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흉화복 점치는
정화수, 윷놀이, 칠성판
하늘에 걸린 시계
한민족은 유전학적으로 70% 정도가 북방계고 30% 정도는 남방계다. 북방계라면 시베리아나 만주 쪽에서 내려왔다는 것이니 처음 출발지는 어디였을까?
마지막 빙하기가 닥치자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혹독한 추위 때문에 바이칼호 주변에 모여 살았다. 러시아 동남쪽, 몽골 북쪽에 있는 바이칼호는 최단 너비 27km에 최장 너비 89km, 남북 길이 636km, 최대 수심 1,742m에 이르는 초승달 모양의 담수호다. 민물 호수로서는 세계 최대 크기다.
호수 밑바닥 분화구로 뜨거운 물이 치솟는 특이한 환경이어서 다른 곳보다 온화했다. 이곳에 구석기인들이 모여 살았던 이유다. 1만 년 전 즈음 빙하기가 끝나고 얼음이 녹기 시작하자 홍수가 일어났고, 일단의 부족들은 해 뜨는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 지역에 살다가 인구가 많아지면 일부가 또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시베리아에 이르렀고, 다시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한민족을 형성했다.
미국 에모리대 연구소의 세계 종족별 DNA 분석 자료에 의하면 지금도 바이칼호 주변에 사는 부리야트인, 아메리카 인디언, 그리고 한민족의 DNA가 거의 같다고 한다. 한국 의학계나 러시아 유전학연구소의 연구 결과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한국인과 부리야트인은 얼굴도 비슷하고 풍속과 문화도 유사한 점이 많다. 고고학적으로도 청동기와 즐문토기(빗살무늬토기) 분포도에서 한민족의 시원이 바이칼호수 지역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목민은 초원을 따라 이동하는 민족이다. 끊임없이 정확한 방향을 찾아야 한다. 계절과 시간, 이동 방향과 이동 시간을 알아야 실수가 없다. 북방 유목민족에게는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커다란 시계가 하늘에 있었다. 바로 북두칠성이다.
윷판바위와 칠성판
낮에는 그림자의 방향을 보고 시각을 알 수 있지만, 밤에는 북두칠성이 알려준다. 북두칠성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번씩 시계 방향으로 돈다. 북두칠성은 7개의 별이 국자 모양으로 이뤄져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두(斗)는 ‘자루가 달린 술 따위를 푸는 용기’라는 뜻이다. 곧, 북쪽 하늘에 있는 두(斗) 모양의 별이어서 북두칠성(北斗七星)이라 부른다. 그래서 두성(斗星)이라고도 한다.
손잡이 부분에 해당하는 세 개의 별을 두병(斗柄)이라고 부르는데 6번째 별과 7번째 별을 이으면 시간을 가리키는 시침(時針)이 된다. 오랫동안 북두칠성을 관찰하면서 두병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계절을 판단하고, 1년을 12개월로 나눠 표시했다. 공간을 시간으로 전환한 것이다.
옛사람들은 북두칠성이 이 국자에다 생명수를 담아 하늘에서 인간 세계에 뿌려준다고 믿었다. 생명을 주는 신성한 별이 됐으니 생명을 거둬 가는 책임도 주어졌다. 인간의 생사와 수명을 주관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일곱 개의 별에 인격화된 신격을 부여해 인간 세상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역할도 맡게 됐다. 길흉화복도 북두칠성의 관할이 된 것이다.
북방 유목민으로 한반도에 들어와 정착한 한민족은 북두칠성에 대한 견고한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한 흔적을 선사시대 암각화에 남기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이 안동 수곡리 암각화다. 신선바위라고 부르는 평평한 암반은 남북 30m, 동서 15m 너비로 위에는 말굽 모양, 새 모습, 사람 발자국이 있고 큰 바위 구멍들도 있다. 선사시대 제의를 치르기 위한 장소로 추정하는데 여기에 윷판이 새겨져 있다.
윷판은 둥근 원형으로 29개의 조그만 바위 구멍으로 만들어졌다. 물론 가운데가 북극성이고 북두칠성이 동서남북으로 돌아가는 형태로 구성됐다. 윷놀이할 때의 사각 말판을 원형으로 만든 것이라고 보면 된다. 한민족에게는 북두칠성이 하늘의 중심별이었기에 오랫동안 섬겨오던 믿음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윷판바위는 고인돌에도 있고 산속 기도처 바위신단에도 있고 전국에 흩어져 있다(울산대학교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에서 펴낸 『한국의 윷판 암각화』에는 전국 85개 장소에 흩어져 있는 윷판 암각화가 실려 있다).
역사의 시대에 들어와서도 북두칠성에 대한 믿음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어떤 기도처에는 불교의 탑도 세워졌다. 바로 영국사 망탑봉이다. 탑은 본래 부처님 사리를 모신 곳으로 법당 앞에 모시는 것이 기본 방식이지만, 민간전승의 기도처에도 등장한 것이다. 이 망탑봉에 있는 윷판 바위는 약간 기울어진 바위 경사면에 새겨져 있다.
근래에 발견된 전북 임실군 신평면 가덕리 상가마을 윷판바위에서 윷판암각화 23점과 패턴 16점이 확인됐다. 국내 최대의 윷판 암각화 유적이다. 학자들은 선사시대부터 시작된 윷판 암각화가 6세기까지 이어진 것으로 봤다.
이처럼 북두칠성은 한민족에게 오랫동안 전통 신앙의 중심에 있었다. 생명과 수명을 관장하고 인간의 길흉화복도 관장하니 자연스럽게 신격을 부여해 ‘칠성님’으로 불렀다. 이러한 관념은 우리 문화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이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어디로 돌아가셨나? 수명을 주는 칠성님에게로 돌아갔다는 의미다. 이 세상에 다시 오려면 칠성님에게 수명을 타야만 한다.
그래서 시신을 북두칠성 모양으로 구멍이 뚫리거나 그려진 나무 널판 위에 올려서 매장했다. 그 나무판을 칠성판(七星板)이라고 했다. 시신을 염할 때도 일곱 매듭으로 묶는다. 칠성님에게 갔다가 다시 수명을 받아 이 세상에 오라는 뜻이 담겨 있다. 민간에서 ‘그 사람 칠성판을 졌다’고 하면 곧 죽었다는 말이다. 민담에 의하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영혼의 형태로 칠성님에게 불려 간다.
장독대 정화수
“저기를 보아라. 뒤뜰 장독대에서 누군가가 간절히 빌고 있다.”
새로 태어날 사람이 칠성님이 가리키는 곳을 내려 본다. 할머니가 정화수를 떠 놓고 열심히 자손을 빌고 있다. 칠성님에게 꼭 옥동자를 점지해 달라는 것이다.
“저 소리는 네가 세상에 태어나게 해 달라는 소리다. 세상에 나가겠느냐?”
“세상에 보내주기만 하십시오.”
그때 칠성님 옆에 있던 삼신할머니가 냅다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때려 내려보낸다. 아이는 궁둥이에 삼신할머니에게 맞아 생긴 푸른 반점을 띠고, 울면서 세상에 나온다. 몽골리안에게만 있는 ‘몽고반점(몽고점)’이다.
조선시대 어머니들도 새벽 일찍이 우물에서 길어온 맑은 물을 뒤뜰 장독대에 올려놓고 신에게 정성껏 빌었다. ‘정화수(井華水)’라고 불렀다. 장독대는 원래 신성한 공간이다. 모든 식구가 먹을 장을 두는 곳이기에 가장 소중하게 다뤄진 공간이다. 이곳에 정화수를 놓고 기도하는 것은 어머니들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어떤 신을 모시고 소망을 빌었을까? 아이를 원하거나 수명을 빌거나 복을 비는 것도 다 칠성님의 주관이니 신앙의 대상은 주로 칠성님이었다. 또한 정화수에 하늘의 별이 비치기 때문에 칠성신의 신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칠성님의 점지로 이 세상에 태어나면 큰 인물이 된다. 대표적 인물이 김유신이다. 등에 북두칠성의 무늬가 있었다. 강감찬도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북두칠성 몸통에서부터 네 번째 별자리가 문곡성(文曲星)인데, 이 별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고 해서 그 집터를 ‘낙성대(落星臺)’라고 부른다. 문곡성이 떨어진 자리라는 것이다. 안중근도 가슴에 흑점 7개가 있었다. 별명이 ‘응칠(應七)’이었으니 곧 칠성님이 감응해서 태어났다는 말이다.
삼국시대 북두칠성 유적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남아 있다. 중국 집안 장천1호분 천장돌에는 해, 달과 함께 북두칠성이 2점 그려져 있고, 북한 강서구역 덕흥리 고분벽화에도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다. 집안의 무용총이나 각저총에도 북두칠성이 나타나 있다.
윷놀이와 윷점
한민족의 북두칠성 사랑은 끝내 놀이로도 등장했다. 그러나 단순히 노는 목적으로 쓰였던 것만 아니다.
전남 진도의 장례식에서는 씻김굿과 함께 윷놀이를 했다. 칠성님에게 잘 돌아갔다가 수명을 타 가지고 다시 오라는 소망을 담은 놀이였다. 장례식장마다 윷놀이를 했다고 기록돼 있지만 지금은 그 연속성이 끊어졌다.
민간에서는 정월달에 가족들과 함께 윷놀이를 한다. 칠성님에게 수명을 받아 오래 살고 복도 받고 재물도 얻으라는 기원을 담은 놀이였다. 윷놀이의 말판 쓰는 법도 북두칠성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듯이 쓴다. 철저하게 북두칠성의 운행을 따라 하는 것이다. 이 정월달 윷놀이도 초하루부터 정월 대보름까지만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축원과 기원의 의미가 반감되기 때문이다.
정월에는 윷점을 치기도 했다. 윷을 세 차례 던져 상괘/중괘/하괘로 해 111~444까지 64괘로 돼 있는 점괘를 뽑아 운수를 보는 것이다. 이때 도는 1, 개는 2, 걸은 3, 윷과 모는 4로 놓는다. 64괘의 점괘 풀이가 지금도 전하고 있지만, 이제 윷점을 치는 지역은 없을 것이다.
절집에 들어오다
동아시아 고대사상은 삼재(三災)사상이다. 천·지·인이 우주 만물의 근본이 된다는 것이다. 이 삼재사상에 신관을 대입시키면 천신·지신·인신이 된다. 한민족은 유목 생활 때부터 오랫동안 믿어온 칠성님을 천신으로 모셨다. 한반도를 내려와 정착, 농경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타난 산신신앙을 지신으로 했다. 인(人)은 천지간에 있는 모든 생명을 의미한다. 생명체는 물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인신은 용왕으로 했다. 용왕은 수신이자 비를 주관해서 농경 생활에 절대적이었다. 곧, 칠성·산신·용왕이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신성시해 온 뿌리 신앙이자 민간신앙이었다. 무속은 우리 문화의 원형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기에 아직도 만신들은 철저하게 이 세 신을 섬긴다.
산속 신당에는 산신각과 용왕각이 필수로 있다. 칠성님은 잘 안 보이는 것 같지만 자신들의 신당에는 꼭 모신다. 바로 명두(明斗)를 신당에 걸어 놓는 것이다. 약간 우묵하게 파인 둥근 금속 안쪽에 북두칠성 일곱 별이 새겨져 있다. 반짝반짝하게 닦아서 한 개를 걸기도 하고, 7개를 한 세트로 걸기도 한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북두칠성을 밝힌다는 뜻이다. 어느 신당에 가도 명두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 후기까지도 이 3신은 절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1800년 정조가 죽고 난 후 안동 김씨 문중에 권력이 집중되면서 매관매직이 성행하자 백성들의 삶은 몹시 피폐해졌다. 절집도 살림살이가 어려워졌다. 그 타개책으로 민간과 무속에서 중요하게 받들던 세 신의 전각이 절집에 등장하게 됐다. 칠성각, 산신각, 용왕각이다.
원래 신단은 자연 신단에서 출발한다. 자연환경이 좋은 곳을 택해 신을 모시다가 흙으로 토단을 닦고 신단으로 삼는다. 그다음에 집이 들어서면 당(堂)이 되고, 당의 격이 높아지면 각(閣)이 된다. 각보다 높은 집이 전(殿)이다. 절집에 들어올 때도 같은 경로를 밟았다. 칠성단, 산신단, 용왕단이었다가 칠성각, 산신각, 용왕각으로 발전했다. 그러한 유적들이 전국 사찰에 남아 있다. 칠성단이라는 각자도 있고, 산신의 위패를 비석이나 바위에 새긴 곳도 많이 남아 있다. 용왕각은 후일 독성각으로 대체되며 많이 없어졌지만, 아직도 명맥을 지키고 있는 사찰들도 있다.
중국은 우리 민족과 달리 북극성을 받들었다. 한족은 정착·농경 문화였기 때문에 유목민족처럼 크게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북두칠성보다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북극성을 중요하게 모셨다. 북극성을 ‘자미대제’라고 칭하고, 모든 별을 통솔한다고 믿었다. 이 자미대제가 불교에 흡수돼 치성광여래가 됐다. 도교에서 칠원성군이라 부르는 북두칠성도 7여래로 이름을 바꿔 나타났다.
중국에서 시작된 치성광여래도는 도교의 칠원성군과 불교화된 7여래를 다 그려 넣었다. 물론 주존불은 치성광여래다. 고려시대에도 중국의 영향으로 치성광여래도가 그려졌지만, 크게 유행하지는 않았고, 조선시대에도 절집에서 중요하게 받들지는 않았다. 앞서 말한 대로 1800년 이후에 민간신앙이 본격적으로 절집에 들어오면서 칠성각, 산신각, 용왕각이 세워졌지만, 주존불이 치성광여래인데도 우리는 칠성각이라고 부른다. 한민족에게는 칠성님이 가장 중요한 천신으로 믿어져 왔기 때문이다.
간혹 북극전이나 금륜전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곳도 있지만 지극히 소수다. 칠성각에서 기도할 때도 주존불인 치성광여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칠원성군’을 부른다. 그만큼 북두칠성 신앙은 북방 유목민족의 중요한 신이었고, 한민족도 그 전통을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2022)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