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남원 만인의총과 선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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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남원 만인의총과 선원사
  • 노승대
  • 승인 2022.10.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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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누구나 춘향이와 이도령일 것이다. 광한루도 빼놓을 수 없다. 판소리 <춘향가>도 저절로 생각나니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사랑이로구나, 내 사랑이야.” 누구나 다 한 번씩은 입속으로 되뇌어 봤을 것이다. 그러나 남원에는 민족 역사에서 잊지 못할 장소가 한 곳 있으니 바로 만인의총(萬人義塚)이다. 정유재란(1597) 당시 의롭게 죽은 만여 명의 무덤이다.

임진왜란(1592)이 발발한 지 5년 후 다시 전쟁이 터지자 왜군은 전쟁 초기의 실패가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점이라 생각하고 일단 전라도를 점령한 후 북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왜군은 두 갈래로 나누어 한 부대는 하동-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오고 한 부대는 합천-거창-안의를 거쳐 육십령 아래 황석산성을 넘어 남원에 집결키로 했다.

8월 12일 이미 왜군이 둘러싼 남원성을 전라도 병마절도사(지금의 전라도 육군사령관) 이복남이 수백 명 군사를 이끌고 군악을 울리며 보무도 당당히 남원성으로 들어갔다. 왜군도 이들의 드높은 기개에 멀뚱히 바라만 보았다. 이복남이 누구인가? 왜군의 전라도 1차 침입 때 혈전의 혈전을 거듭한 웅치전투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용장 아닌가?

남원성을 에워싼 왜군은 46,700명. 허나 남원성에는 양원의 명나라 기병 3,000명과 조선군 1,000명, 일반백성 6,000명이 버티고 있었다. 8월 13일부터 시작된 전투는 8월 16일에야 끝났다. 이복남을 비롯해 접반사 정기원, 광양현감 이춘원, 조방장 김경로, 방어사 오응정, 남원부사 김현, 교룡산성 별장 신호 등과 명나라 병사도 전멸했다. 끝까지 항쟁하던 관군과 백성들은 왜군에게 모두 도륙당했다. 큰소리치던 양원은 50기의 기병을 데리고 도망쳤다.

애초에 조선군은 남원성 북쪽의 교룡산성에 진을 치고 왜군을 막고자 했다. 교룡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공격하기는 어렵고 방어하기는 쉬운 곳인데, 기병을 거느린 명나라 장수 양원이 벌판이 전쟁에 유리하다며 남원성에 진을 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도망친 양원은 명나라 사령관 양호에게 도주의 죄로 참수돼 남대문에 효수됐다.

전쟁이 끝나고 성에 들어온 백성들은 모든 유골을 수습해 성안에 하나의 봉분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고 1675년 성안에서 성 밖 동충동으로 이전했다. 일제 강점기에 철도가 놓이면서 남원성의 서문과 북문이 성벽과 함께 헐리고 남원역이 들어서며 만인의총도 외진 곳이 됐다. 그나마도 일제는 제단을 파괴하고 재산을 압수했으며 제사마저도 금지했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해 너무 초라한 모습을 보고 이전 검토를 지시했으며 다음 해인 1964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고 정화사업을 하게 됐다.

 

만인의총 봉분과 비석. 금산의 칠백의총과 더불어 조선 관군과 백성의 의기를 떨친 유적이다. 누구나 한 줌의 재로 돌아가지만 그 의기는 영원하지 않은가.

 

남원성을 에워싼 왜군 배치도. 이복남의 셋째 아들 이성현은 포로가 되어 일본에 살게 되고 그의 10대손인 이가정문이 가고시마겐 도서관에서 찾은 자료.

 

기념관에는 이복남 장군이 수하 장졸을 거느리고 왜군이 둘러싼 남원성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의롭게 죽을 곳을 찾아가는 길이다.

 

8충신 사적비는 고종 9년(1872) 남원부사 이병석이 글을 짓고 세웠다. 충열사를 세운 내력과 변화를 연대순으로 기록해 놓았다. 1964년에 옮겨왔다.

 

예조참판 정기원은 명나라 장수 양원을 접대하는 접반사로 따라왔다가 남원에서 순절했다. 선조가 1606년 12월 관직을 추증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만인의총은 전라북도에서 관리하다가 2016년 문화재청 관리로 이관됐다. 그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마지막 붉은 충정, 배롱나무에도 어렸다.

 

충렬사는 1612년에 처음 건립, 제향을 모셔오다 1653년 사액사당이 됐다. 1675년 만인의총 이전 시 따라갔다가 1964년 같이 옮겨왔다.

 

교룡산성 동문 입구의 성벽. 워낙 가파른 지형인데다 높은 성벽을 쌓아 쉽게 공략할 수 없었다. 산성 안에는 99개의 우물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성벽에서 다시 ‘ㄱ’자로 꺾어지면 나타나는 동문의 홍예문. 쉽게 공격할 수 없도록 옹성을 쌓아 동문을 공략하는 적군을 뒤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남원시 주천면 용담사는 고려시대의 유물들을 간직하고 있는 절이다. 탑과 석등과 석불이 일직선상에 있다. 건물 안에 있는 석불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남원 시내의 선원사 칠성각은 1936년에 지은 건물이다. 이는 1800년대에 유행한 칠성신앙이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성행하였음을 말해 준다.

 

칠성각 건물에는 별주부가 산다. 바로 판소리 <수궁가>에 나오는 자라다. 토끼를 등에 태우고 용궁으로 가는지도 모르겠다. 화재방지를 위한 묘책이다.

 

선원사는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타고 다시 지었다. 약사전은 1754년 다시 짓고 철불을 안에 모셨다. 선원사가 망하면 남원도 쇠퇴한다는 전설이 있다.

 

약사전 안에 모셔진 선원사 철조여래좌상(보물)은 전형적인 고려시대 철불이다. 입 부분이 합죽한 것이 그 특징이다. 개금을 해서 금동불처럼 보인다.

 

선원사 명부전의 존상들은 전북 완주군의 위봉사에서 옮겨온 작품들이다. 판관, 녹사, 저승사자까지 다 갖추고 있는 문화재다.

 

동자상들도 몇 구가 남아있다. 들고 있는 책은 대개 선악을 기록하는 장부인데 표지를 읽어보니 <시왕경>이다. 동자들도 시왕에게 잘 보여야 하나?

 

선원사 모과나무는 260년이 된 고목이다. 물론 지정보호수다. 울퉁불퉁한 껍질과 등걸이 오랜 시간을 버텨온 역사를 말해준다. 그 시간들이 아름답다.

 

춘향이 묘다. 물론 실존 인물이 아니니 가묘다. 주천면 구룡계곡 입구에 있다. 1962년에 만들어졌으니 벌써 60년이 됐다.

 

추억의 제무시 트럭을 남원에서 만났다. 미국의 GMC를 일본 발음으로 제무시라 한 것이 시작이다. 1942년부터 생산된 차종으로 그 수명이 놀랍다.

 

10t 이상 나무를 싣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이 차는 6륜 구동 방식이다. 아직도 국내에 100대가 남아 산판길에서 맹활약 중이란다. 제무시 만세!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2022)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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