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륜산 대흥사와 초의선사의 한없이 너른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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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산 대흥사와 초의선사의 한없이 너른 품
  • 조용경
  • 승인 2024.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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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땅끝 아름다운 절, 미황사] 대흥사의 인연들

초의선사의 아름다운 인연

오로지 절과 그 절에 있는 글씨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 배우기 위해 전국의 유서 깊은 명산대찰을 찾아 돌아다닌 지 10여 년이 됐다. 우리나라만이 가진 엄청난 행운이겠지만, 국토의 어디를 가보아도 큰 산에는 큰 사찰이 있고, 그곳에는 사찰과 어우러진 큰 인물들의 이야기가 얽혀 있다. 전남 해남군에 있는 두륜산 대흥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대흥사(大興寺)는 전라남도 해남군의 두륜산(頭輪山)이 병풍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풍광 아래 자리 잡은 사찰로, 한때 대둔산(大芚山)이라고 불렸던 산 이름을 그대로 따서 ‘대둔사(大芚寺)’라고 불렸다. 그러다 근대에 들어와 대흥사로 이름이 바뀐, 조계산 송광사와 함께 전남을 대표하는 양대 사찰의 하나다.  

대흥사에는 우리 문화사에 발자취를 남긴, 많은 큰 사람들의 이야기가 얽혀 있으며, 그 이야기들의 중심에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있다. 초의선사(1786~1866)는 무안에서 태어났고, 15세 때 나주 운흥사로 출가했으며, 19세 때 해남 대둔사에서 구족계(具足戒, 출가한 사람이 정식 승려가 될 때 받는 계율)를 받았다.  

탱화를 잘 그려서 당대의 ‘오도자(吳道者, 당 현종 때의 유명화가)’로 불리기도 했는데, 근대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한국화가인 소치(小痴) 허련(許鍊)이 초의에게서 그림을 배웠을 정도였다고 한다. 

초의선사는 출가한 이후 스님으로서는 최고 지위인 제13대 대종사의 지위에 올랐지만, 다성(茶聖)이라는 칭호를 받고 『동다송』을 지었을 정도로 차에 대해서도 최고 전문가 다운 면모를 보였다.

그는 대흥사의 대종사로서, 탱화의 화가로서, 또 차의 대가로서 수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었으며, 그 가운데 걸출한 당대의 유명 인사들을 불교와 무관하게 대흥사로, 그리고 자신의 팬덤으로 이끌어 들인 참으로 특이한 인물이었다. 

 

다산 정약용과의 인연

대흥사, 그리고 초의선사와 가장 굵은 인연을 맺은 인물은 전남 강진(康津)에서 18년간 유배 생활을 했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다. 해남과 인접한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약용은 만덕산 백련사의 주지였던 초의선사의 스승 혜장(惠藏, 1772~1811) 스님과 차를 매개로 하여 만덕산을 넘나들며 교유하는 인연을 맺게 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초의선사와도 만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초의선사는 자신보다 24세 연장인 정약용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시와 유학을 배웠고, 정약용은 초의선사로부터 차와 차의 미학을 배우고 익히게 됐다. 정약용은 혜장 스님으로부터 차에 대해 처음 알게 됐지만, 초의선사와 교유하면서 다도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급기야는 차의 종류와 제조법, 음용법, 중국의 차 판매정책 등에 관한 일종의 논문인 『각다고(榷茶考)』를 저술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처음에 차를 매개로 맺어진 초의선사와 다산의 종교와 나이를 뛰어넘은 인연은 다산이 유배 생활 도중 대흥사에 머물며 대흥사의 사적기인 『대둔사지(大芚寺志)』와 두 사람이 자주 머물던 암자인 『만일암지(挽日庵志)』를 공동 편찬하기에 이르렀고, 정약용 사후에는 그의 아들 정학연과의 세교(世交)로까지 이어졌으니, 조선시대를 통틀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우정은 찾아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추사 김정희가 쓴 무량수각 현판. 대흥사 백설당에 걸려 있다.
추사 김정희가 쓴 일로향실 현판. 대흥사 동국선원에 걸려 있다. 
추사 김정희가 쓴 대흥사 동국선원 현판

추사 김정희와의 인연

초의선사가 ‘대흥사와 차’를 매개로 맺은 또 하나의 아름다운 인연은 조선 최고의 명필이자 자신과는 나이가 같았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의 우정이 아닐까 싶다. 권력과 재력을 겸비한 가문에서 자라난 추사는 24세 때 부친을 따라 청나라를 방문해 청나라 상류사회 인사들과 교유하며 차문화에 심취하게 됐다고 한다.

초의 스님은 정약용(혹은 그의 장남 정학연)을 만날 목적으로 1815년 초 처음으로 남양주를 방문했고, ‘수락산 학림암’에서 해붕(海鵬) 노스님을 찾아온 추사를 만나게 됐다. 함께 머물던 하룻밤 사이에 의기투합해 버린 젊은 두 사람은 그로부터 30년간 우정을 주고받는 평생 친구가 된다. 

1840년 두 사람이 55세가 되던 해, 추사는 당쟁에 휘말려 제주도로 유배를 가면서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와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 떠나기 전 추사는 지금은 대흥사 백설당에 걸린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 글씨를 선물하기도 했다. 

제주도에 위리안치된 추사는 초의선사가 보내준 차를 마시며 외로움을 달랬고, 초의선사에게 차를 보내달라고 조르는 ‘걸명시(乞茗詩)’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이에 화답하듯, 1843년 초의선사는 제주도로 추사를 찾아가 무려 6개월간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이때 추사가 써준 ‘일로향실(一爐香室)’이란 글씨는 현재 대흥사 동국선원에 걸려 있다고 한다.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뜨게 되자 초의선사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저세상에 가서 다시 만나 새로이 인연을 맺자’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으니, 두 사람의 시공을 초월하는 우정에 대해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된다. 

 

창암 이삼만이 쓴 대흥사 가허루 현판

창암 이삼만과의 우정

결코 빼고 넘어갈 수 없는 또 하나의 스토리는 초의선사와 추사, 그리고 조선 후기 3대 명필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던 정읍 출신 서예가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 간의 생사를 넘나든 3각 우정이다.

창암 이삼만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글씨 쓰기를 즐겨서 어려서부터 하루 1,000자의 글씨를 쓸 정도로 서도에 열중했다고 한다. 이삼만은 특히 초서(草書)를 잘 썼으며, 그의 서체는 창암체(蒼巖體)라 할 만큼 일가를 이루었지만, 평생을 글씨 쓰는 데만 열중한 나머지 가산을 탕진했고, 결국은 가난한 서생으로 일생을 마쳤다.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없으나, 이삼만이 제주도로 유배 가는 길의 추사를 만나 자신의 글씨를 보여주며 평가를 요청했고, 추사는 “글씨로 겨우 밥은 먹고 살겠다”는 혹평을 했는데, 이때 추사에게 화를 내고 폭언을 하는 제자들을 이삼만이 오히려 말렸다고 한다. 

창암은 초의선사가 대흥사에 있을 당시, 대흥사의 중앙에 자리 잡은 ‘가허루(駕虛樓)’, 출입문의 현판 글씨를 남겼는데, 대흥사에서 점하는 가허루의 비중이나, 당시 호남 지역에서 점하는 두 사람의 위상으로 볼 때, 초의선사와의 사이에 상당한 친분이 있지 않았겠는가 싶다.  

그 후 추사는 1848년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자 돌아오는 길에 대흥사를 거쳐 이삼만의 거처를 찾았는데, 그가 3년 전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듣고는 가슴 아파하면서 ‘명필 창암 완산이공삼만지묘(名筆 蒼巖 完山李公三晩之墓)’라는 묘표를 쓰고, ‘여기 한생을 글씨를 위해 살다 간 어질고 위대한 서예가가 누워있으니, 후생들은 감히 이 무덤을 훼손하지 말지어다’라는 묘문을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오랜 유배 생활을 통해 추사의 인간미가 도야된 탓이었을까?

 

원교 이광사가 쓴 대흥사 대웅보전 현판
원교 이광사가 쓴 대흥사 침계루 현판
원교 이광사가 쓴 대흥사 원종대가람 현판

원교 이광사와의 인연 

끝으로 초의선사나 추사보다는 조금 앞선 시대를 살다 갔지만, 대흥사나 초의선사, 추사와 얽힌 인연이 만만치 않은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대흥사 주법당인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은 대흥사 누각인 침계루의 전후면에 걸린 ‘침계루(枕溪樓)’와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 현판을 쓴 원교 이광사의 글씨인데,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귀양 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러서 대웅보전 현판을 보고 초의선사를 향해 “왜 저런 수준 미달의 글씨를 걸었느냐”고 힐난하며 그 자리에서 ‘무량수각’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8년 후 귀양에서 풀린 추사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러 8년 전 자신의 잘못을 사과했다는 전설 비슷한 얘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창암과 원교, 그리고 추사 등 조선 후기의 3대 명필로 손꼽힌 세 사람에 관한 이러한 전설적 이야기는 특히 성품이 교만해 구설에 많이 올랐다는 추사가 다른 두 사람에 대한 질투심도 상당히 강했을 것임을 추론하게 하는 재미난 얘기다. 

동시에 호남을 대표하는 대사찰인 대흥사가 긴 세월에 걸쳐 당시 예술인들을 키워내는 요람의 기능을 담당했으며, 우리 불교계의 대종사로서 대흥사를 이끌어 온 초의선사가 얼마나 품이 넓은 지도자였던가를 증언해 주는 이야기인 듯하다. 

 

사진. 유동영

 

조용경
여행작가이자 유튜버(조용경 여행TV)로 우리나라 산사 및 불교 유적을 탐방하며 소개한다. 현재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자문위원이며, 전 포스코엔지니어링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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