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이 있고 난 후 산은 그 빼어남을 드러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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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 있고 난 후 산은 그 빼어남을 드러내니
  • 관리자
  • 승인 2007.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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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기행/덕유산 용추사

덕유산 자락의 나무들이 벌써 연초록으로 물이 오른다. 지난 해 이맘 때 허벅지까지 눈이 쌓여 있던 양양(襄陽)의 만월산 명주사와는 천지 차이다. 높지는 않되 이 땅의 산 깊음을 예서 다시금 확인한다.
덩달아 용추사(주지 선해 스님, 055-962-4638)로 향하던 발걸음까지 새록새록 돋아나는 봄 감흥에 겨워 한번 멈추어 서서는 영 나아가질 못한다. 그런 발걸음을 다시 멈춰 세운 것은 장수골 용추계곡 들머리의 부도밭이다. 9기의 석종형 부도였는데 그 크기도 크기려니와 드문드문 꽃문양의 정성 깃든 손길이 배어 있는 모양새가 옛절의 위엄있는 가풍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길을 재촉해 계곡을 거슬러 오르니 홀연히 너른 터가 눈앞에 펼쳐진다. 옛 장수사(長水寺) 터다. 그 한가운데 낮은 석축 위에 정교하게 짜맞추어 올린 예스런 문이 서 있는데 ‘덕유산장수사조계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지금은 용추사 일주문으로 불려지는데 두 아름이 넘는 기둥 위에 다포계의 팔작집을 올려놓았다. 기둥 사이로 보이는 계곡 너머 파란 하늘과 기둥 아래서 바라보는 포작의 정교함이 가히 일품이다.
장수사 터는 용추사와 더불어 덕유산으로 크게 올라선 백두대간이 지리산으로 내달리기 직전 동남 방향으로 월봉산(1,272m)을 넘어 금원(1,353m), 기백산(1,330m)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와 거망(1,245), 황석산(1,190m)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용추폭포를 사이에 두고 각각 기백산(일명 지우산)과 거망산에 안겨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 거리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이니 용추사가 장수사의 부속암자라기보다는 차라리 장수사의 별원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인근 영각사(靈覺寺)에 화엄경판을 봉안했던 설파당 상언 대사의 비문(雪坡大師碑銘, 한국고승비문총집)에 “33세에 용추 판전에서 강좌에 올랐다.”는 기록 또한 장수사에 못지 않은 용추암의 위상을 알려주고 있기에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의 용추사는 6·25 전란 중에 장수사와 함께 불탄 후 다시 세워진 전각들로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행히 장수사가 불타기 직전 모셔내왔다는 대웅전의 부처님과 명부전의 시왕님만이 잊혀져가고 있는 대가람의 당당했을 모습을 말없이 증명해주고 있을 뿐이다.
“오륙십 년 전이죠. 국민학교 때 합천 해인사에 가보면 여기 용추 아랫절보다 못했습니다. 장수사가 그렇게 좋았는데…”
마침 일가의 49재를 의논하기 위해 용추사를 찾아온 노 처사님 내외분의 회상 중에 장수사와 용추사의 기억이 아련하다.
“괘불을 못 내온 게 제일 안타깝죠. 장정 수십 명이 달라붙었는데도 들지못할 정도였지요. 저 안의(安義) 광풍루 2층에 걸면 그 다섯칸을 다 가리고도 남았고 부처님의 허리까지 밖에 펼 수가 없을 정도였지요. 해인사 괘불은 괘불도 아닙니다.”
옆에서 듣고 있자니 분단의 아픔이 또 다른 안타까움으로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함양군지에 “1923년 아주 혹심한 가뭄이 들었다. 장수사 괘불이 안의 광풍루로 모셔졌다.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서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괘불의 영험함 때문이었다고 한다.
“저기 서 있는 일주문을 만들 때의 이야깁니다. 이렇게 봐도 나무 조각이 굉장하잖아요. 목수가 몇날 며칠을 맨날 나무 토막만 내고 있더랍니다. 스님이 보기에 매일 그 일만 하고 있으니까 하루는 스님이 목수가 제대로 일하고 있는가 싶어서 나무 토막 하나를 몰래 숨겼지요. 그랬더니 다음날 바로 목수가 연장을 챙겨 떠나려고 했답니다. 스님이 급히 멈춰 세우고는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목수가 잘라 놓은 나무토막이 몇 개인데 한 개가 틀리기에 이런 정신 가지고는 못 짓겠다고 그러더라는 겁니다. 참 대단한 목수였던 것이지요.”
유난스레 별빛 총총한 밤, 객실에 누웠는데 낮에 취했던 봄기운에 설레어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용이 되고자 했던 이무기가 살았다던 용추의 폭포 소리 또한 점점 크게 들리니자연 옛 용추암의 선실에 앉아 『안음장수사여용추암창수원류흥폐록(安陰長水寺與龍湫菴創修源流興廢錄)』을 적고 계셨을 두혜(杜慧) 스님의 심사가 그대로 전해오는 듯하다.
“대개 산이 있고 난 후에 절은 그 이름을 밝게 하고, 절이 있고 난 후에 산은 그 빼어남(勝)을 드러낸다.”
신라 각연(覺然) 조사의 창건과 무학(無學) 대사의 자취를 알려주는 이 사적에는 장수사와 용추암의 창시 연원 및 화재로 인한 소실과 재건의 모습이 비교적 자세히 나타난다. 문찬(文贊)에 의해 1685년 건립된 큰법당, 문감(文鑑)이 조성한 소상(塑像), 이영생(李英生)이 조성한 시왕상, 지찰(智察)과 선일(善逸)이 조성한 팔상전과 팔상탱, 그 밖에 선당, 승당, 서상실, 동상실 등 우람했을 전각들이 그 조성 시기와 함께 하나하나 거론되고 있다.
1734년 화재 후에는 전각의 재건을 위해 대중과 도솔암, 백련암 등 산내 암자는 물론 인근의 망월암과 멀리 경기 양주의 지덕사 등에서 크고 작은 도움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당시 사찰간의 돈독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또한 낮에 보았던 용추사 일주문, 즉 장수사 조계문을 바로 사적의 저자인 두혜 스님이 1711년 조성한 것임을 확인하는 순간에는 “만약 성인의 개창과 자취가 없다면 어찌 산사가 그 아름다운 이름을 밝게 드러낼 수 있겠는가.”라는 스님의 말씀이 곧 겹쳐졌다.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스님의 자취(사적과 조계문)를 통해 장수사와 용추사의 옛 모습을 더듬고 있으니 예언 같은 그 말씀이 무서운 떨림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용추사 구름다리를 건너니 맞은편 숲 속에 문곡 대사 부도를 비롯한 3기의 거대한 부도가 떡 버티고 서있다. 부도의 크기가 사세를 나타낸다면 과연 장수사의 규모와 격을 알 만하다. 나무짐을 지고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서 불을 붙였다는 이야기나 쌀 씻은 물이 안의 마을 광풍루 앞까지 흘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부도 앞에 서니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장수사의 산내 암자였던 은신암 가는 길은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제법 두툼하다. 6개의 주춧돌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은신암, 무학 대사가 터를 잡고 은거한 곳이라니 그 자리가 더욱 밝고 안온하게 다가온다.
화창한 날씨에 이끌려 한시간여 거망 월봉의 능선에 오른다. 봉우리들이 겹쳐 있는데 덕유산에서 지리산을 쫓는 백두대간이 확연하다. 멀리 지리산의 반야봉 또한 늠름하다. 무학 대사 역시 여기서 저 산들을 바라보았으리라.
그 산들을 바라보며 이달부터 시작되는 용추사 대웅전 중창불사 천일기도가 원만한 회향을 맞이하기를, 용추사, 장수사가 어서 옛 모습을 되찾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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