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템플스테이의 추억
템플스테이에 대한 첫 기억을 떠올리면 대략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반인에게 절에서의 생활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해서 대학생이었던 나는 여름 방학을 맞이해 템플스테이를 신청했다. 그렇게 친구와 함께 방문한 곳이 안동 봉정사였다.
산사로 향하는 우거진 소나무 숲길은 오는 이들을 아늑한 품으로 받아주는 듯했다. 싱그러운 녹음으로 에워싸고 온통 초록빛으로 물든 나무들이 너희의 시름은 그만 여기 놓아두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마치 지금부터 치유의 시간이 준비되었다는 듯이…
2박 3일 동안 지내면서 잊지 못할 추억들을 많이 만들었다. 늦은 밤, 풀벌레 소리에 잠깐 밖으로 나왔다가 보게 된 밤하늘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을 그렇게나 많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꽤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무래도 그날의 아름다움이 가슴속에 진하게 새겨진 모양인지 아직까지도 밤하늘 하면 그때가 떠오른다.
며칠간 지내면서 가장 재밌었던 추억은 스님과 함께 텃밭에서 감자를 캤던 일이다. 평소 호미를 잡을 일이 별로 없다 보니 손에 쥐여준 도구 하나에 농부라도 된 마냥 신이 났다. 빌려주신 밀짚모자를 쓰고 열심히 밭일을 도왔다. 캐낸 감자가 한가득 쌓여가는 만큼 땀에 흠뻑 젖은 내 모습에 몹시 뿌듯해했다. 값진 노동 이후에 얻어먹는 시원한 수박의 맛은 어찌나 끝내주던지…. 스님은 우리에게 일을 잘한다고 치켜세워주시면서 며칠 더 재워줄 테니 일을 좀 더 하고 가라 했다. 그 순간, 친구와 나는 서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반나절은 괜찮지만 그 이상은 힘들다는 무언의 대답을 들키고서 모두가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어진 스님과의 차담 시간에는 곱게 쌓인 연꽃차 대접을 받으며 마음에 새길 좋은 말씀을 들었다. 은은한 차 향기와 그윽한 정취가 함께 어우러지니 포근한 안식을 선물 받은 느낌이랄까. 머무는 동안 충분히 쉬고 제대로 힐링할 수 있었다. 템플스테이에 대한 첫 기억이 이렇게 내게 오래도록 기분 좋게 남았다. 그래서 종종 삶의 휴식이 필요할 때면 템플스테이를 찾곤 한다.
취업, 퇴사, 이직… 머릿속이 복잡할 땐
20대 대학생 시절을 떠올려 보면 가장 큰 고민은 바로 진로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흘러 30대 중반이 지난 이 시점에도 크게 변한 것 같지 않다. 단지 그때는 취업에 대한 고민이었다면 이젠 퇴사와 이직에 대한 고민으로 바뀌었다는 정도? 이제는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면서 하는 일에 있어서 그전과 같은 긴장감이 없다. 그만큼 숙련됐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예전만큼의 설렘이 사라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반복되는 익숙한 일상이 때론 지루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해서 업무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언제나 해야 할 일은 넘치고 넘친다. 그뿐이랴. 하고 싶지도, 원치도 않는 경쟁을 해야 하고 매번 평가도 받아야 한다. 그중에서 가장 곤욕스러운 것은 싫은 사람과도 매일 대면해야 한다는 것. 어딜 가나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은 꼭 있기 마련이지만 직장생활이 가장 괴로운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람이다. 여기에 코로나와 같은 외부적인 돌발 상황에서의 위기까지 경험하다 보니 회사가 언제까지나 나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불안감마저 더해졌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부쩍 생각이 많아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언제까지 해야 하나, 이곳을 나가게 되면 무엇을 해야 하나’와 같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이 이어졌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산란할 땐 템플스테이가 딱이다. 비워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조용한 공간에서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단 걸 알려줄 때면 지체 없이 길을 나선다. 템플스테이는 나와의 진솔한 대화가 시작되는 마법의 시간이니까. 평소에는 바쁘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미처 돌보지 못했던 나와의 솔직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자리다.
템플스테이를 하러 와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는 순간, 잠시나마 바깥에서의 모든 무게와 역할도 함께 벗어놓는다. 눈앞에 자연을 두고 고요만이 함께 하는 지금 이 순간은 오롯이 ‘나’로 존재하고 싶다. 손도 마음도 가뿐하게 산책길을 나서면 나무들이 만들어준 시원한 그늘이 마련돼 있다. 그 아래에서 가만히 듣고 있자면 새들의 노랫소리, 물 흐르는 소리가 더없이 청량하다. 어느새 자연에 동화돼 하나로 연결된 일체감을 느낀다. 본래 있어야 할 곳에 온 것 같은 아늑함이 있다. 신선한 공기가 내 몸으로 흐르고 내딛는 걸음마다 흙에 닿는 이 느낌이 좋다. 피로했던 몸과 지친 마음에 생기가 돌고 다시 맑아지는 기분이다. 이것만으로도 절반은 충전된 느낌이랄까.
템플스테이를 하게 되면 저절로 하게 되는 것이 있다. 새벽녘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는 것. 고요한 침묵 속에서 호흡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에 평화가 깃든다. 일상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편안함과 자유로움….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지 않아도, 무엇을 소유하고 있지 않아도 가슴 깊은 곳까지 가득 찬 충만감을 느낀다. 지금 이 순간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그 자체로 더없는 행복감에 젖는다. 지금 이대로 충분하고 바로 여기에 행복이 있는데 자꾸만 저 멀리서 행복을 찾고 더 많이 소유하려 한다는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나를 낮추는 명상과 절 그리고 템플스테이
사찰이 주는 묵직하고도 깊은 안정감은 내게 절을 하도록 자연스레 이 몸을 이끈다. 부처님을 앞에 모시고 경건한 자세로 한 배 한 배 절을 해나가면 저절로 겸허해진다.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이며 나를 돌아보게 한다. 내 안의 아집이 보이고 이기심이 보인다. 그렇게 나와 똑바로 대면하게 된다. 그러면서 내가 일으킨 번뇌와 마주한다. 명상과 절은 바로 그런 힘이 있다. 나와 세상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지혜를 밝혀주는 힘! 그래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활동이다.
수없이 절을 하다 보면 나만의 관점으로 덧칠한 색안경을 내려놓게 되는데 그때 참된 앎이 찾아온다. 내가 문제라고 안고 있던 것들이 그다지 고민할 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 그동안 뭘 그렇게 고민했나 싶을 정도로 허무한 것이라는 것을.
템플스테이를 하러 오기 전 일과 나의 진로에 대해 혼자 심각하게 고민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회사를 다니는 게 회사가 나를 붙잡고 안 놓아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진정 회사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것 또한 아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순전히 내 이익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 이 회사와 이 업무를 선택한 건 오로지 나 자신이지 않은가. 돈을 받으며 많은 것을 배워왔는데 몇 가지 하기 싫은 일과 업무량에 불평불만을 했다.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이 있어서 돈 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었고, 여태껏 나의 쓰임을 알아주고 나가라는 압박 없이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데 그것은 까맣게 잊고 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이 사람은 이래서 싫고, 저 사람은 저래서 밉다고 ‘내가 옳다’는 상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단지 그 사람은 그 사람일 뿐인데 나의 관점에서 바라보니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만하겠다’라고 상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면 세상에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따로 없는데 말이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시비 분별했다. 옳으니 그르니 싫으니 좋으니 하면서 괴로움을 스스로 자초했다. 상대의 문제가 아니고 그것을 문제 삼는 내 마음이 문제였는데…. 괴로움이 사람 때문에, 직장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반성하게 된다. 절을 하며 이러한 나 자신에 눈뜨고, 상대를 인정하는 마음을 다시 한번 배우게 됐다고나 할까.
나 자신과 진실하게 마주하다 보면 한순간에 깨닫는다. 괴로움이란 게 다 내가 만든 허상이라는 것을. 괜히 직장 탓, 사람 탓을 하며 불평불만을 한 것에 대해 참회기도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감정의 찌꺼기를 씻어낼뿐더러 마음이 밝아진다. 나중에는 바르게 성찰하는 내 모습과 나의 현실에 감사한 마음까지 생기면서 감사 기도로 마무리 짓는다.
휴대폰과 TV, 일체의 전자기기에서 벗어나 깨끗한 음식을 먹고, 진정한 휴식을 취하고 나면 어느새 한 걸음 더 성장해 있다. 불안과 두려움, 불만은 내 생각이 만들어낸 허상임을 알아차리니 고민거리가 단숨에 사라졌다. 몸과 마음을 온전히 충전한 채로 돌아간다.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터에서의 행복을 발견하고 삶을 조금 더 현명하게 살아나갈 자신감도 가득 채우고 간다. 그리고 오늘을 가볍게 살아가면서 내게 주어지는 인연들을 자연스럽게 맞이할 용기를 얻는다. 이 약발이 떨어질 때 즈음 나는 또다시 템플스테이를 찾아 나서겠지.
몸과 마음이 쉬어 갈 수 있는 곳, 나를 바르게 일깨워주는 곳, 지금 여기에서 내가 가진 행복을 깨닫게 해주는 템플스테이가 나는 좋다.
다음엔 어느 절에서 나를 만나고 있을까? 그리고 그땐 무엇을 배워가게 될까?
신민정
서른 살 무렵의 교통사고로 몸과 마음이 힘들 때 108배와 명상을 통해 건강을 회복했다. 그즈음부터 마음공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몇 년 전, 번아웃과 인간관계에서의 갈등으로 큰 괴로움을 겪고 100일간 절에서 지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른세 살 직장인, 회사 대신 절에 갔습니다』를 출간했다. 현재 몸과 마음의 돌봄을 1순위에 두고 마음관리 글을 꾸준히 쓰며 「영남경제」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