탐진치를 인지하고 떨어뜨리면 불과(佛果)가 나타난다고 하지만 그건 이론일 뿐입니다. 수행하면서 각 단계에서 떨어뜨려야 할 특정한 탐진치가 있습니다. 그 단계의 탐진치를 해결하면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탐진치와 지혜에 여러 층이 있듯, 깨달음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작은 성취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참고 법문: 영화 선사의 법문 ‘반야바라밀 제1편’ 2015년 1월 1일
현안(賢安, XianAn) 스님
출가 전 2012년부터 영화(永化, YongHua) 스님을 스승으로 선과 대승법을 수행했으며, 매년 선칠에 참여했다. 2015년부터 명상 모임을 이끌며 명상을 지도했으며, 2019년 미국 위산사에서 출가했다. 스승의 지침에 따라서 2020년부터 한국 내 위앙종 도량 불사를 도우며 정진 중이다. 현재 분당 보라선원(寶螺禪院)에서 상주하며, 문화일보, 불광미디어, 미주현대불교 등에서 활발히 집필 중이다. 국내 저서로 『보물산에 갔다 빈손으로 오다』(어의운하, 2021)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