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인가. 우주가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산방한담』)
굳이 법정 스님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꽃을 피우는 행위는 신비다. 애써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국화 한 송이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운다. 어떤 꽃을 대하든 누구나 단박에 안다. 그래서 저절로 감탄한다. 한 생명의 탄생은 씨줄과 날줄로 얽힌 여러 인연 덕분이다. 연꽃도 마찬가지다. 진흙 속에서 인연을 기다리다 여름에 핀다. 그 놀라운 생명의 신비가, 그 하얗고 연분홍 꽃이, 작은 바다를 이룬다.
사찰에 핀 청정함의 불국토
진흙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생명이 있다. 7~8월의 습한 장마와 불볕더위, 고인 물, 진흙만 있다면 그 탄생을 알리기에 금상첨화다. 진흙 속 뿌리줄기에서 올라온 잎자루 끝에 핀 하얗고 연분홍 꽃, 연꽃이다. 잎 표면에는 미세한 잔털이 빽빽해서 비가 와도 물에 잘 젖지 않고 흘려버린다. 그래서다. 진흙 속에서 피어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면서 처염상정(處染常淨)을 상징한다. 영취산에서 부처님이 든 꽃 한 송이에 빙긋 웃었다던 제자 가섭의 미소를 뜻하는 염화미소(拈花微笑)에 등장하기도 한다. 마야부인 옆구리에서 태어난 싯다르타가 내딛는 걸음마다 핀 꽃도, 부처님을 형상화한 불상이 앉은 자리인 대좌에 핀 꽃도 연꽃이다. 전국의 사찰 어디에서든 연화장(蓮華藏, 불국토)세계를 만날 수 있는 이유다.
천년고찰의 연못에 장관을 만드는 연꽃이 있다. 남양주 봉선사는 전국에서도 이름난 연꽃 명소다. 역사도 길다. 2003년 3,300m2(1,000평) 규모로 시작한 연꽃밭이 지금은 일주문 주차장 옆 커다란 연꽃단지로 변모했다. 데크길로 연꽃단지를 산책하며 연꽃을 감상하다 위쪽 연못에 자리한 카페에서 연꽃단지를 내려다보는 풍경도 일품이다. 7월 중순과 말이면 만개하니 아직 못 봤다면 8월 초엔 집을 나서야 할 참이다.
봉선사에 들렀다면 연꽃만 보고 가긴 아쉽다. 500년 넘게 신성하게 보존된 ‘비밀의 숲’이 있다.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인 광릉을 감싼 숲, 광릉숲이다. 조선의 7대 왕 세조가 죽어서 자신의 사냥터로 즐겨 찼던 숲에 묻혔고, 이 숲에 있는 절 봉선사는 능을 수호하는 사찰이다. 광릉숲과 봉선사는 떼려야 뗄 수 없다. 서울 조계사는 7월 5일 연꽃축제 ‘나를 깨우는 연꽃향기’를 개막했다. 도량에 연못이 없으니 예년과 같이 500여 개 옹기에 심어진 백련과 홍련 등 다양한 연꽃이 하나둘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종로 인근 직장인들이 점심과 퇴근 시간에 들러 연꽃 사진을 찍는 핫스팟이기도 하다. 가족과 혹은 동료와 또는 친구와 연꽃으로 인생샷 하나 건질 생각이라면 8월 안에 조계사에 들러야 한다.
서울 강북에 조계사가 있다면, 강남에는 서울 봉은사가 있다. 봉은사도 백중 49일 기도를 입재한 7월 5일 ‘가족과 함께하는 봉은사 연꽃축제’를 열었다. 홍련을 담은 500여 개 화분이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흰색 영가등과 오묘하게 어우러진 길이 색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코엑스를 비롯한 강남 일원 직장인들의 산책코스로 이름난 도량인 만큼 연꽃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백중기도는 8월 22일까지이지만, 연꽃축제는 9월 3일까지 계속된다.
김제 청운사를 빼면 섭섭하다. 6만 6,000m2(약 2만여 평) 규모의 하소백련지에서 연꽃이 만발한다. 2002년부터 시작한 하소백련축제에는 수만 명이 다녀간다. 절이 있는 산 모양이 새우처럼 생겼다고 해서 ‘새우 하(鰕)’, ‘연못 소(沼)’ 한자를 붙여 하소백련이 됐다. 하소백련 외에도 야생화밭, 100여 종의 각종 연꽃을 전시한 미니연지, 수련지가 있어 발길을 붙드는 곳이다. 7월 초 축제는 끝났지만, 아직 연꽃은 꽃을 피운다.
블로거 등의 포스팅과 입소문을 타고 새로운 연꽃 강자로 떠오른 곳도 있다. 산청 수선사는 코로나 시국 때 한국관광공사 ‘언택트 관광지 100선’에 선정돼 사람들의 발길을 불러 모았다. 다랑논(계단식 논)이었던 곳의 돌을 걷어내고 거기에 생긴 웅덩이 인근에 절을 세웠다. 자연스럽게 생긴 연못에 연을 심고 정원을 가꿨고, 전문 사진작가는 물론 소확행을 누리려는 사람들의 인증샷 핫스팟이 됐다. 사찰카페 ‘커피와 꽃자리’ 3층 테라스에서 내려다보이는 정경은 잊지 못할 기억을 만든다.
사찰 부럽지 않은 연화장세계
7, 8월엔 사찰 밖에서도 연화장세계가 펼쳐진다. 단일 연꽃축제로는 전국 최대인 무안 회산백련지 33만여m2(약 10만여 평)를 가득 채운 연꽃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밤이면 한지등을 들고 달빛 아래를 걷는다면 이보다 좋을 수 없다. 7월 21~24일 연꽃축제가 열리지만 조금 늦어도 숨어 있는 하얀 연꽃을 찾는 재미가 있다. 부여 서동 궁남지에서 열리는 부여 서동연꽃축제도 빼놓을 수 없다. 궁남지는 백제 무왕이 궁궐 남쪽에 지은 연못으로, 무왕이 되기 전 서동의 탄생설화와도 관계가 깊다. 낮에는 고즈넉한 백제의 전경, 밤에는 다양한 테마로 연꽃 정원을 즐길 수 있다. 전설의 연꽃이라 불리는 오오가하스, 새벽에만 꽃봉오리가 열리는 수련도 여기 있다.
지역 전체가 문화유산인 경주는 여름이면 연화장세계, 불국토 그 자체다. 동궁과 월지, 서출지, 양동마을 등 여러 지역에서 연꽃이 출현한다. 첨성대, 동궁과 월지, 월성 일원을 일컫는 동부사적지는 연꽃으로 이미 유명하다. 4만 8000m2(약 1만 4,520평) 부지에 백련과 홍련, 수련 등 다양한 연꽃이 장관을 연출한다. 경주 ‘젊음의 거리’로 떠오른 황리단길에서도 연꽃이 핀다. 황리단길은 경주 옛 도심 대릉원 근처 황남동 일대에 생긴 1km 정도 되는 거리다. 이곳의 고분 일원에 피는 연꽃도 볼거리다.
대구 동구 안심창조밸리는 국내 최대 규모의 연근재배단지를 도심 속 생태·문화·힐링 공간으로 재조성해 안심 연꽃단지가 됐다. 최근 한국관광공사의 ‘2022년 여름시즌 비대면 안심관광지 25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연꽃 뷰맛집인 양평 세미원은 8월 15일까지 연꽃문화제를 연다. 20만 4,000여m2(약 6만 2,000평)에 달하는 야외정원에서 홍련과 백련을 마음껏
관람할 수 있다.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잠깐 멈춰서 ‘나’라는 사람의 향기를 연꽃처럼 맑고 향기롭게 피워낼 수 있는지,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여름의 절정인 8월, 서울 조계사 주지 지현 스님 말을 되새긴다. 연꽃 보러 사찰은 물론 어디든 가서 잠시 나를 돌아볼 짬을 낼 이유는 충분하다. 이 또한 여름의 낭만 아닐까.
사진. 정승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