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심시심(禪心詩心) | 이종찬(동국대 교수)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람보다 더 어리석은 것이 없고, 더 불완전한 것은 없다. 그러기에 이 어리석음, 불완전을 영리함과 완전으로 회귀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모든 선각자들의 가르침이요, 종교적인 노력인 것이다. 이 노력이 지속되고 있는 한에서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 하여도 무방할지 모를 일이다.
삼라만상의 참된 아름다움을 찾아보려는 문학의 예술적 활동도 어쩌면 그 속에서 참과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이라고 본다면, 선을 찾으려는 그 마음가짐이 종교와도 통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시와 선(禪)의 상관성이 존재한다 해도 큰 잘못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자연을 아름답다 표현해도 표현된 그 사실의 존재 그대로 아름다움만 못한 것이요, 종교에서 아무리 본체의 진여 실상을 설법하여도 그 진여의 경지는 아닌 것이다. 여기에 표현을 막아야 하고 말을 여의어야 하는 선의 기본자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석가모니 세상에 나지 않고
달마대사 서쪽에서 오지 않았어도,
부처 법 천하에 가득해서
봄바람에 온 산은 꽃이 피는데.
釋迦不出世 達磨不西來
佛法遍天下 春風花滿開
이 시는 고려 말 경한·백운화상(景閑·白雲和尙)의 시다. 불법은 누구의 것이 아니다. 사물의 존재, 우주의 형성 그 자체로서 불법은 있는 것이다. 온 천하 어디에나 편만한 것이다. 석가모니가 있어서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요, 달마대사가 있어서 선의 깨우침이 있는 것이 아니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잎 지듯이 법은 법으로서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봄바람에게서 꽃이 피는 것을 보았듯이 석가모니가 있어서 부처의 법이 있음을 알았을 뿐이다.
봄바람이 불어 꽃이 피면, 꽃이 피게 되는 힘이 봄바람인 것만 알고, 진작 꽃이 피는 그 당체의 아름다움은 원래 꽃 그 자체에 있음은 알지 못한다. 밝음을 비유하되 달이나 해를 가져오고 서늘함을 비유하되 가을바람을 가져오나, 그 밝음 서늘함을 인식하는 사람의 눈이나 감각의 청명(淸明)함은 잊는 수가 많다.
밝은 태양도 밤에는 빛나지 않고
뒤는 못 비추는 맑은 거울
어찌 내 마음만 하랴
항상 원만, 밝음, 비춤, 고요한 것을.
白日不照夜 明鏡不照後
畫得如我心 圓明常寂照
태양에는 밤·낮이 있고, 거울에는 앞·뒤가 있으나, 사람의 마음에는 어느 쪽도 없이 항시 원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 원만, 적조를 가리워 두고 거울에다 비춰보고 달에다 의지하여 본다. 이 어리석음을 빨리 여의어야 본체 자성의 묘유 경계에 이르는 것이다. 업은 아기 3년 찾고, 소를 타고 소를 찾는 것이 어리석은 우리 이 범속한 사람들이다.
다시 백운화상의 시 한 수를 더 들자.
물들듯 푸른 저 골의 물.
문밖 청산 그리려다 안돼.
산 빛 물 소리 다 드러났는데,
이 속에 누가 無生(무생)을 깨우치나.
洞中流水如藍染 門外靑山畫不成
山色水聲全體露 箇中誰是悟無生
진리의 묘체가 숨겨져 있음이 당연하나 따지고 보면 이미 다 탄로 난 것이다. 다만 내 마음이 어두워 보지 못하는 것이다. 저 달, 저 거울이 아무려면 내 마음만 하랴.
*1984년 7월호(통권 117호)에 실린 이종찬의 글을 현대적 문법으로 일부 교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