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향기/나의 살던 고향은
고향(故鄕)!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고 아련한 추억이 피어오른다. 고향을 떠난 지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고향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어인 까닭인가.
간혹 고향이 그리워도 여건상 자주 갈 수 없는 처지이지만 인터넷 이용이 보편화된 요즘에는 그나마 인터넷으로 고향의 소식을 접할 수 있어 적적한 마음을 달래준다.
내 고향 영양(英陽)은 산명수자(山明水紫)한, 고추 생산지로 유명하다. 또한 조지훈 시인, 오일도 시인, 소설가 이문열 선생을 배출한 문사(文士)의 고장이기도 하다.
막상 고향을 그리려니 아련한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내가 어릴 적에는(60~70년대) 대부분 생활 형편이 어려웠었다. 아이들은 검정고무신에 책보자기를 어깨에 둘러메고, 대개 왕복 십리가 넘는 학교를 예사로 다녔다.
마을사람 대부분은 농사를 주업으로 삼았으나, 간혹 교편을 잡거나 공무원도 두세 분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공무원이셨다. 소위 그 당시에는 면서기로 불리었는데 마을사람들은 보통 ‘김 서기’라고 많이 불렀다. 학교에 교편을 잡고 있거나, 면서기는 그 당시 마을의 유지로서 마을의 행정적인 대소사를 대행하기도 했고, 궂은 일도 많이 하였다.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을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올 때의 일이다. 대부분은 전기의 효용성을 이해하고 각 가정마다 전기를 들였으나, 끝까지 전기를 들이지 않겠다고 버티는 집이 더러 있었다. 마지막 한 집이 남았을 때의 일이다.
내가 살았던 마을은, 마을 한 가운데에 실개천이 흐르고 내를 경계삼아 윗마을, 아랫마을로 구분지어 오밀조밀한 제법 큰 마을이었다. 마지막으로 전기를 들인 그 집은 어른이 워낙 완고하신 분이라 아버지도 전기를 들이기를 설득하는 데 당신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다. 그 집에 전기를 들일 때는 나도 호기심으로 아버지를 따라 같이 방에 들어가보았다. 아마 저녁에 전기를 들인 걸로 기억하는데 호롱불 아래에 있다가 전기가 들어오자 마치 요술을 부린 듯 천지가 개벽한 듯 번쩍이며 밤인데도 대낮처럼 밝았다. 마당에 모여 있던 마을 사람 모두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마을에 전기가 처음 들어오던 그 때 그 시절, 지금은 까마득한 아련한 옛 추억의 그림자처럼 감돌지만 아, 다시 가고픈 그 때 그 고향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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