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우는 소리를 듣고 장부의 할 일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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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우는 소리를 듣고 장부의 할 일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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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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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법석/청허당 휴정

조선 중기 허응당 보우 대사 이후 다시 억불 정책에 숨죽이고 있던 불교는 중흥을 일궈낼 기둥을 배출하였다. 서산(西山) 대사, 청허당 휴정은 위기의 불교를 다시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이라는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조선 전체를 구해낸 태산이었다.
청허당 휴정 대사는 평안남도 안주에서 선비 최세창의 아들로 태어나 9세에 어머니를, 10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 한남 김씨의 태몽은 묘향산에서 날아온 학이었다. 본명은 여신(汝信), 아명은 운학(雲鶴)이었다. 당시 안주 목사로 있던 이사증(李思曾)의 양자로 들어가, 12세부터 성균관에 입학해 공부하였으나 15세에 과거에 낙방하였다. 지리산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신흥사(神興寺)의 숭인(崇仁) 대사 문하로 출가하였다. 이후 부용 영관(芙蓉 靈觀) 대사를 전법사(傳法師)로, 휴옹 일선(休翁 一禪) 대사를 계사(戒師)로 모셨고, 학묵(學默) 대사 등을 찾아다니며 정진했다.
대사는 도솔산, 두륜산, 금강산 등을 다니며 수행하다가 27세 되던 해 활연대오하고, “머리 털은 희었으나 마음은 희어지지 않는 이치, 옛 분들이 다 말씀하셨도다. 이제 닭 우는 소리를 듣고서 장부의 할 일을 이미 마쳤도다.”라는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1552년 승과에 급제하였고, 교종과 선종의 양종판사(兩宗判事), 봉은사 주지 등을 지냈다. 1557년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 등지로 다니며 후학들을 가르쳤다. 1564년 금강산 백화암에서 『선가귀감(禪家龜鑑)』의 서문을 지어, 당시의 수행 풍토를 경계하고 참 수행의 길을 열어 주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 간청으로 팔도십육종 도총섭(八道十六宗 都摠攝)을 맡아 승병을 이끌고, 바람 앞의 등불인 조선을 구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1593년 제자 사명 유정에게 도총섭을 맡기고 묘향산으로 물러났다. 1604년 1월 23일, “천 가지 만 가지 생각, 붉은 화로에 내리는 한 점 눈일 뿐이로다. 진흙 소가 물 위를 걷나니 땅이 갈라지고 허공이 찢어지는도다.”라는 임종게와 전라도 해남의 두륜산 대둔사에 의발을 두라는 유언을 남기고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하였다. 세수 85세, 법랍 70세였다.
대사의 제자는 1,000여 명에 이르렀고, 사명 유정(四溟 惟政), 편양 언기(鞭羊 彦機), 소요 태능(逍遙 太能), 정관 일선(靜觀 一禪) 등 이후 해동 불교를 이끈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두었다.
저서로는 『선가귀감』 『삼가귀감(三家龜鑑)』 『심법요초(心法要抄)』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청허당집(淸虛堂集)』 『설선의(說禪儀)』 『운수단가사(雲水壇歌詞)』 『삼노행적(三老行蹟)』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선교석』은 선(禪)과 교(敎)에 대해 제자들에게 문답식으로 가르침을 편 내용으로 되어 있다. 『선교석』은 서산 대사께서 묘향산 금선대(金仙臺)에 머물고 있을 때, 행주(行珠)·유정(惟政)·보정(寶晶) 세 제자가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를 들고 찾아와 질문을 시작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선가귀감』과 더불어 선 중심의 수행을 굳게 세운 저서로 평가받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선교석』 가운데 일부를 소개한다. 원문은 『한국불교전서』 7책 654쪽 ∼ 657쪽에 실려 있다.

선교석(禪敎釋)
제자들이 묻기를 “반야(般若) 가운데에도 선(禪)의 가르침이 들어있는데, 반야의 가르침을 종지(宗旨)로 삼아도 되겠습니까?”
서산 대사 설하시기를 “부처님께서 마하가섭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부촉하셨다는 말은 들었어도, 금강반야(金剛般若)를 부촉하셨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무릇 온갖 풀잎 끝에도 조사(祖師)의 뜻이 살아 있고, 꾀꼬리와 제비라 할지라도 늘 바른 법을 말한다고 하는데, 어찌 『금강경』에 참 가르침 한 구절이 없겠는가? 문자에 집착하지 아니한다면 정진할 만한 경전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밝은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 마음을 씻는 일은 마땅한 근기가 아니라면 참으로 어려워 (부처님 가르침의 참 뜻을) 살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나는 그대들을 위해 선(禪)과 교(敎)라는 두 길을 서로 비추어 살펴보리라. 그러나 이는 내가 지금 지어낸 것이 아니라, 옛 선지식들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선문(禪門) 최초의 활구(活句)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도솔천을 떠나기 전에 이미 카필라의 왕궁에 내려왔으며, 마야 왕비의 뱃속에서 나오기 이전에 이미 중생을 다 제도하셨다’ 한 것이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세상에 나오지 않고도 49년 동안 가르침을 펴셨고, 달마 대사는 인도에서 오지도 않았는데 소림사에는 이미 미묘한 깨달음의 방편이 있다’고 선지식이 설하신 그 뜻이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도솔천에서 카필라 궁으로 내려와 마야 왕비의 태에서 머물다 탄생하시고, 출가해 깨달음을 이루시고, 법을 펴시고, 열반에 드셨다’ 한 것은 선문 최후의 구(말후구*;末後句)이다. 이는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달 그림자가 강물에 비춘 것과 같으니 때와 곳에 걸림이 없으며 시종일관 한결같으니, 말후구는 최초구이며 최초구 또한 말후구이다.”
다시 세 제자가 묻기를 “반야경에는 ‘모든 부처님이 이 경전에서 비롯되므로 반야를 부처님의 어머니라고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즉 반야를 종(宗)으로 삼아도 되겠습니까?”
서산 대사께서 이르시기를 “반야를 종으로 삼을 수는 없다. 반야라는 말은 지혜라는 뜻이니, 만일 반야를 종으로 삼는다면, 종주는 마땅히 사리불(舍利弗:부처님 제자 가운데 지혜 제일의 제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학자 5, 6명이 얼굴빛이 변하여 서산 대사께 물었다. “선가의 말들은 분에 넘치고 지나친 말들이 많습니다. 마치 눈은 있으나 발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서산 대사께서 이르시기를 “그렇지 않다. 선가에는 눈도 있으며, 발도 갖추고 있다. 어찌 영겁토록 생사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가. 모든 성현의 해탈함을 우러르고 따르지 않음이 선가의 눈이며, 다른 사람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늘 자기 자신의 허물을 살피는 것이 선가의 발이다. 아아, 세상이 그르니 삿된 법이 강하고 바른 법은 쇠약하니, 바른 법 보기를 그저 한 덩어리 흙처럼 가볍게 여기는도다. 내가 한 이 말은 마치 한 잔의 물을 가지고 수레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도다.
오조 홍인(五祖 弘忍) 대사께서는, ‘내 본래 마음을 지키는 것이 시방 삼세 모든 부처님을 생각에 담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였다. 그 때문에 옛 대덕께서는 교(敎)만 중히 여기고 마음을 가볍게 여긴다면 영겁토록 정진한다 하여도 마군, 외도에 그친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서산 대사와 제자들 사이의 문답은 끝나고, 『선교석』도 끝난다. 다시 제자들 가운데 참선하는 이들과 교학하는 이들이 모여 토론이 벌어진다. 그 토론을 소개한다.
교학하는 이가 묻기를, “불성을 밝게 본다는 것은 어떠한 이치인가?”
참선하는 이가 말하기를, “우리 집에는 노비가 없다.”
다시 교학하는 이가 묻기를, “보살께서 중생의 고통을 보시고 일으키는 자비심은 어떠한 것인가?”
참선하는 이가 답하기를, “자(慈)라는 것은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이요, 비(悲)라는 것은 중생이 제도될 수 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교학하는 이가 묻기를, “그러면 부처님께서 펴신 일대장교(一大藏敎)가 모두 쓸모없는 것이란 말인가?”
참선하는 이가 답하기를, “일대장교는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다. 근기가 뛰어난 이는 사자와 같으며, 근기가 둔한 이는 그저 뛰어난 개와 같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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