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교포는 말하기를 「고국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남산(南山)쪽으로 고개가 돌아간다.」고 했다. 남산은 우리의 한(恨)과 혼(魂)이 서려 있는 산이다. 그러하기에 항상 우리의 가슴 깊이에 자리하여 왔던 것이다.
그 옛날에는 산의 모양이 누에머리와 같다고 해서 잠두산(蠶頭山)이라 했고 목멱산(木?山)이라고도 불리웠으며 헤아릴 수 없는 일화들을 간직하여온 산이다.
이태조(李太祖)는 한양천도(遷都)때, 정도전(鄭道傳)의 주청(奏請)을 받아들여 북악산을 진산(鎭山)으로 잡았고 남산을 안산(案山)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 이태조는 남산을 바라보면서 천 년 만 년의 태평성세를 기원하였으리라.
그러나 시세의 바뀜에 의해서 때로는 지사(志士)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하였으며 근세에 와서는 일제침략의 본산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거센 흐름 속에서도 남산은 언제나 겨레의 벗이 되어 주었고 한을 달래 주었으며, 어머니의 따사로운 손길이 되어 아픔을 어루만져 주곤 하여 왔다. 그리고 철갑을 두른 듯이 둘러싸인 소나무 숲은 우리의 높은 기상으로 상징되어 왔던 것이다.
남산의 본래 모습은 적송(赤松)으로 가득하였었다고 한다. 이러한 남산은 일제에 의해서 그 많은 소나무들이 어이없이 베어졌고 그 자리에는 일본의 국화인 벚꽃나무와 왜송 그리고 아카시아 등의 잡목으로 뒤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딱한 일은 조선신궁(朝鮮神宮)이라는 것을 남산 위에 앉혀 놓고서 일본산 소나무인 스기(杉)등을 가져다 심는 등을 가져다 심는 등 민족의 혼마저 짓밟으려고 몸부림쳐 왔다. 이러한 깊은 상처는 광복이 된지 40년이 흘렀건만 아직도 아물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철갑을 두른 듯이 빽빽이 자리했던 소나무는 오늘도 보이지 않고 다만 애국가 가사 속에서 노래될 뿐이니 말이다.
남산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이 귀적이 노래될 때마다 소나무 숲으로 울창했던 남산을 그리는 나의 마음은 다시없이 간절하고 착잡하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에 잠겨 보기도 한다. 식목일만이라도 남산에 소나무를 심는 국가적 행사가 있음직하지 않는가. 그리고 삼부요인(三府要人)들이 솔선해서 얼이 서린 남산에 소나무 한 그루라도 심는다면 보다 뜻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이러한 정성이 담겨 쌓일 때 상처 입은 남산은 머지않아 참 모습을 되찾게 될 것이며 우리의 높은 기상은 보다 부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와서 흐뭇한 낭보(朗報)가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서울시당국에서 임학자(林學者)인 임경빈(任慶彬)막사의 건의와 자문을 받아 들여서 남산을 소나무 숲으로 일구기 위한 연차계획을 세워 추진키로 하였다는 소식이다.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으나 참으로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당국에 의하면 현재 남산에 남나 있는 자생적송(自生赤松)은 수형(樹型)이 비교적 좋은 소나무는 겨우 일곱 그루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일곱 그루의 나무에서 종자를 재취하여 묘목을 기르고 식재하여 가꾸어서 남산을 본래의 적송나무숲으로 일구어 보겠다는 장한 발상이었다.
그간에 시당국은 여러모로 고심한 끝에 강원도산인 강송(剛松)묘목을 남산에 시험 재배하여 보기도 하였으나 토양이 맞지 않아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고, 결국 자생(自生)소나무 묘목으로 번식키로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시당국의 끈질긴 노력에는 반드시 좋은 결실이 있을 것이며, 아마도 10여년 후이면 남산은 솔숲을 이룬 수려한 모습을 드러내 보일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15년이면 서기 2,000년이다. 남산의 참 모습을 되찾게 될 2,000년. 그때 가서는 우리의 국민소득도 오늘의 2,000불선에서 5,000불을 넘어서게 되고 선진국 대열의 일원으로서 마음껏 국위를 떨쳐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다시금 그날의 남산의 모습을 그려본다. 솔숲으로 장관을 이룬 남산, 솔내음이 그윽한 남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