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당간 강릉 삼척] 범일의 후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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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당간 강릉 삼척] 범일의 후예들
  • 정운 스님
  • 승인 2023.06.27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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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사굴산문闍崛山門
강릉 보현사.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기도 하며, 개청 스님이 지장선원을 열어 범일 스님의 법맥을 이은 곳이다. 대관령 자락에서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사굴산문(闍崛山門)

한국불교사에 구산선문(九山禪門)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 아홉 산문(山門)의 선종 사찰이 개산(開山)된 것을 말한다. 아홉 산문의 사찰을 제외하고도 여러 산문이 열렸는데, 이 산문들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순수하게 선만을 지향한 선사들이 있는가 하면, 선교융합을 꾀한 선사들도 있었다. 사굴산문(闍崛山門, 강릉 굴산사)의 경우 오롯이 선만을 강조했다. 사굴산문의 범일선사는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을 주장했는데, 이 진귀조사설은 한국 선의 대표적 특징이다. 곧 ‘진귀조사가 여래에게 전한 선’으로 여래는 이 조사선을 받아들인 후 가섭에게 전했다. 구산선문 중 고려 중기까지 존속했던 산문은 가지산문(장흥 보림사)·사굴산문·봉림산문(창원 봉림사)·성주산문(보령 성주사)이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광범위하게 고려 말까지 번창했던 산문은 가지산문과 사굴산문이다. 

사굴산문의 개조(開祖) 통효 범일(通曉梵日, 810~889)은 중국에서 발간된 『경덕전등록』 10권에 생애와 사상이 나타나 있다. 또 범일의 제자인 사굴산문의 2조 행적선사도 『경덕전등록』 16권에 기록이 전한다. 당시 사굴산문은 굴산사를 중심으로 그 일대에 범일의 문중을 형성했다. 고성 건봉사에서부터 양양 낙산사, 평창 월정사, 동해 삼화사, 삼척 영은사, 그리고 울진과 평해 지역까지 이른다. 강원도와 경상도 해안 일대까지 사굴산문의 영향이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사굴산문은 역사적으로나 불교사적 위치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신라 말기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영동 지역에 큰 영향을 끼치며 불교라는 테두리로 문화권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조인 범일이 살아생전부터 그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사굴산문의 선풍이 날렸다고 볼 수 있다. 범일의 문하(門下)에는 10철(十哲)이라고 하여 많은 제자가 있었으나, 현재 전기가 전하는 이는 행적, 개청, 신의 등이다. 하지만 범일의 법을 받은 제자로는 개청과 행적뿐이다. 개청은 춘천·홍천·원주 일대에서, 행적은 양양·평창·춘천·홍천·봉화·삼척·울진 등 영동 일대에서 선풍을 전개했다. 한편 사굴산문의 법을 잇지는 않았지만, 동리산문의 경보(慶甫, 869~948)는 도선의 제자인데, 범일에게 찾아와 법을 구했다. 이외에도 당시 선 수행자들이 범일을 찾아와 법을 물었다.

 

사굴산문 스님들

개청(開淸, 835~930)선사는 속성은 김씨로 경주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부터 유학을 공부했으며, 뛰어난 수재로 알려졌다. 출가해 화엄사의 정행(正行)에게 배우고, 강주(康州) 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충청도 금산(錦山)으로 가서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경전을 열람하며 참선한 뒤 스승을 찾아 유력하던 중, 범일의 법력을 듣고 찾아왔다. 개청은 범일 문하에 머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범일로부터 심인(心印)을 받았다. 범일이 입적한 후 사굴산문을 지켰다. 이후 개청선사에게 여러 차례 위험한 상황이 발생해 강릉 보현사(현 지장선원)로 옮겨가 사찰을 중창하고 선풍을 펼쳤다. 개청의 비문에 의하면 “구릉을 깎아 멀리까지 도로를 만들고, 또 전탑을 높이 세우며, 문과 담장을 활짝 여니 멀리서부터 오는 자들이 구름 떼와 같았다”고 한다.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 탑비(보물). 개청 스님이 입적한 후 보현사에 탑과 탑비가 세워졌다. 고려 태조가 ‘낭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낭원대사 탑비의 이수(螭首)와 귀부(龜趺). 비의 꼭대기에 복발(覆鉢)과 보주(寶珠)가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아마도 당시 보현사 지장선원에 수많은 납자가 모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선사는 명주 군수 왕순식과 인연을 맺었고, 스승 범일과는 다르게 경애왕의 초빙에 응해 국사가 됐다. 이후 왕순식의 연결로 고려 태조 왕건과도 인연이 돼 개국에 도움을 줬다. 개청은 세납 96세, 법랍 72세로 보현사에서 입적했다. 비문에서는 선사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미혹한 중생을 제도하고자 지혜의 횃불을 비추었고, 고해(苦海) 중에 자비의 배를 항해하셨다. 선사는 지혜로워 그의 덕력이 무애자재로웠다. 중생의 도사(導師)이며, 모든 이들의 선지식이다.” 

비문 내용을 통해 선사가 당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고려 태조가 ‘낭원대사(朗圓大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 ‘오진(悟眞)’이라고 했다.
행적(行寂, 832~916)선사는 사굴산문의 범일에게 법을 받았으며, 동시에 우리나라에 조동종(曹洞宗) 선사상을 최초로 전한 인물이기도 하다. 행적은 가야산 해인사에서 화엄을 배우고, 문성왕 17년(855)에 복천사(福泉寺)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사굴산문 범일선사를 찾아가 입실을 허락받고, 수년간 공부했다. 이후 행적은 경문왕 10년(870)에 당나라로 건너갔다. 당에 머문 지 얼마 안 돼 황제의 칙명을 받고 입내설법했다. 『경덕전등록』 16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의종(懿宗, 재위 859~873)이 행적선사에게 물었다. 

“멀리서 바다 건너 여기까지 무엇을 하러 왔습니까?”

행적선사가 대답했다.

“소승은 다행히도 상국의 불교에 대해 조금이나마 들었습니다. 이에 도를 찾고자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폐하의 은혜를 받고 불교의 풍속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다행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널리 불적을 돌아보고, 마음 깨치는 구슬을 찾아서 고국으로 돌아가 법을 전하려고 합니다.”

행적선사에게 감화를 받은 황제는 많은 공양물을 올렸다. 이후 행적은 오대산 화엄사에 이르러 문수보살을 예참하고, 당 희종 2년(874) 사천성 성도에 이르러 정중사(淨衆寺)의 무상(無相)대사 영당에 예를 올렸다. 이후 석두계인 석상 경저(石霜慶諸, 807~888)의 문하로 들어갔다. 신라 스님이 석상을 참례한 경우는 행적이 처음이다. 행적은 석상에게서 법을 얻었다. 이후 여러 곳을 행각하며 선지식을 찾아다니다, 고국을 떠난 지 15년 만인 헌강왕 11년(885)에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범일 문하에 잠시 머문 뒤 다시 운수행각을 떠났다. 889년, 범일의 입적에 즈음하여 심인을 전해 받았다. 행적이 삭주(朔州, 현 춘천) 건자난야(建子蘭若)에서 산문을 개산하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즉위한 효공왕이 사신을 보내어 행적을 궁궐로 초청했다. 왕이 선사에게 예를 다하며 귀의하자, 왕에게 나라 다스리는 법에 대해 조언을 해줬다. 고려 태조가 그를 국사로 임명하고, 실제사(實際寺)를 선찰(禪刹)로 하여 이곳에 머물도록 했다. 이후 행적의 여제자 명요(明瑤) 부인이 석남산사(石南山寺)를 선사에게 보시해 머물도록 했다. 이듬해 917년 병이 들어 85세로 석남산사에서 좌탈입망했다. 시호는 낭공(朗空), 탑호는 백월서운(白月棲雲)이다. 이후 경북 봉화 태자사에 탑비를 세웠다. 제자가 5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행적의 선풍이 당시 크게 드날렸다. 행적의 직계 제자로서 법을 이은 선사는 양경(讓景)이다. 양경의 할아버지는 원성왕의 표래손(表來孫, 외가로 5대손을 일컬음)이자 헌강왕의 장인으로 집사시랑(執事侍郞)을, 아버지 순례(詢禮)도 집사함향(執事含香)을 지냈다. 선사는 제자들에게 일심(一心)을 강조했는데, “일심을 잘 지켜라” 혹은 “한 번 지켜서 잃지 말라”고 당부했다.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보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탑비 측면의 글씨. ‘김생지서야(金生之書也)’라는 한자가 보인다.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를 집자해 세웠다.

 

신의(信義)와 석초(釋超)

신의(信義)선사는 문무왕 시절의 인물이라 알려졌으나 생몰년이 불확실하다. ‘두타(頭陀) 신의’라고 불릴 정도로 철저한 두타행자였으며, 평창에 소재한 월정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선사는 자장율사와 신효(信孝)거사에 이어 세 번째로 월정사를 중창불사했다. 이렇게 월정사와 밀접한 것은 사굴산문이 지역의 문수도량인 점과 관련해 연계해 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월정사 기록에 의하면, 자장율사는 당나라에서 돌아온 643년 현 월정사 절터에 초암(草庵)을 짓고 머물면서 문수보살을 친견코자 했다. 자장은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하고, 태백산 정암사에서 입적했다. 이후 신의선사가 이곳에 암자를 짓고 머물다가 입적했다고 한다. 곧 월정사를 중창불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를 통해 월정사에 사굴산문의 선풍이 전개됐을 것으로 추론해 본다.

진관 석초(眞觀釋超, 912~964)선사는 사굴산문 개청의 제자다. 석초는 6세가 되던 918년에 출가해 영암산 여흥선원(麗興禪院) 법원(法圓)에게 사사하고, 923년 법천사(法泉寺) 현권(賢眷)율사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940년 28세에 송나라로 들어가 천태 덕소(법안종 법안 문익의 스승)의 제자인 용책 효영(龍冊曉榮)에게 심인을 얻었다. 석초는 6년 만인 946년, 고려로 돌아와 흥주 숙수선원(宿水禪院, 현 영주 소수서원)에 머물렀다.

고려 광종이 즉위하면서 왕의 배려로 경남 산청 지곡사(智谷寺) 주지를 살면서 법안종 선풍을 펼쳤다. 이후 말년에 5년간 개경 귀산사(龜山寺)와 보제사(普濟寺)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입적했다.

석초가 오래 머물렀던 지곡사는 당시 도량이 큰 절로서 선종(禪宗) 5대 산문 가운데 손꼽히는 대찰이었다. 지곡사가 선종사찰로서 번성할 때는 300여 스님들이 모여 살았으며, 물레방앗간이 12개나 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지곡사지에는 번듯한 탑은 하나도 없고, 내리 저수지 옆과 그 주변에 탑비도 없는 귀부(비석의 받침돌)만 쓸쓸히 남아 있다. 석초와 그의 문도들은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할 때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고려 왕실과 밀접한 인연을 맺었다.  

산청 지곡사지(智谷寺址) 탑비 귀부와 문양. 지곡사는 개청 스님의 제자인 석초 스님이 머무른 곳이다. 고려시대 선종산문 중 손꼽히는 대찰이었다. 두 마리 물고기가 마주 보는 화려한 문양이 귀부에 새겨져 있다. 

 

사굴산문과 조계종풍

고려 초기 사굴산문의 대표 선사로는 담진(曇眞)과 탄연(坦然)이 있다. 담진은 고려 예종의 왕사이자 국사였다. 담진의 제자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 1070~1159)은 유학과 서예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특히 유학에 뛰어나 15세에 세자의 스승으로 있다가 몰래 왕궁을 나와 출가했다. 탄연의 비문에 ‘고려국 조계종 사굴산하 단속사 대감국사비(高麗國 曹溪宗 闍崛山下 斷俗寺 大鑑國師之碑)’라고 새겨져 있다. 

산청 단속사지(斷俗寺址) 당간지주. 단속사는 담진 스님의 법을 이은 탄연 스님이 머물던 곳이다. 탁본으로 전하는 비문에 ‘고려국(高麗國) 조계종(曹溪宗) 굴산하(崛山下) 단속사(斷俗寺) 대감국사비(大鑑國師之碑)’라고 새겨져 있다. 
산청 단속사지 근처에는 최치원(崔致遠)이 바위에 새긴 ‘광제암문(廣濟嵒門)’이 있다.
산청 단속사지 서 삼층석탑(보물). 단속사에는 통일신라시대 세워진 두 탑이 서 있다. 신라의 유명한 화공 솔거(率居)가 그린 유마거사상(維摩居士象)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탄연이 사굴산문 스님이며, 고려에 들어와 ‘조계종’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고 있는 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조계종풍을 크게 떨쳤다’거나 ‘동국의 선문을 중흥하였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런 점으로 보아 사굴산문의 선풍이 큰 위세를 떨쳤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 선의 기본체계를 구축한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도 사굴산문 스님이다. 보조 지눌을 비롯해 수선사(修禪社)의 사주(社主)로서 국사 칭호를 받았던 15인과 조선 초기에 송광사를 중창했던 고봉(高峰)에 이르기까지 16국사에 이른다. 곧 사굴산문 문중에서 후대 한국 선의 구축점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 유동영

 

정운 스님
운문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동국대와 중앙승가대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교육아사리다. 대승불전연구소에서 경전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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