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영남 한 도(道)에만 큰 사찰이 많게는 300여 곳에 이르고, 승(僧)이 각각 400~500명으로 큰 곳은 1,000여 명에 가깝고 작은 곳도 200~300명 이하는 아닐 것이니, 모두 따지면 거의 10여만 명이나 될 것입니다.”
- 『승정원일기』 영조 13년(1737) 9월
조금은 과장된 수치일 수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사찰과 스님들의 수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숭유억불을 이념으로 했던 조선시대에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 시대에도 서산대사나 사명대사 같은 이름난 스님들이 있었으며, 덕 높은 선승(禪僧)과 학승(學僧)도 꽤 많이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극히 일부의 스님들만 알고 있지 않을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사찰이 부담해야 하는 공물(貢物)과 스님들의 신역(身役)이 늘어났다. 산성을 축조하고 지켜야 했으며, 『왕조실록』이 보관된 사고(史庫)를 관리하기도 했다. 스님네들은 사실상 군역(軍役)을 치른 것이다. 수많은 사찰에서 종이와 두부를 만들었으며, 명산의 사찰 스님들은 양반이 탄 가마를 메고 높은 산을 올라야 했다. 아마 대다수 스님이 겪는 일상이었을 것이다. 이번 책의 주제인 ‘조선의 B급 스님들’이다.
조선시대 스님들은 왜 이런 고역을 감내했을까? 그리고 이런 고역을 감내한 ‘스님’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조선은 양인(良人)들의 출가를 제도적으로 막았지만, 조선시대 내내 적지 않은 출가자가 존재했고 사찰은 많은 토지를 소유했다. ‘숭유억불’이라는 잣대만으로는, 혹은 개개인의 불심(佛心)만으로 조선시대의 불교를 바라볼 수 없는 이유다.
‘숭유억불’이라는 이념과 제도 아래에서 불법을 지켜온 스님들의 일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고역을 감내하면서 사찰을 지켜왔고, 민(民)의 삶을 보듬어 온 ‘조선의 B급 스님들’을 만나러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