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俗離)로 드는 길이 세상일로 뒤숭숭한데 문득 바라본 하늘빛이 제법 눈 시리다. 정겹게 익어가는 들판의 알곡들, 철드는 산빛이 그 숭숭한 마음을 달래주는 듯하다. 백두에서 내리 뻗은 산기운이 한반도를 품안으며 설악과 태백을 들어올리더니 남녘땅 한가운데서 다시 한번 솟구쳐 올린 명산, 바로 속리산(俗離山 1,058m)이다. 이름 없는 산이 어디 있으랴마는 속리산은 그 이름부터 불연(佛緣) 깊음을 넌지시 일러준다. ‘세속을 여읜 산’의 옛 이름은 구봉산(九峯山)이다.
지금이야 천황봉(天皇峰)을 비롯해 상환석문(上歡石門), 문장대(文藏臺) 등 팔봉팔석문팔대(八峰八石門八臺)로 울울창창한 숲과 계곡, 기암 절벽의 절경을 말하고 있지만 아마도 그 옛날 우러러 볼 때는 아홉 봉우리가 우뚝했던 모양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구봉산을 지나던 금산사의 고승 진표(眞表) 율사 앞에 지나가던 소달구지가 멈추어 선다. 소가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이다. 주인이 그 이유를 물으니 율사는 “이 소는 겉으로 어리석으나 속으로는 현명하여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알고 불법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이렇게 우는 것이오.” 한다. 이 말에 감동한 주인은 스스로 낫을 들어 머리카락을 자르고 율사를 뒤따른다. “축생도 이러한 신심이 있는데 사람에게 어찌 신심이 없겠습니까”라는 이유였다. 이후부터 구봉산을 속리산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법주사의 산내 암자 중 가장 규모가 컸다는 복천암(福泉庵, 043-543-4774)은 속리산의 복부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다. 물론 의신 조사와 진표 율사의 법주사 창건 및 중창과 관련하여 본다면 ‘비범한 기운 서린’ 법주사가 속리산의 중심이 분명하다.
하지만 조선 중기 60여 동의 전각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렸던 법주사와 비로봉(毘盧峰), 문수봉(文殊峰), 보현봉(普賢峰), 관음봉(觀音峰) 등 봉우리마다 불보살님을 앉혀놓은 속리산 전체를 하나의 도량으로 본다면 복천(福泉)은 분명 도량에 없어서는 안 될 수각처럼 중요한 지점이 된다.
또한 조선 제23대 순조 대왕의 태를 묻었던 태실(胎室)이 이곳에서 멀지 않으니 의미상 속리산의 중심으로 보아도 지나친 상상은 아닐 것이다.
신라 성덕왕 19년(720) 창건되었다는 복천암은 「복천사 중수보권문」 등의 기록에 의하면 창건 이후 혜공왕 12년(776) 영심(永深) 선사, 고려 태조 1년(918) 증통(證通) 국사, 예종 2년(1170) 자정 국존, 조선 세종 31년(1449) 신미 대사, 영조 11년(1735) 탁융 선사, 순조 3년(1803) 취준 선사 등과 관련된 중창과 중수의 기록이 보인다.
특히 신미 대사는 세종 대왕이 법문을 청할 정도로 도가 높았으며, 세조의 스승으로 칭송받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복천암에 신미 대사와 세조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어 흥미롭다.
세조는 조선시대 왕들 가운데 가장 돈독한 불심을 지녔던 인물이다.
‘억불숭유’로 알려져 있는 당시의 시대상황 속에서 전국의 명찰들을 창건·중창하고, 간경도감을 설치해 불교 서적을 간행한 것은 불교뿐만 아니라 한국문화사에도 큰 업적으로 손꼽을 일이다.
그런 그가 어린 조카(단종)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워했음은 분명하다. 그 괴로운 마음이 종기로, 피부병으로 드러났으니 말이다.
세조의 피부병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후, 꿈에 현덕 왕후(顯德王后: 문종 비, 단종 모)가 나타나 세조에게 침을 뱉은 자리라고 한다. 죄를 빌고자 부처님께 더욱 매달렸을 세조는 평소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신미 대사와 어느 날 속리산 복천암을 찾았던가 보다.
신미(信眉)·학조(學祖)·학열(學悅) 스님 등과 함께 3일 동안 법회를 열고, 기도를 드린 뒤 절에 이르는 길목의 한 목욕소에서 목욕을 하고는 오랜 동안 앓아왔던 피부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세조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지병(피부병)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연상되는 대목인데 어느 쪽이 진실인가는 세간의 관심사일 뿐이다.
몸과 마음의 병을 고치려 했던 세조. 부처님을 찾아 마음을 씻고 좋은 물로 몸을 씻고자 했을 것이다.
한강의 발원지인 오대산 우통수(于筒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이 땅의 가장 좋은 샘물로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고 속리산 삼파수(三派水, 三陀水)와 복천(福泉)은 조선시대 내내 좋은 물로 유명하였으니 세조가 상원사와 복천암에 들러 참회하고 이곳의 샘에서 목을 축이고 몸을 씻음으로써 병이 나은 것은 가능한 결과라 할 것이다. 어쩌면 세조를 불러들임으로써 불법의 중흥을 내다본 신미 스님의 혜안(慧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조의 자취는 또 상환암(上歡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상환암중창비」에 따르면 조선 태조가 건국을 앞두고 이 암자에서 백일기도를 마치고 그 뜻을 이루었다고 한다. 후에 세조가 이곳을 찾아 3일 기도를 통해 선왕의 유적을 추모하던 나머지 무한한 환희심에 길상암(吉祥庵)이던 본래의 이름을 상환암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이 곳에서 만난 한 거사님은 세조가 목욕한 자리를 법당 옆 학소대(鶴巢臺)의 갓바위 아래 은폭(隱瀑) 계곡으로 일러준다. 이래저래 세조의 마음 닦고 몸 닦기는 한 인간의 삶 너머 오늘날까지 씻어야 할 업으로 세인들에게 각인되고 있는 모양이다.
이른 아침 법주사를 나서 세심정을 지나 복천암까지 한 시간 남짓 걷느라 맺힌 땀방울이 깎아지른 절벽 아래 보석처럼 깨끗한 복천 한 모금에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극락보전의 부처님과 신미 스님의 진영을 뵙고 나서는 수암 화상(신미 대사)과 학조 대사의 부도탑 참배길. 균형잡힌 조선 전기 팔각원당형 부도의 수작을 만난다는 기쁨에 더하여 맑고 투명한 물길처럼 지나는 소나무 숲길의 아름다움이 인상적이다.
복천암에서 내려와 다시 상환암에 오른다. 천황봉을 오르고자 서두른다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갈림길, 이정표가 100M 위의 상환암을 알려준다.
은폭 위의 학소대 절경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원통보전 뒤 절벽이 또 감탄을 자아낸다. 머리를 젖히고 올려다본 하늘에 날아가는 흰구름이 마치 학이 노니는 듯하다.
천황봉, 비로봉을 오르고 입석대(立石臺), 경업대(慶業臺)…, 쉴 사이 없이 펼쳐지는 비경이며, 봉우리마다 앉아 계신 부처님을 참배하느라 힘든 줄 모른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하려 하고 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는데 세속이 산을 여의려 하는구나.”
산을 여의려는 때, 속리산에 올라 읊었다는 고운(孤雲)의 시 구절이 귀에 쟁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