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와 건축으로 본 장경판전
한국의 많은 목조건물은 봄 산불, 겨울 실화, 전란 등에 의해 온전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예가 드물다. 해인사도 그중에 하나다. 지금 해인사를 보면 모든 전각이 다 새것이다. 그만큼 화재가 여러 번 있었고, 남아 있는 전각이 없다는 것은 때마다 큰불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숙종 21년(1695)에 실화로 동우제료, 만월당, 원음 등의 건물이 불타서 없어졌고, 불과 그다음 해에 또 불이 나서 서우제료와 무설전 등의 전각이 타버렸다. 영조 때도 불이 두 번이나 난다. 그리고 정조 4년(1780)에 한 번, 순조 17년(1817)에는 아예 전각의 태반이 불에 타 없어졌다. 고종 8년(1871)에 난 불은 법성료를 태웠다. 물론 여기에 언급된 전각들은 지금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이 불들로 해인사의 전각들은 다 새것이 됐다. 해인사가 법보사찰의 깊은 맛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불의 원인은 대부분 실화다. 작은 불을 잘못 다루다가 큰불로 옮겨갔다. 인간의 실수를 두고 왜 그렇게 됐느냐고 이유를 따지는 것은 쓸모없다. 하지만 이렇게 잦은 불로 모든 것들이 싹 타버렸는데, 장경판전만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다. 아울러 목재로 된 대장경판이 어떻게 오랜 세월 동안 뒤틀리지 않고 썩지도 않으면서 보관될 수 있었는지도 살펴볼 만한 문제가 된다.
우리가 지금 이 문제를 살펴야 하는 것은 옛 과학의 우수성을 밝힌다기보다는,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를 만든 근대의 과학기술이 인간과 자연을 돕지 못하고 오히려 해가 되는 시점에서, 서구인식론을 바탕으로 한 과학기술의 파괴성을 넘어서기 위해서다.
해인사의 세 가지 바람길
먼저 장경판전이 언제 지어졌는지부터 살펴보자. 화엄종찰인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었다. 아마 처음 지었던 당시에 장경판전은 없었던 걸로 짐작한다. 그 후 의상을 효시로 하는 신라 화엄학이 남악과 북악으로 갈리면서 정치적 입장도 갈라진다. 남악을 대표하는 관혜는 화엄사를 근거로, 북악을 대표하는 희랑은 부석사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남악은 견훤을 도왔고 북악은 왕건을 도왔는데, 왕건은 이 고마움을 잊지 않고 930년 해인사를 지원해 크게 불사를 일으킨다.
<해인사장인경발문>을 보면 이때 대장경 인쇄본을 보관하는 고탑(古塔)을 다시 지었다는 기사가 나오는 걸로 봐서, 적어도 인쇄본을 보관하는 건물이 지금 자리, 아니면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이때의 대장경 인쇄본이 어느 대장경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지기 전의 일이고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기 6년 전의 일이다.
옛 동아시아에서 대장경의 간행과 국력은 비례한다. 지금은 어디서 우주왕복선을 개발하고 첨단의 기술력을 가졌는지가 국력의 우위를 말해주지만, 당시에는 보유하고 있는 대장경의 수준이 그 나라의 국력을 증명했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전쟁의 기술보다 더 중요했다고 짐작되고, 어쩌면 그 자체로 전쟁의 기술이었다.
초조대장경이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고, 고종 24년(1237)부터 38년(1251)까지 16년 동안 재조(고려)대장경이 완성된다. 이 목판은 강화도 선원사에 있다가 조선 태조 7년(1398) 한양을 거쳐 해인사로 이운(移運)된다. 물론 이전에 장경판전을 어떤 규모로든 준비했을 것으로 보인다. 장경판전이 언제 건립됐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최초 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1491년 조위가 쓴 「해인사중창기」에 “세조 3년(1457)에 신미와 학조가 시찰 결과를 국왕에게 보고한 뒤 왕명으로 확장하여 건립하였다”로 전한다. 그러나 앞서 살폈듯이 장경판전은 조선 태조 때부터 있었다.
그러면 이제부터 유달리 화재가 많았는데도 장경판전만 타지 않았던 까닭에 대해서 짐작해 보자.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지금 우리는 여러 과학적 자료들을 모아 볼 수 있겠지만, 장경판전이 지어졌던 당시의 과학을 들어 살피는 게 좀 더 타당하다. 여기서 말하는 당대의 과학이란 마땅히 풍수지리를 말한다.
한민족은 구들과 마루라는 북방식 가옥과 남방식 가옥의 형태를 절묘하게 융합한 주거를 발달시켜 왔다. 구들은 아궁이와 굴뚝과 방바닥 밑으로 불의 길인 고래를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목조 가구식 구조이다 보니 화재에 취약하다. 그리고 이 화재는 바람길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해인사에는 세 가지 바람길이 있다. 하나는 산에서 아래로 부는 바람길이고, 둘째는 산 아래에서 위로 밀고 올라오는 바람길, 셋째는 서쪽 개울의 바람길이 경내로, 즉 서쪽에서 동쪽으로 밀려온다. 산 아래와 위에서 생기는 바람길은 그렇게 특별할 게 없다. 이 정도 바람은 특별한 장애물이 없는 한 지붕을 타고 넘어간다. 그러나 개울에서 경내로 부는 가로바람은 정상적인 아래위의 바람길을 휘저어서 바람을 지면으로 눌러 돌개바람을 만든다. 조용한 가운데 갑자기 불어오다가 금방 사라지기도 한다.
이 같은 바람은 아궁이의 불을 갑자기 돌게 만든다. 아궁이에서 굴뚝으로 향하던 불길이 한순간 아궁이 밖으로 혀를 내민다. 불을 때는 아궁이 주위에는 불쏘시개용 검불이나 잡다한 인화성 물질이 많다. 아무리 이런 것들을 깨끗이 정돈한다고 하더라도 갑작스러운 바람은 이 모든 것들을 어지를 수 있다. 이럴 때 아궁이에서 튄 불똥은 바닥의 인화성 물질들에 옮겨 큰 화재로 번질 수 있다. 모든 정리가 다 된 것을 확인하고 자리를 뜬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라 어쩔 도리가 없다. 이것이 해인사에서 화재가 자주 나고 그것이 큰 화재로 연결되는 이유다.
그렇다면 어째서 해인사 같은 위험한 바람이 부는 곳에 그 어마어마한 대장경을 보관할 생각을 했을까? 어이없이 들리겠지만 바로 이 바람이야말로 대장경판을 그토록 오랫동안 손상 없이 유지해 준 고마운 바람이다. 화재를 불러오는 바람이지만 그 바람이 대장경판을 지켜준 일등 공신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장경판전이 불에 타지 말아야 한다. 이 어려운 난제를 푸는 데 사용한 방정식이 바로 비보풍수다. 장경판전과 그 주변에는 일절 불을 사용하지 않는다. 어디서 옮겨붙지 않는 한 장경판전에서 불이 날 이유는 일단 없다.
해인사의 형국론
해인사의 형국론(形局論, 사물에 빗대 땅의 성격을 읽음)은 풍수학계의 오랜 논쟁거리였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라는 설과 연꽃의 중심이라는 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해인사는 해인사 주변만을 보면 연꽃의 중심설이 맞고, 더 넓혀서 법수사지 아래쪽에 펼쳐진 옹기종기한 들판까지 보면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맞다. 비 오는 날 이 들판의 산들은 갇혀 섬같이 보인다. 두 가지 설이 지리적으로 겹쳐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바다를 항해하는 배의 돛이 연꽃 중심에 다시 들어앉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해인사는 크고 작은 섬들이 있는 호수 같은 바다에 떠 있는 연꽃이다. 그 증거가 장경판전의 자리다.
장경판전의 자리는 서쪽의 백호에서 혀를 내민 듯이 동쪽의 청룡 쪽으로 뻗어 있다. 원래 그 지세는 지금도 볼 수 있듯이 장경판전 서쪽에 쌓은 축대로 미루어 서쪽이 높고 동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모양이다. 그 자리를 고르고 장경판전을 앉혔다. 따라서 장경판전은 대적광전보다 훨씬 높은 곳에 솟아 있다. 보통의 가람배치라면 배산임수의 배치를 고려하더라도 이렇게 솟아오르듯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그로 인해 장경판전의 지형은 아래쪽에서 산지의 경사를 타고 위쪽으로 번져오는 불길을 효과적으로 방어한다. 서쪽의 물길에서 생기는 바람이 동쪽으로 스미면서 아래쪽에서 돌개바람을 만드는 바람이 대적광전과 장경판전 사이에서는 불길을 돌리는 바람이 되는 것이다. 이 기류는 보통 때보다 오히려 불이 났을 때 더 확연할 것이다. 같은 바람이, 지형의 차이에 따라 만들어내는 다른 기류가 장경판전을 수백 년 동안 해인사의 잦은 화재에서 지켜낸 것이다. 흔히 남산의 화기가 해인사에 잦은 불을 낸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오해다. 오히려 잦은 화재를 경계하기 위해 남산을 화기로 여겼다는 설명이 맞다. 최창조 교수의 말마따나 남산을 일종의 불조심 표어처럼 삼은 것이다.
이 바람은 불만 막은 것이 아니다. 팔만대장경을 수백 년 세월 동안 심한 손상 없이 지켜낸 것도 이 바람이다. 장경판전은 남쪽에 수다라장, 북쪽에 법보전, 그리고 동서에 사간판고를 배치해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짧은 마당을 판고가 둘러싸고 있다. 장경판전의 설계자는 어떤 경우라도 바람이 직접 판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야무지게 막았다.
남쪽의 수다라장 앞으로 담을 쌓아서, 북쪽의 높은 지형을 이용해서 일단 남북의 바람을 막았다. 바람은 백호에서 청룡으로 부는 바람만 장경판전 주위를 흐른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바람은 법보전과 북쪽 산지 사이로, 수다라장과 담장 사이로 흐르며 유체역학적으로 판고 안의 습기를 빼낸다. 이 과정에서 수다라장의 남쪽 벽면에서는 시계방향으로 위쪽 작은 살창을 통해 공기가 빠져나가고 아래 넓은 살창으로 공기가 유입되면서 원운동을 하게 된다(이 운동을 위해 서가는 남쪽 벽면에서 일정 거리로 떨어져 있다).
반대로 북쪽 벽면에서는 마당의 정적인 대기와 벽면에 바짝 붙은 서가로 인해 반시계 방향으로 움직인다. 법보전은 이 상황을 역으로 생각하면 된다. 또한 경판의 손잡이 역할을 하는 마구리와 마구리가 만나 생기는 작은 틈은 경판 사이사이의 습기를 위쪽으로 촘촘하게 빼낸다. 그리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막기 위해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 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했다.
이것으로 대장경판의 오랜 유지가 다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목판 제작에 쏟은 시간과 노력이 있었다. 대장경판의 재료에는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가장 많이 쓰였고, 그 외에 거제수나무, 층층나무, 고로쇠나무, 후박나무, 사시나무 등이 쓰였다. 이 나무들을 벌채 후 일 년 정도 산에 내버려 두어, 저절로 진이 빠지고 나무의 겉과 속의 수분 차이도 없앴다. 그다음 작업하기 쉽게 판재로 켜서 바닷물에 3년간 담그고 소금물에 쪄서 말렸다. 그러고 나서야 글자를 새기는 작업을 했다. 글자를 다 새기면 벌레와 습기를 막기 위해 경판에 옻칠을 했다. 이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장경판전만으로는 그 유지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장경판전을 세울 때 보관할 대상의 재질에 대한 속성을 정확히 알고 처리 방법을 강구했다. 또 그것을 보관하는 하드웨어로서의 건축에 대해서는 습도 유지를 위해, 풍수지리에 기반한 유체역학을 이용했다. 그렇게 600년 동안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화재에 대한 사용자들의 주의를 높이기 위해 남쪽에 위치한 매화산(남산제일봉)을 화기로 보는 풍수지리의 형국론을 적용했다.
팔만대장경은 유네스코가 지정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동북아시아의 보물이었고, 전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이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아직도 단오날에 해인사의 스님들은 남산에 올라 화기를 억누르는 소금 묻기 행사를 한다.
사진. 유동영
함성호
건축실험집단 <EON>대표. 1990년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시를 발표했다. 시집으로 『56억 7천만 년의 고독』, 『성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키르티무카』, 『타지 않는 혀』 등을 냈고 건축평론집으로 『건축의 스트레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 『사라진 서울을 걷다』 등을 출간했다. 그 외에도 티베트 기행산문집 『허무의 기록』과 만화비평집 『만화당 인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