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부암동 무계정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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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부암동 무계정사터
  • 노승대
  • 승인 2022.05.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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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부암동으로 소규모답사를 다녀왔다. 1986년에 자하문터널이 뚫려서 지금은 효자동 쪽에서 바로 세검정 쪽으로 넘어갈 수 있지만, 전에는 고갯마루에 있는 창의문 옆의 도로를 경유해야만 했다. 창의문 바깥 동네가 바로 부암동이다.

원래 이 산간 마을은 개발되기 이전 무계동, 백석동, 부암동, 삼계동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창의문은 한양도성 북쪽의 작은 문이어서 북소문이라 일컫기도 하지만 보통은 자하문이라고 불렸다. 창의문 밖은 삼각산의 빼어난 경치와 더불어 맑은 계곡과 어우러진 너른 암반들이 아름다웠다. 마치 신선이 산다는 곳에 어린다는 보랏빛 노을[자하:紫霞]이 보일 듯하여 자하문이라는 애칭이 생긴 것이다.

동네 이름의 유래가 되었던 부침바위[부암:付岩]는 1970년 도로를 확장하면서 사라졌지만, 이 일대는 풍광이 좋았던 만큼 조선시대의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대원군 별장이 아직 남아있고 안평대군(1418~1453)이 살던 무계정사도 바로 이곳이 있었다. 세종의 세 번째 아들이었던 안평대군은 12살에 혼인한 후 궁을 나와 옥인동 기린교 근처에 집을 지었다. 시서화에 모두 능통했던 안평대군은 박팽년과 함께 무릉도원을 거니는 꿈을 꾸고 이 터를 찾아낸 후 무계정사를 지었다. 무계(武溪)란 바로 무릉도원의 계곡이란 뜻이다. 안견으로 하여금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한 것도 바로 이곳이다.

무계정사터 옆에는 <운수 좋은 날>을 쓴 현진건(1900~1943)이 양계장을 하며 살았던 집터가 있고 구한 말 군부대신을 지낸 윤웅렬(1840~1911)이 별서(별장)로 지은 가옥도 남아있다. 백사실계곡에는 주춧돌만 남아있어도 아름다운 정원터가 숲속에 그대로 있다.

지금 이 지역에는 이중섭의 <황소>를 소장하고 있는 서울미술관, 나무인형 전문의 목인미술관, 와당 전문의 유금와당박물관, 한국적 풍류와 정서를 그린 김환기 화가의 김환기미술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별 헤는 밤> 등을 쓴 윤동주를 기리는 윤동주문학관 등이 들어 서 있다. 하루에 다 돌아보기는 벅찰 정도로 많은 문화자산이 몰려있다. 산벚나무 꽃비를 맞으며 진분홍 복사꽃과 라일락 향기를 쐬면서 옛 유적과 미술관을 순례하는 것도 봄날에만 누릴 수 있는 부암동의 멋이다.

무계정사터 위 청계동천 각자. 동천(洞天)은 산수가 수려하고 경치가 빼어나 신선이 산다는 곳을 말하니 곧 지상낙원이다. 원래 도교에서 유래된 용어다.

 

무계정사터 인근 무계원은 요정 오진암을 옮겨 왔다. 이름을 날리던 삼대요정 중 대원각은 길상사가 되었고 삼청각은 음식점, 오진암은 문화공간이 되었다.

 

홍화씨로 물을 들이는 홍염은 여러 가지 색깔로 나뉜다. 임금의 옷에 쓰는 대홍색은 30번의 반복적 염색과정을 거쳐야 한다. 곧 임금의 색이 대홍색이다.

 

그 전통의 맥을 이은 장인이 김경열 홍염장이다. 그가 만든 열쇠패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사대부 안주인들의 호사품이었다. 무계원 전시는 6월 19일까지다.

 

공터였던 현진건 집터는 개인의 정원이 되었다. 동아일보 부장때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6개월 복역 후 이곳으로 와서 양계장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대한제국 시절 법부, 군부대신을 지낸 윤웅렬은 유행한 전염병 성홍열을 피해 이곳에 별서(별장)를 지었다. 동생 윤영열의 손자가 바로 윤보선 대통령이었다.

 

백사실 별서정원으로 가는 길에 바라본 북악산. 파스텔 톤의 봄빛 누리에 청명한 하늘이 맑고 상쾌하다. 많은 등산객이 가파른 성곽길을 오르내리고 있다.

 

백석동천 각자는 누가 썼는지 모른다. 북악산을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불렀듯 주변에 흰 돌이 많고 북한산 경치가 뛰어나 이렇게 이름 지었을 것이다.

 

백사실계곡 위쪽의 별서정원터는 근래까지도 백사 이항복의 별서였다고만 전해졌을 뿐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연못가에 세워진 육각정의 돌기둥 초석.

 

1935년도 동아일보 기사에 실린 육각정 사진. 두 발은 넓고 둥근 연못에 담그고 있다. 북악산 북쪽 뒤 그늘이라 여름 더위를 피하는데 제격이었으리라.

 

사랑채터. 2012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과 연구 결과 백석동천 일대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소유였음을 입증하는 문헌자료를 확인했다.

 

추사의 『완당전집』권9에 “선인이 살던 백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 공터는 원래 안채가 있었던 곳으로 발굴조사 결과 밝혀졌다.

 

안채 발굴조사 당시의 모습이다. 사랑채는 누마루를 갖춘 ‘ㄱ’자 형태의 집이었고 안채는 문간채가 딸린 가옥이었다. 발굴 후 보존을 위해 다시 덮었다.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길. 도성에서 오는 손님은 자하문 밖 오른쪽 숲길로 와서 작은 계곡에 놓인 돌다리를 건너 이 계단을 올라가 대문에 도착했겠지.

 

사랑채 동쪽의 네모난 작은 연못. 사대부가 사랑채 뜰에는 작은 연못을 파고 연꽃을 기르는 풍습이 있었다. 퇴계 선생이 살던 도산서원에서도 볼 수 있다.

 

사랑채에서 연못으로 내려가는 돌계단. 붕우들이 오면 계곡물을 끌어들여 만든 연못가를 산책하면서 담소도 하고 정자에서 술 한잔에 시도 지었으리라.

 

발굴조사 결과 복원해 본 추정도. 사랑채에는 계단 위에 바로 대문이 있고 연못으로 내려가는 문은 따로 만들었다. 안채 아래쪽에는 초가 두 채가 있었다.

 

별서정원에서 내려가며 만난 귀룽나무. 봄 숲에서 가장 먼저 새싹을 틔우는 부지런한 나무다. 벚꽃과 달리 잎이 나온 다음에 꽃이 피는 특징이 있다.

 

인조반정 때 이귀, 김류 등이 모의하며 칼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이 일대는 암반과 계류가 뛰어나 연산군이 와서 놀았던 명소다.

 

석파정은 원래 대원군 별장 안에 있었던 별채 건물인데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자신의 집을 지으며 뜯어 옮겼다. 지금은 음식점 석파랑의 부속건물이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2022)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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