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寺의 향기] 청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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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寺의 향기] 청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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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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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寺의 향기 왕실 여인의 출가 도량-

  서울 종로구 숭인동 청룡사

  위치와 주변 환경

  서울의 성곽, 한양성(漢陽城)은 조선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 도읍(都邑, 1393년)하면서 북쪽에 백악산(북악산), 남쪽에 남산, 서쪽에 인왕산, 동쪽에 낙산을 잇는 성을 축조하엿다. 한양성의 동쪽 낙산(낙山)은 산 모양이 낙타 등머리와 비슷하여 붙여진 산 이름인데, 이 산의 동쪽 기슭에 고려 태조 왕건이 도선국사의 유언을 받들어 창건한 사찰이 있다. 지금의 서울 종로구 숭인동 삼각산에 있는 청룡사이다.

  청룡사는 해방 이전인 4~50년 전만 하여도 「동대문 밖 여승방(女僧房)」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던 사찰이었다. 그것은 이 사찰이 긴 역사를 이어오면서 비구니 스님들만의 수행처로서 뿐만 아니라 왕실 여인의 귀의처가 되었고 또 도성 안의 불심을 키워 온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과 6 · 25사변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많은 주민의 이주, 도시의 개발 등 세태의 변화로 본래 이 사찰이 간직한 산세의 푸르름, 약수터 계곡의 맑은 물, 수행처로서의 면모는 사라지고 긴 역사의 사화(史話)는 세인의 무관심에 묻혀 버렸다.

  창건의 배경

  통일 신라 말기, 도선 국사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20년 전에 왕건의 아버지 왕륭(王隆)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당신의 아들 왕건이 왕위에 오르면 불법(佛法)을 수호하고 양주(楊州, 지금 서울) 외청룡(外靑龍) 산 등에 사찰을 짓게 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500년 후, 이씨 왕조의 왕운(王運)이 좀 늦게 돌아오라는 뜻에서 미리 예측하고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 후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고 태조 5년(922년)에 나라의 원찰로 청룡사를 창건한 것이다. 청룡사를 창건한 태조는 1세 주지로 평소 가깝게 지내던 혜원(慧圓) 비구니로 하여금 주석케 하고 불력(佛力)으로 삼국(신라 · 후백제 · 고려)의 재통일을 기원하는 천일기도를 올리도록 하였다.

  혜원 비구니와 궁예, 왕건

  혜원 스님은 신라 금성태수(金城太守) 김융(金融)의 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용덕왕자(龍德王子: 후에 궁예)가 왕실의 모함으로 위기에 몰리자 왕자를 변호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혜원 스님은 태백산 세달사(世達寺: 興敎寺)로 피하여 허담 화상에게 출가하였던 것이다. 몇 년 후, 용덕 왕자도 몸을 피하여 온 곳이 세달사였다. 왕자는 「태허」라는 법명을 받고 둘은 법형제(法兄第)가 되었다. 혜원 스님은 왕자인 태허 스님을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

  그 후, 신라 말기의 혼란으로 왕자인 태허 스님은 출가 수도 생활을 등지고, 궁예왕이 되어 후고구려(태봉)을 건국, 철원에 도읍하면서 철원의 도피안사에 혜원 스님을 주석케 하고 자주 스님을 초청하여 공양을 올렸다. 이 때 궁예의 신하인 왕건을 자주 접한 인연으로 왕건을 알게 되었다. 궁예가 죽고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고, 청룡사를 창건하여 혜원 스님을 초대 주지로 모신 것이다.

  왕실 여인의 수도처

  조선조 개국, 태조 이성계의 고려조 찬탈은 공민왕의 비 혜비(慧妃)가 청룡사에 출가하는 원인을 만들었는데, 그의 딸 경순공주(慶順公主)가 왕자의 난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청룡사에 출가하기도 했다. 고려조의 왕비와 조선조의 공주의 만남, 이것은 무슨 기이(奇異)한 만남인가. 둘은 서로 위로하며 부처님의 인연설법을 새삼 느끼고 열심히 수도하였다. 왕권의 찬탈 싸움은 단종 때에도 계속되어 단종의 폐위로 수양대군이 권력을 잡으면서 세조가 되었지만 이 권력의 다툼은 단종의 비 송씨(宋氏)가 청룡사에 출가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청룡사 명칭이 잠시 정업원(淨業院)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1456년(세조2년) 단종이 폐위되어 영월로 유배될 때, 단종은 청룡사에 들러 송씨와 애틋한 이별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당시 청룡사의 우화루는 영원히 이별을 나눈 집이라 하여 영리정(永離亭)이라 하였으며, 청룡사의 아랫마을에 있는 다리를 영리교(永離橋)라 하였다 하는데, 후일 와전되어 마을 이름을 영미마을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현재 청룡사의 앞산 봉우리를 동망봉(東望峰)이라 부르는 것은, 단종이 있는 동쪽 영월 땅을 바라보며 비통해 한 데서 연유한다고 한다. 그리고 송씨가 자줏물을 들여서 댕기, 저고리 깃, 고름, 끝동 등을 만들어 바위에 널어 말렸다 하여 이 바위를 자주바위, 밑에 있는 샘물을 자주우물, 그 마을 이름 까지 자주마을이라 부르기까지 하였다는데 지금은 위치를 알 수가 없다. 또한 동망봉의 풀잎들은 모두 송씨의 한(恨)이 서려 모두 동쪽으로만 고개를 숙였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송씨가 대궐에서 나올 때 일행이 5명이었는데 자신은 허경(虛鏡), 후궁 김씨는 원경(圓鏡), 권씨는 혜경(慧鏡), 시녀 세 사람은 각각 희안(希安), 지심(智心), 계지(戒智)라는 법명으로 모두 비구니가 되었다.

  절 이름의 변천

  후일 숙종 임금은 1698년 단종은 물론 송씨를 추복(追復)하여 정순왕후(定順王后)라 하였다. 그후 영조 임금은 1771년 정순왕후가 머물렀던 청룡사 경내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과 비각을 세우고 전봉후암어천만년(前峰後巖於千萬年: 앞 산봉 뒤 바위 오천만 년 가소서)이라는 현판과 앞산에 동망봉이라는 표석의 어필을 내렸다. 지금 표석은 없어지고 비각은 사찰에 남아 있다. 그리고 이때 절을 일신 중창하고, 왕비가 계시던 곳이라 하여 정업원이라고 사찰 이름을 바꾸었다.

  정업원이란, 세종 때 왕실의 여인들이 불심(佛心)을 키우던 내불당(內佛堂)의 명칭이었다. 유생들의 반발로 금호문(지금 원서동) 밖으로 옮겼으나 연산군 때 폐사시켰던 것을 영조 임금은 정순왕후를 추모하는 뜻에서 청룡사에 비석을 세우고 사명(寺名)을 바꾸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반 서민이 다니는 사찰과 왕족이 있던 사찰을 구별한다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그 후 순조 23년(1823년), 왕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병이 나자 친정 아버지 김조순(金祖淳) 영상(領相)이 정업원(청룡사)에서 쾌유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니 영험이 있었다. 이에 김조순의 주청으로 순조 임금은 옛 이름 청룡사로 환원하도록 한 것이다.

  지금 청룡사 경내의 정업원구기 비각은 서울 지방 문화재 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청룡사를 한 동안 왕실의 내불당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만큼 왕실의 잦은 출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창 중수

  고려초 창건 이후 오늘날까지 10여 차례의 중창을 거치는 동안 많은 비구니 스님들의 원력이 도량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초대 주지 혜원 스님을 비롯하여 만선(萬善), 희정선사, 지환, 무학, 법공, 예순, 묘담, 수인, 정기, 창수, 상근, 윤호 비구니 스님으로 이어지는 중창 중수의 역사는 이 청룡사의 사격(寺格)을 말해 주는  듯 하며 한국 불교 비구니의 맥을 보는 듯 하다.

  오늘날의 사찰의 기본 골격을 갖춘 대대적인 불사는 지금 심검당에서 수행 중인 윤호(輪浩) 노스님의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혀 둔다. 지금 도심 가운데 우뚝 선 사찰의 위용에서 풍기는 중생 구원의 의지는 윤호 스님의 굻은 주름살 속에서 이룩되었다. 이러한 비구니 수행 도량의 시설이 갖추어진 바탕 위에서 현재 신도회의 조직과 청년법회, 학생법회는 물론 요즈음 한창 활기를 띠고 있는 유아법회 등이 포교 전법에 매진하고 있다고 주지 진우 스님은 말한다. 佛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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