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승이 머무는 봉은사에는 매화가 한창이다. 그중에서도 봉은사 역대 큰스님들의 진영(眞影)을 모신 영각(影閣) 옆에 피어있는 홍매화는 단연 으뜸이다. 아마도 도심 인근에서 피는 매화꽃 가운데 가장 먼저 피기 때문일 것이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봉은사의 홍매화는 사명대사(四溟大師, 1544~1610)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가져와서 심었고, 옆에 있던 요사(寮舍)를 매화당(梅花堂)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의 매화는 그때의 그 매화가 아니요, 요사도 그때의 그 요사는 아니다.
‘고결’과 ‘인내’라는 꽃말을 가진 매화는 시서화(詩書畵)의 오랜 주제이기도 하지만, 절집에서 깨달음을 노래하는 오도송(悟道頌)의 주제로도 자주 등장한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翻寒徹骨)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樸鼻香)
“티끌 같은 세상의 번뇌를
벗어나기는 예삿일이 아니니
노끈의 끝(화두)을 바짝 잡고
한 판 제대로 붙으리라.
뼛속까지 사무치는 매서운 추위가 아니면
어찌 매화가 코를 찌를 듯한 향기를
피울 수가 있으리.”
황벽희운(黃檗希運, ?~850) 선사의 게송이다. 황벽 스님은 정치적인 문제로 잠시 절집에 사미승으로 지내고 있던, 후에 당나라 황제가 된 선종의 뺨을 세 대나 때릴 만큼 기개가 대단한 분이셨다. 그래서 황제는 후에 ‘추행사문(醜行沙門)’이라는 호를 내리려고 했다. 황제의 소심한 복수심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폭력승’이라고 호를 붙이려 한 것이다. 다행히도 스님의 도력(道力)을 흠모하던 재상의 만류가 아니었으면 전대미문의 법호(法號)가 탄생했을 것이다.
이 게송에는 스님의 이러한 기개가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겨울이 추울수록 매화꽃 향기는 더욱 짙어진다. 시련이 클수록 성취감은 더욱 배가된다. 그래서 스님에게 있어 매서운 겨울 추위는 보통의 범인(凡人)들이 느끼는 추위와 다르다. 오히려 더욱 분발하게끔 하는 고마운 추위이다. 삶 속에서 닥쳐오는 시련도 마찬가지이다. 그 시련도 지나고 나면 나를 더욱 성장시키는 원동력이었다.
“상처 없이 어찌 봄이 오고, 상처 없이
어찌 깊은 사랑이 움트겠는지요.
태풍에 크게 꺾인 경상도 벗나무들이
때아닌 가을에 우르르 꽃을 피우더니
섬진강 매화나무들도 중상을 입은 나무들이
한 열흘씩 먼저 꽃을 피웁니다.
전쟁의 폐허 뒤에 집집마다 힘닿는 데까지
아이들을 낳던 때처럼
그렇게 매화는 피어나고 있습니다.”
<첫매화>라는 도종환 시인의 시 가운데 일부이다. 생명에 대한 의지는 오히려 척박한 곳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매서운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무수히 많은 벚나무의 가지가 꺾이고 뿌리가 뽑혔다. 하지만 꽃을 피워 생명을 잊고자 하는 의지는 더욱더 강해진다. 꽃 피울 계절이 아님에도 꽃을 피웠고, 가지가 꺾인 매화나무들은 평소보다 더 많은 매화꽃을 피웠다. 살고자 하는 그 생명력은 그렇게 질긴 것이다.
보잘것없는 중생일지라도 그 안에는 활화산 같은 불성(佛性)의 생명력이 살아있다. 그래서 수행 중에 오는 역경계(逆境界)는 오히려 불성에 대한 자각(自覺)과 분발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기꺼이 수용하라! 이것이 노선사(老禪師)께서 마음공부 하는 후학들에게 하는 진심 어린 당부이다.
진일심춘불견춘(盡日尋春不見春)
망혜답편농두운(芒鞋踏編壟頭雲)
귀래소념매화후(歸來笑拈梅花嗅)
춘재지두이십분(春在枝頭已十分)
“종일토록 봄을 찾았지만 보지 못하고
짚신 발로 구릉 머리 구름만 밟았네.
돌아와 피어있는 매화를 집어 맡아보니
봄은 가지 끝에 이미 충분히 있었네.”
남송의 유학자인 나대경(羅大經)이 지은 『학림옥로(鶴林玉露)』에 수록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느 비구니의 오도송(悟道頌)이다. 봄은 깨달음을 상징한다. 간절한 마음으로 모진 고행난행(苦行難行)을 마다치 않고 치열하게 정진하는 비구니스님의 마음이 전해온다. 구름을 얼마나 밟아야 짚신이 닳을까? 백년, 천년, 만년, 아니 일겁(一劫)의 세월이 지나도 닳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무심하게 흐르고, 수행자의 마음은 애가 끓는다. 해도 해도 끝은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 정신은 피폐해지고 몸은 더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돌아온 토굴에는 매화꽃이 한창이다. 무심코 집어 든 매화 가지에 핀 꽃 향이 진하게 전해진다. 코끝이 찡해온다. 그렇게 애타게 찾던 봄소식이 지금 이곳, 매화꽃 향기 속에 있었다.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오도송들은 세속 시인들의 음풍농월(吟風弄月)이나 아무런 아픔도 없이 괜스레 신음하는 진솔하지 못한 시와는 분명히 큰 차이를 보인다. 그 시 속에는 치열함이 있고, 시련이 짙게 배 있으며, 한 인간의 좌절이 보인다. 그리고 그 크기와는 상관없는 자신만의 깨달음이 있다. 그 깨달음은 일상생활 속에서 같이 호흡했던 모든 것 가운데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꽃 속에도, 대나무 속에도, 구름 속에도, 산속에도….
선사들의 깨달음은 한결같이 몰록 찾아온다. 그것을 우리는 ‘돈오(頓悟)’라 한다. 또한 대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깨달음은 표현된다. 오도적인 체험은 단순하게 어떠한 논리나 철학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몸으로 부딪친 수행에서 나온다. 그래서 수행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일자무식한 촌놈인 육조 혜능 대사가 누구보다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삼십 년이나 칼을 찾은 나그네여!
몇 번이나 잎이 지고 가지가 돋아났던가?
그러나 복사꽃 한 번 본 뒤론
지금에 이르도록 다시 의혹이 없네.”
영운지근(靈雲志勤, ?~820) 선사의 오도송이다. 치열하게 수행한 30년이 무색하다. 언뜻 본 한 번의 복사꽃이 깨달음으로 피어났다. 진정 30년을 헛되이 보냈는가? 아니다. 그 길고 긴 인고(忍苦)의 시간은 오도의 준비 과정이다.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과정주의자가 되어야지 성과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과주의자들에게는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정신적 문제는 성과를 우선에 두는 이들에게 가장 흔한 모습이다.
“마당의 매화나무 가지마다 눈이 쌓였고
티끌 같은 속된 세상 꿈마저 어지럽네
옥당에 홀로 앉아 봄밤의 달을 마주하니
기러기 울음따라 내 마음도 날아가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매화시이다.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인 이황은 매화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매화를 주제로 한 시가 100여 편에 이른다고 한다. 눈 속에 피는 매화를 설중매(雪中梅)라 한다. 하얀 눈 속에 피는 꽃! 상상만 해도 마음이 설레 온다.
나랏일이 개인적으로 명예와 명성을 가져다주었지만,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쳤을 것이다. 봄밤에 핀 매화를 보고 있자니 노정승(老政丞)은 아마도 옛 연인이 사무치게 그리웠을 것이다. 두향(杜香)이와의 로맨스는 역사적으로 매우 유명하다. 쉬어가는 마음으로 한 번 들어보시라. 공부는 쉬는 것이다.
부인 둘을 먼저 보낸 48살의 홀아비 이황은 단양 군수로 부임하게 된다. 이때 당시 관기인 18세의 꽃다운 두향이와 사랑을 하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시작한 지 9개월 만에 끝이 나고 만다. 이황이 풍기 군수로 전근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둘은 그 이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하게 된다. 조선의 법이 관기는 발령된 곳으로 데리고 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떠나는 날 두향은 청매화를 정표로 이황에게 주었고, 그때부터 이황의 매화사랑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말년에 제자들을 키운 도산서원은 온통 매화밭이 되었고, 지금도 봄이 오면 장관을 연출한다고 한다. 이황의 마지막 유언은 ‘매화에 물을 주어라’였다고 한다.
두향은 이황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흘 동안 단양에서 안동까지 걸어와 먼 발취에서 보고 갔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이러한 충절 때문에 이황의 후손들은 지금까지 자손이 없는 두향이의 묘에 벌초하며, 그녀의 넋을 기린다고 한다.
매화는 모진 삶과 역경을 이겨낸 아이콘이다. 그윽한 향기는 수행자에게는 수행의 눈물이었으며, 아름다운 꽃망울은 연인들의 그리움이었다. 그래서 매화는 다양한 삶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보다.
석두 스님
1998년 법주사로 출가했으며 해인사 봉암사 등에서 20안거를 성만했다. 불광사, 조계종 포교원 소임을 역임했으며, 현재 봉은사 포교국장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