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은해사 -경북 영천군 팔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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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은해사 -경북 영천군 팔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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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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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원융정신이 숨쉬는 도량

  ①  위치와 주변 환경
  소백산맥이 한반도 남부 중앙을 지나면서 영, 호남 (嶺湖南) 을 갈라 놓고 동편인 경상북도 대구 일원에 작은 산맥 하나를 떨어뜨린다. 이 작은 산맥이 팔공산맥 (八公山脈) 인데 이 산맥은 팔공산 (八公山) 을 정점으로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다.
  은해사 (銀海寺) 가 위치한 곳은 팔공산의 주봉 (主峰) , 비로봉 (毘盧峰) 을 중심하여 남북쪽으로 산줄기가 완만하게 이어지는 팔공산 기슭, 경상북도 영천군 청통면 치일동이다.
  옛 신라인들은 이곳 영천 지방 (영천 금강산) 을 신라의 영지 (靈地) 네 곳 중 한 곳으로 꼽았으며, 은해사 산중에는 삼국통일의 일등공신 김 유신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영천 지방은 경상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장으로 손꼽히며 많은 문장가 (文章家) 들은 찬탄하는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렇듯 은해사는 주변 환경과 함께 기암석벽, 수목 등 참으로 아름답다. 계곡의 물은 금호강의 원류를 이루고 영천, 경산 일대를 적시고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은해사 교통편은 대구에서 1일 10여 회 있는 버스편이 용이하다. 

  ②  혜철선사와 창건의 배경.
  은해사의 창건에는 화엄사상 (華嚴思想) 과 호국사상 (護國思想) 이 깊이 깔려 있다. 그것은 은해사 개산조(開山祖) 이신 혜철선사 (惠哲禪師) 의 생애와 김 유신의 호국삼신 (護國三神) 의 전설과 왕실의 원찰 (願刹)이었다는 사실에서 이 절의 역사 속에 맥맥 (脈脈) 히 흐르는 정신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은해사는 통일신라시대 809년 (41대 현덕왕 1년) 에 혜철선사가 왕실의 발원으로 창전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해안평 (海眼平) 에 절을 짓고 해안사 (海眼寺) 라 하였는데 그 위치가 어딘지는 분명치 않다. 그 당시 사찰 창건은 왕명으로 금지 (애장왕6년:806년) 되었으므로 사찰을 새로 짓는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때인데, 그래서 은해사 (해안사) 의 창건은 그 옛날 삼국통일의 공신 김 유신의 수도 (修道) 사적지에 왕명으로 사찰을 창건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혜철선사는 16세에 출가하여 우리나라 화엄교학 (華嚴敎學) 의 초조 (初祖) 인 의상 (義湘) 대사가 창건한 영주 부석사 (浮石寺) 에서 화엄학을 배우고 22세에 구족계 (具足戒) 를 받고 해안사를 창건했다. 그 후 814년 (현덕왕6년)  당나라로 구법 (求法) 의 길을 떠나, 후일에 돌아 와 동리산파 (桐裡山派) 의 개조 (開祖)가 되었지만, 은해사 창건의 뜻은 화엄에 기초를 두었던 것이 분명하다. 

  ③  수 차례의 화재의 중창 중수
  은해사의 사찰 역사를 살펴보면 유난히 화재로 인한 피해가 많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긴 역사의 흐름 속에 확실한 기록은 알 수 없지만 현재 전하여 오는 기록을 살펴본다면 고려조 1264년 (24대 원종 5년) 에 크게 중수 한 후, 조선조에 들어와 1545년 (12대 인종 1년) 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 해 1546년 (13대 명종) 왕실의 시주로, 천교대사 (天敎大師) 가 현재의 터로 사찰을 옮겨 재 창건하고, 인종 (仁宗) 의 태실 (胎室) 을 봉하고 은해사 (銀海寺 : 이때 은해성 (城) 창이라 했다) 로 사찰 이름을 바꾸었다. 1563년(명종 18년) 다시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음 해 묘진 (妙眞건) 스님이 중창하였고,1589년 (선조22년)  법영 (法英하) , 의연 (義演고) , 광심 (廣心) 세 스님의 발원으로 일대 중창 불사를 하여 오늘날의 은해사 기본 당우의 골격을 이루었다. 1847년 (현종13년)  다시 화재로 소실된 것을 팔봉 (八峰) , 해월 (海月)  두 스님이 중수하였다. 

  ④ 산중의 김 유신 전설
  삼국유사에는 김 유신이 젊은 시절 삼신 (三神) 의 비호로 무사히 목숨을 건진 이야기가 전하여 오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지금 은해사 산중인 중암암 (中岩庵)  부근의 절벽 삼인암 (三印岩 ), 석탑 (石塔) 등이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 유신의 전생은 고구려에서 점을 잘 치기로 이름난「추남(楸南)」이었다고 한다. 일찌기 고구려의 국경에 거꾸로 흐르는 물이 있기에 기이하게 여기고 왕은 추남을 불러 연유를 물었다. 추남은「왕비가 음양의 도(道)를 역행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비가 크게 노하여 요망하다 하고 시험을 하여 틀리면 중형에 처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쥐 한 마리를 함 속에 감추고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추남은「이것은 쥐인데 그 수가 여덟 마리입니다」하였다. 한 마리를 여덟이라 하니 틀리다고 추남을 죽이고 쥐의 배를 갈라 보았다. 추남은 죽으면서 원(願)을 세우기를「내가 죽으면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하리라」하였다.
  그날 밤 왕의 꿈에 추남이 신라의 선현공  (舒玄公) 부인 품속으로 안기는 것을 보고 신하와 의논하여 김 유신을 죽이기로 하였다.
  그 후 자객 백석 (白石) 을 보내어 김 유신을 꾀어내어 고구려로 가던 중, 현 은해사 산중의 중암암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세 여신이 나타나 김 유신을 구해 주었던 것이다. 그 뒤에 김 유신은 고구려를 멸하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 후, 흥덕왕 9년 (834년)  이곳에 사찰을 별도로 창건하고 중암암이라 하였고, 김 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존하였다. 

  ⑤ 산중의 암자
  은해사 산중에는 여러 개의 대소 암자가 은해사 창건 이전, 이후에 있었으나 대부분 폐사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암자는 다음과 같다.
  운부암 (雲浮庵)  : 신라 성덕왕 2년 (711년) 에 의상 (義湘) 대사 창건이라 하나 의상대사의 생멸 연대와 맞지 않아 불분명하다. 여기에는 조선조 시대 조성된 보물 제514호인 청동보살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거조암 (居組庵)  : 신라 효성왕 2년 (738년) 원참 (元旵) 대사 창건으로, 영산전은 국보 제14호로 고려말, 조선조 초기의 건물로 명나라 사람 진 춘근 (陳春根 ) 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식 건축양식을 본 딴 국내 유일의 건물이다.
  중암암 (中岩庵)  : 신라 흥덕왕 9년 (834년)  심지왕사 (心地王師) 창건,
  백흥암 (百興庵) : 신라 경문왕 1년 (861년)  혜철선사의 창건으로 전해진다. 극락전의 수미단 (須彌壇) 은 보물 제486호로서 조선조 후기 작품으로 높이 1.25m, 폭 4.13m, 전면을 5단으로 구성하고 각단도 5등분하여 뛰어난 각법 (刻法) 으로 각종 새와 동물등를 조각하여 미술사의 중요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 비구니 육문 (六文)  스님의 외호 (外護) 로 40여 비구니 스님이 푸른 눈을 밝히고 있다. 

  ⑥ 오늘날의 은해사
  은해사가 위치한 팔공산 남동쪽 기슭 —-----, 주변의 산천경관이 아름다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관광이나 등산로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저 옛날 개산조의 화엄원융정신이 신라인들에게 호국의지의 큰 뜻을 심어준 도량이라는 것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지나는 길에 그냥 지나치지 말고 주춧돌, 기왓장 이끼에서 선인들의 체취를 느끼는 여유를 오늘에 되살려 미래의 등불을 삼았으면 한다. 일찍이 추사 김 정희는 은해사에 많은 글씨를 남겼고, 특히 불법광휘 (佛法光輝) 의 뜻으로 불광 (佛光) 이라는 현판을 대웅전 우측면에 남겼다.
  오늘날의 은해사는 주지 지성 스님을 위시하여 많은 스님들이 요체에 옹립한 산내 암자들 모두가 드높은 유법 (遺法) 과 문화전통을 간직한 웅대하고 수려한 가람들이다.
  오늘날의 은해사 스님들은 이 산중에 숨은 역사를 이어 받아 오늘의 불교에 새 빛이 되고 역사를 빛낼 큰 뜻을 불태우고 있다. 창건 이래 혜철선사를 위시한 수많은 선사들이 이 산중에 뿌린 씨를 꽃피우고 빛나게 할 것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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