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과 자신을 위한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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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과 자신을 위한 춤
  • 관리자
  • 승인 2007.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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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가려뽑은 불교명시 4편 /조지훈의 「승무」

승무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요즘 흔히 ‘불교시’라는 용어를 쓰는데, 정작 ‘불교시’란 무엇인가?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시사(詩史)에 ‘불교시’가 존재한 적이 있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우리는 아무래도 확실한 대답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문예사조적 관점에서 본다면 한 문학유파의 형성에는 상당히 긴 시간과 경향이 같은 일군의 문인들과 이를 밑받침할 구체적 작품들이 필요하다. 갑오개혁 이전은 차지하고라도 최근에 있어서도 이런 성격의 불교시운동이 전개된 적이 있었던가?
불교시가 이처럼 우리에게 낯설고 모호하게 인식되는 데에는 몇가지의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불교가 종교라는 선입관 때문에 이에 바탕한 불교시는 교훈시나 포교시의 성격을 띨 수 밖에 없으리라는 속단이다. 실제로 기존의 불교시는 대부분 포교중심이어서 갈등 속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문학 본연의 자세에서 이탈했던 게 사실이다. 둘째로는 불교가 문인을 포함한 일반인들에게 너무 어려워서 접근을 용이하게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불교는 특히 인간적인 종교이자 사상이어서 관념에 머물지 않고 현실에 접목시킨다면 큰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터인데도, 이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불교시는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경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불교시는 아직까지도 개념이 명확히 파악되어 있지 않고 지속적인 문학운동의 소산도 아니어서 작가 개개인의 자연발생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이런 성격은 더 명확히 이해된다. 신라가요는 불교시의 순탄한 항해를 예고한다. 그 작가들은 빈부귀천 남녀노소 유무식의 구별도 없고, 가슴과 머리가 조화되어 최상의 문학을 기대하게 했다. 헌화가, 제망매가, 원왕생가, 모죽지랑가, 찬기파랑가, 처용가 등이 이에 속한다. 표기 수단이 없어서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서 표현한 것이 안타까울 뿐 , 유한한 인간의 삶을 절실하게 표현해 주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교훈성이 드러나지도 않았고, 비문학적인 요소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자문화가 밀려오면서 유식자와 무식자가 구별되고, 유식자의 문화적 사대로 창의성이 마비되고, 대다수 서민의 문화적 소외로 민족문화형성의 기반이 상실되었다. 이런 현상은 끊임없는 내우외환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지배층은 개인의 안녕에 급급했고, 피지배계층은 일차적인 세태풍자와 애상의 토로에 머물렀다. 또한 민이 깨어나기를 바라지 않는 통치자의 의도가 민족문화의 형성을 방해했다.
신라가요 이후 불교적인 내용의 시가는 교훈시류와 선시류로 대별할 수 있다. 전자는 민중과 연관을 갖는 것이었으나 교훈적인 것이어서 시대인의 아픈 삶을 대변하거나 위로하기에는 부족한 것이었다. 후자는 탁월한 정신력을 보이고 있으나 한시형식이고 극도로 압축된 상징시여서 일반인의 접근을 무척 어렵게 한다. 또 감정이 철저히 배제된 이성의 언어여서 세간과 출세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가교역할을 하는 시인의 언어로서 마땅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시는 한국시의 귀중한 광맥으로 무한한 여지를 안고 있다는 점에 착목해야 한다. 인간과 우주에 대한 투철한 인식은 한국시의 뼈대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인간의 무한한 의식을 탐사하고 조정하는데 불교 이상의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온 국민이 함께 공유하는 한글이 있고, 얼마간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지금, 고도의 ‘마음’을 시화할 가능성을 선시는 가장 많이 갖고 있다. 이런 가능성을 선시는 가장 많이 갖고 있다. 이런 가능성은 한용운에게서 단적으로 실현되었다. 조지훈을 말할 때 전통적 풍류시인, 국사(國士)시인이라고들 말한다. 전통적 시 속에는 불교성향의 시편들이 상당수 있다. 「고사(古寺)1」,「고사(古寺)2」, 「앵음설법(鶯吟說法)」, 「산」, 「화체개현(花體開顯)」, 「유곡(幽谷)」, 「범종(梵鐘)」등이 이에 속한다. 또 산문으로는 「방우산장기(放牛山莊記)」, 「속방우산장기(續放牛山莊記)」, 「수정관음(水晶觀音)」, 「비승비속지탄(非僧非俗之嘆)」, 「반야사상에 대하여」, 「방우산장산고(放牛山莊散稿)」, 「대도무문(大道無門)」, 「역일선담(亦一禪談)」, 「시선일미(詩禪一味)」 불교적 인생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가 혜화전문에서 수학하고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화엄경」, 「전등록」등을 탐독하고, 젊은 나이에 오대산 월정사의 외전(外典)강사를 지냈으며, 후일 동국대 부설 역경원의 역경위원을 역임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의 불교적 소양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가문이 유가요, 이에 바탕해 강강한 비판정신 민족정신이 유래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또 그는 우리의 선입견과는 달리 모더니스트, 생명파로서의 작품도 다수 갖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시「승무」는 그가 20세이던 1939년 발표작으로 「문장지」의 초회 추천작이다. 오랜 동안의 구상과 조탁 끝에 이루어진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의 하나이며, 한국인의 가장 사랑을 받는 시의 하나라고 한다. 세간을 벗어나 출세간에 진입하려는 비구니의 번뇌와 염원을 구체적인 춤동작으로 표현하였다. 세간의 눈으로 볼 때 젊고 고운 여인이 여승이 되어 승무를 하는 모습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래서 고깔로 가려져 있는 여승의 삭발한 머리를 ‘파르란’빛깔로 보기도 하고, 홍조 띤 여승의 볼에서 한층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 이는 세간의 미나 사랑이 영원한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출세간의 삶이 곧 행복일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부분의 인간들은 출세간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세간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이 시의 비구니도 출세간을 지향하면서도 세간의 인연을 다 털어버리지 못한다. 오히려 한없이 맑아지는 사념 속에서 세간의 인연들도 한없이 승화되는 것을느낀다. 진심으로 부처님을 부르면서 이 여승은 새벽이 될 때까지 춤을 춘다. 이는 ‘님’과 자신을 위한 춤이다. ‘님’은 세간에서 출세간의 존재로 변화하면서 한 개 ‘별’로 결정되고, 자신도 한 걸음 더 나아간 구도인이 된다.
이 시가 우리 국민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은 고도의 깨우침을 전하는 오도송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애상적인 정조에 호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승무는 바라춤과는 달리 불교의식무라기 보다 민속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파계한 스님의 고뇌를 형상화 한 것이라고도 전해진다. 그만큼 인간적이어서 세간인의 친근감을 불러올 수 있다. 이 시의 고운 비구니는 이런 세간인의 친근감을 가장 잘 유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가 한국불교시의 바람직한 예일까 하는데 에는 의문이이다. 여승의 맑은 염원이 정감적으로 처리되어 감동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도저한 인식을 수반하여 삶의 우뚝한 경지를 보여주었는가 하는 점에는 의문이다.
더러 이 작품을 선적 경지에 도달한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시의 불교적 성격은 인정하면서도, 선시라는 견해에는 반대이다. 먼저 이 시는 그 구성이 인공적이다. 무대가 설정되어 있고, 수미쌍관법을 따르고, 춤동작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고, 밤이 깊어 새벽까지 이르는 과정이 순서대로 나타나 있다. 또 이 시는 제작과정에서 현지답사, 승무도 감상, 무대공연 참관, 언어의 조탁 등 의도적인 노력이 많이 쏟아진 작품이다. 여기의 여승은 시의 주체라기보다 시인의 묘사대상이다. 따라서 심미적 대상이지 활연대오의 정신적 주체라고는 할 수 없다. 배경도 투명한 의식세계가 아닌 늦가을 밤이고, 주된 정조는 번뇌와 애상이다. 수도인이 종교적 참회와 불(佛)에의 귀의심이 간절히 나타나있긴 하지만, 선시 특유의 활달함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그가 이 작품을 쓸 때의 나이가 29세 미만이었으니, 경성오도의 선을 터득하기는 어려운 나이다. 불교서적에 대한 이해와 불교적 관심을 인정하더라도 아직 고도의 직관인 선을 인정할 수는 없다. 감각과 재능의 조숙이 곧 선으로 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는 우리 문화에 오래 영행끼친 불교사상과 번뇌 많은 여승이 주는 애상미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고전적 심미의식 계열의 작품이라고 보고 싶은 것이다. 같은 1939년 작인 「무고(舞鼓)」, 「고풍의상(古風衣裳)」등이 고전적 심미의식 계열의 작품이라는 점이 이런 견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이 시가 한국시에 끼친 불교의 영향을 보여주는 좋은 예의 하나가 된다는 데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세간과 출세간의 기로에서 번뇌하고 기도하는 여승은 곧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우리들 자신일 수 있고, 오염된 우리들의 삶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자극제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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