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로 옮기다
강화도 강화읍 고려산 중턱에 있는 ‘강화 홍릉’은 고려 제23대 고종(高宗, 1192~1259)의 왕릉이다. 안내판 없이는 임금의 능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초라한 규모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금속활자기술,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고려청자, 세계기록유산이자 국보인 팔만대장경 등 화려한 고려시대 문화를 떠올려보면 홍릉의 규모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게다가 고려의 수도 개경 부근이 아닌 강화도에 무슨 연유로 고려 임금의 능이 있는 것일까? 800년 전 고려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누구를 위한 천도였나?
1231년(고종 18) 8월 몽골의 살리타[撒禮塔]가 이끄는 몽골군은 고려 내 친몽세력(親蒙勢力)인 홍복원(洪福源, 1206~1258)을 앞세워 고려를 침략했다. 고려 국경 지역인 북계(北界, 현 평안도 일대)의 여러 성이 삽시간에 함락됐고, 귀주성(龜州城, 현 평안북도 구성시)과 자주성(慈州城, 현 평안남도 순천군)만이 항전을 이어 나갔다. 몽골군은 이들 성을 포위하고 본대는 빠르게 수도 개경으로 향했다. 고려는 삼군을 동원해 막으려 했으나, 연이어 몽골군에게 패배하면서 순식간에 개경까지 압박받았다. 결국 12월 몽골과 화친을 맺었고, 몽골군은 북계 지역에 다루가치[達魯花赤, 점령지 파견 관리] 72명을 배치하고 철수했다.
고려는 1170년(명종 1) 정중부(鄭仲夫, 1106~1179) 등에 의한 무신정변 이후 100여 년간 무신정권 시대를 맞이했다. 정중부에 이어 경대승(慶大升, 1154~1183), 이의민(李義旼, ?~1196)으로 이어진 무신 권력은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이 집권한 이래로 최우(崔瑀, ?~1249), 최항(崔沆, ?~1257), 최의(崔竩, ?~1258)까지 최씨 4대가 60여 년간 집권했다. 1231년 몽골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는 최충헌의 아들 최우 집권기였다.
몽골군이 철수하자 최우는 대몽항전을 위해 강화도로 수도를 천도할 것을 결정하고 서둘러 천도를 감행한다.
왕이 수도 개경(開京)에서 출발하여 승천부(昇天府, 현 개성 개풍군)에 머물렀다. 다음 날 강화도의 객관에 들어갔다. 이때 장마가 열흘이나 계속되어 흙탕물이 정강이까지 차고, 사람과 말이 엎어지고 넘어졌다. 고위 관리와 양가의 부녀자 중에 심지어 맨발로 지고 이고 가는 사람까지 있었다. 의지할 곳 없이 울부짖는 백성들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위 내용은 『고려사절요』에 묘사된 강화도 천도 모습이다. 강화도 천도가 결정된 것이 1232년(고종 19) 6월 중순이었는데, 채 한 달이 되기도 전에 실행하면서 장맛비에 아수라장이 된 풍경을 기록한 것이다. 제대로 준비도 되지 않은 채 다급하게 천도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천도 논의과정을 살펴보자. 몽골이 철군한 이후 몽골 침략에 대한 방어책의 논의는 1232년 2월부터 수차례에 걸쳐 진행됐지만, 쉽게 결정 나지 않았다. 최우는 강화도 천도를 원했지만 대신들 대부분이 ‘개경을 지키고 적을 막자’라는 의견을 냈기 때문이다. 당시 최우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정무(鄭畝)와 태집성(太集成)만이 천도를 주장했다. 거듭된 논의에도 결론이 나지 않자 6월 최우는 자기 집으로 대신들을 불렀는데 이는 강화천도를 반대하는 대신들에게는 상당한 압박이 됐다. 그럼에도 대신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이때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 김세충(金世沖, ?~1232)이 회의장에 뛰어들어 천도론에 반대 입장을 내세웠다가 최우에게 죽임을 당하자 더 이상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많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우가 강화도 천도를 주장하고 실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몽골의 1차 침략 당시 고려에서 일어난 두 가지 사건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친몽세력인 홍복원의 존재다. 홍복원은 몽골의 고려침략 앞잡이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1231년 12월 몽골과 화친을 맺기 위해 고려 국왕과 만나는 자리에 몽골 사신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홍복원의 행보에 당시 집권자였던 최우는 자기 권력에 위협이 될 존재로 여겼다.
1232년 9월 몽골의 2차 침략 당시 살리타가 처인성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몽골군이 철군했다. 이때 북계 지역에 남아 있던 친몽세력인 홍복원 일당이 반란을 일으켰다. 최우는 홍복원 등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사병 3,000명과 북계병마사 민희(閔曦)를 보냈지만, 홍복원이 몽골로 도망가면서 실패했다. 당시 최우는 강화도를 방어하는 일 외에는 자기 사병을 동원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홍복원을 제거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자기 사병을 보낸 것이다. 그만큼 홍복원의 존재를 눈엣가시로 판단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자주성에서 몽골군에게 끝까지 항전했던 최춘명(崔椿命, ?~1250) 사건이다. 자주성은 북계에서 귀주성과 함께 최후까지 몽골에 항전한 곳이었다. 하지만 몽골과 화친 이후에도 항전을 이어 나가자 최우는 측근인 태집성과 몽골 관원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이에 최춘명은 조정에서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는데 어찌 믿고 항복하겠느냐며 오히려 활을 쏘아 쫓아냈다. 태집성은 이에 앙심을 품고 돌아갔고, 살리타는 최춘명을 죽이라고 했다. 이후 왕과 대신들이 최춘명의 형벌을 감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수모를 당했던 태집성은 최우를 찾아가 그를 반드시 죽이라 청했고, 최우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춘명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최우가 내시(內侍) 이백전(李白全)을 보내 최춘명을 죽이려 했는데 함께 있던 몽골 관인이 “이는 어떤 사람이오?”라고 물었고 이백전이 “자주(慈州)를 지켰던 자입니다”라고 답하자 “이 사람이 우리에게는 역명(逆命)했으나, 그대의 나라에 있어서는 충신이니 나라면 죽이지 않을 것이오. 그대들이 이미 우리와 화친을 약속하였으니, 성을 온전히 지킨 충신을 죽이는 것이 옳겠소?”라고 하며 오히려 그를 석방할 것을 청해, 최춘명은 목숨을 건졌다. 최우는 임금과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무시했던 최춘명을 죽이려 했는데, 몽골의 관인에 의해 그 뜻이 좌절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서 보듯이 최우는 몽골과의 화친, 친몽세력의 등장이 자신의 권력 유지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결국 그는 임금과 대신들의 반대에도 대몽항전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강화도 천도를 단행했고, 그렇게 고려 강도시대(江都時代)가 개막한 것이다.
사람과 잣나무 중에 뭐가 더 중한가!
강화도는 개경과 가깝고, 고려 정부는 예로부터 바닷길을 이용해 세금을 거둬들였기 때문에 강도(江都)정부가 지방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 좋은 조건이었다. 게다가 몽골군은 해전에 익숙지 않아 항전을 위한 최적의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본토였다. 최우는 몽골의 침략에 대비해 강도의 내외성을 쌓아 방어를 철저히 하면서도 각 지방에는 섬과 산성으로 들어가 몽골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명만을 내렸다. 사실상 본토에 대한 대비는 각 지방에서 스스로 지키라는 것이었다. 몽골이 개경환도(開京還都)를 요구하며 30여 년간 10여 차례 침략해 왔을 때 강도정부는 소극적인 외교 정책으로 대응했을 뿐 본토에 군대를 파견한 사례가 거의 없었다.
강화도로 천도 후 강도정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궁궐을 짓는 것이었다. 1232년 7월 2영(二領)의 군대를 동원해 강화도에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재차 몽골군이 침입해오면서 궁궐 건설은 잠시 중단됐다가, 1234년(고종 20) 2월 각 도에서 백성들을 징발해 궁궐과 관아를 지었다. 신하 차척(車倜)의 집을 봉은사로 삼고 민가를 철거해 왕이 행차하는 길을 넓혔다. 궁전과 절의 이름은 개경의 것을 따랐으며, 팔관회(八關會), 연등회(燃燈會) 등은 옛 법식을 따르며 강화도는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몽골군의 침략에 유린당한 본토에 대한 재건과 방비에 힘쓰기보다 백성들을 징발해 궁궐을 짓는 강도정부의 행태는 민심을 얻기 어려웠다.
게다가 대몽항전을 명분으로 강화도 천도를 주장했던 최우는 오히려 사치와 향락을 즐길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원을 꾸미기 위해 본토에 있는 잣나무를 뽑아 옮겨 심게 했는데 그때 혹한이 닥쳐 인부 중에 얼어 죽는 사람이 생겼고, 그 길옆에 사는 사람들은 집을 버리고 산에 올라 노역을 피했다. 어떤 사람이 승평문(昇平門, 고려 왕궁 정문)에 방을 붙였는데 “사람과 잣나무 중에 뭐가 더 소중한가?”라고 했다. 다음 『고려사』의 기록을 보자.
1245년(고종 32) 5월 종실과 고위직 관료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산처럼 높은 무대를 설치하고 비단장막과 능라휘장을 둘러치고, 그 가운데에 그네를 매달아 놓고 수놓은 비단과 화려한 조화로 장식하였다. 큰 화분 4개를 설치하여 그 안에 산봉우리처럼 얼음을 담았으며, 화분에다 은테를 두르고 나전으로 장식하였다. 큰 항아리 4개에는 이름난 꽃 10여 종류를 꽂아서 보는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켰다. 그리고 기악과 온갖 잡회를 연출시켰는데 팔방상(八坊廂, 고려시대 음악을 담당하던 기관) 공인 1,350여 명이 모두 옷을 차려입고 정원으로 들어와서 음악을 연주하니, 각종 악기와 노랫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최우는 팔방상들에게 각기 백금(白金) 3근씩 주었으며, 영관(伶官)들과 양부(兩部)의 기녀(伎女) 및 재인(才人)들에게 금과 비단을 주었는데, 그 비용이 엄청났다.
몽골 침략 이전 고려사회는 무신정권기 지배층의 수탈로 인해 많은 백성이 스스로 도적이 되거나, 정권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고려사회의 내적 모순들이 만연해 있었다. 이러한 고려사회의 문제는 초기 몽골 침략 시에 잠시 봉합되기도 했다. 몽골 침략의 소식을 들은 초적(草賊) 집단이 5,000명을 이끌고 최우에게 귀순해와서 대몽항전에 나서겠다고 제안하는 등 국가의 위기 상황을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단결해 함께 극복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화도 천도 이후 최씨정권은 국가를 지키기 위한 체제는 갖추지 못하면서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지방사회에 대한 수탈만 더욱 가혹해졌고 최씨정권에 대한 반감은 더욱 거세졌다. 거기에 수시로 몽골의 침략을 받으면서 본토 백성들은 이중고에 시달리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사회는 중앙정부의 도움 없이 수차례 몽골군의 침략에 끈질긴 항전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1254년(고종 41) 몽골군의 재침략에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최씨정권의 몰락과 개경환도
이때 몽골군은 대규모 군대를 보냈는데 당시 기록에 따르면 몽골군에게 잡혀간 남녀가 무려 20여 만 명이고, 살육을 당한 사람은 이루 셀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들이 지나간 고을은 다 잿더미로 변했으며, 몽골 침략 이후 이보다 심한 적은 없었다고 전한다. 게다가 1255년(고종 42) 8월부터 15개월여 동안 고려에 주둔하면서 강화도를 포위하고 직접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강도정부는 본토와의 바닷길이 끊겨 관리의 봉급을 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강화도의 토지로 대신 지급하는 등 재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궁지에 몰리게 됐다. 이 같은 총체적 난국 속에서 4대째 이어오던 최씨정권도 당시 집권자였던 최의가 1258년(고종 45) 김준(金俊, ?~1268) 등의 무리에게 살해당하면서 종언을 고했다. 최씨정권의 몰락은 더 이상 강도시대를 유지할 동력이 상실했음을 의미했고, 결국 12년 뒤인 1270년(원종 11) 몽골의 요구에 따라 강화도의 왕궁과 성을 모두 파괴하고 개경으로 되돌아왔다.
강도시대 38년은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몽골을 상대로 고려가 쉽게 굴복하지 않고, 위대한 대몽항전을 이어갔던 시기였다. 그러나 강화도에 거주했던 지배층과 일반 백성들의 대몽항전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지배층은 자기 안위만을 살피며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동안 일반 백성들은 섬과 산성으로 들어가 목숨을 걸고 항전을 이어 나가야 하는 선택을 강요받은 것이다. 국가의 위기 속에서 지배층과 백성들이 모두 힘을 합쳐 항전하지 못한 결과, 고려는 약 100년간 실질적인 몽골 지배하에 놓이게 됐다.
사진. 유동영
김경표
경기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 사학과에서 「최씨정권의 강화천도와 대몽항전 성격」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수원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수원 지역사 연구와 다양한 특별기획전 개최, 유물 수집과 관리 등을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