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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에 자리한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서 거의 40여 개 사찰에 달하는 말사를 거느리고 있으며, 해인총림 영축총림 조계총림과 더불어 4대총림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총림의 이름은 ‘덕숭총림’이다.
수덕사 대웅전과 수덕사 벽화는 각기 국보급에 해당하는 문화재로서 대웅전이 국보 49호이고, 벽화 또한 비록 모사도이기는 하지만 1308년에 그려진 것으로 40여 점이나 된다. 수덕사 조인정사 앞에 자리한 삼층석탑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로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인데 높이가 4미터나 된다. 그리고 산내 암자로는 견성암, 정혜사, 금선대, 환희대 등이 있으며 견성암은 비구니 선원으로 유명한 반면 정혜사는 비구 선원으로서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특히 경허 스님을 비롯하여 만공 스님이 주석했던 도량으로 참선하는 남자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도량이다.
이 수덕사가 창건된 기록은 정확하지 않고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는데 나는 그 많은 설화 가운데 수덕도령과 덕숭낭자에 관한 설화를 들고자 한다.
수덕사는 서기599년(백제 법왕 1년)에 지명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당시 덕숭산 아래에 ‘수덕’이라는 귀공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지체있는 가문의 젊은이로서 지위와 부를 겸비했었다. 특히 사냥을 즐겨하여 덕숭산에 올라가 사슴과 노루, 토끼등을 잡곤 했다.
이 수덕도령과 이웃한 마을에 ‘덕숭’이라는 예쁜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일찍이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할멈 한 사람과 함께 삯바느질이며 기타 허드렛일까지 도맡아가며 연명을 했다. 그러나 천성이 본디 아름답고 품격이 고매하여 인물 또한 출중하여 많은 젊은이들의 부러움을 대상이 되었지만 그녀는 눈길 한 번 주는 일이 없었다.
어느 날, 수덕도령이 몇몇 시종을 이끌고 덕숭산에 올라 노루몰이를 하던 중이었다. 수덕은 노루를 향해 힘껏 활시위를 당겼다. 곁에서 지켜보는 시종들도 땀을 쥐고 숨을 죽였다. 그런데 수덕은 당겼던 활시위를 놓을 생각을 않고 있었다. 거기에 어떤 여인이 서 있었던 것이다.
만약 노루가 그 자리에서 한 발짝 이라도 움직이기만 한다면 화살은 여인에게 꽂힐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덕은 활을 거두고 여인에게 다가갔다. 수덕이 다가가는 거리만큼 여인의 모습도 이상하게 멀어져만 갔다. 두 사람의 거리는 여전히 똑 같았다. 수덕이 말했다.
“낭자, 낭자는 어디 사는 뉘신데 이런 산 속에 계십니까?”
하지만 여인은 말 한 마디 없이 고개를 숙이고 모로 서 있었다. 수덕은 다시 가까이 다가갔다. 여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수덕은 가슴이 뛰었다.
“실례지만 낭자는 뉘신지요? 어찌하여 이 깊은 산 속에 계십니까? 행여나 길을 잃고 방황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여인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니옵니다. 소녀는 이 산 아랫마을에 사는 사람으로 조용히 명상에 들어 있자니 도령님께서 사냥을 나와 죄없는 소중한 생명을 빼앗게 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이곳에 온 것입니다. 소녀의 이름은 ‘덕숭’이라 하옵니다.” 수덕은 덕숭낭자의 말을 듣고 말했다.
“산짐승을 잡는 것이 잘못된 일일까요? 제 생각으로는, 짐승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니옵니다. 모든 생명은 다 소중한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아무 죄없는 산 목숨을 빼앗는 것은 크나큰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소녀는 이만···.”
말을 마치고 그녀는 산을 내려갔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수덕은 덕숭낭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체있는 집안의 도령으로서 함부로 나설 수도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덕숭낭자를 찾아가 청혼을 하고 싶었다. 그는 책을 펼쳤다.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어른거리는 것은 덕숭낭자 뿐이었다.
석 달 동안 상사병을 앓아오던 수덕은 할아범 한 사람을 대동하고 덕숭낭자의 집을 찾았다. 덕숭은 마침 집에 있었다. 그녀는 수덕도령을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어인 일이시옵니까? 이 누추한 곳까지 찾아주시니.”
“낭자! 저는 그때 낭자를 본 뒤로 지금까지 다만 낭자 생각뿐이었습니다. 감히 청하오니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하오나 결혼이란 어른들께서 결정하실 일이 아닌지요? 소녀는 어른들이 계시지 않으니 괜찮습니다만···.”
“저는 비록 어른들이 계시지만 저의 의견을 한껏 존중해 주십시다. 낭자!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덕숭낭자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소녀는 아직 혼인할 나이도 아니고, 또 무엇보다도 갑작스런 청혼을 받고보니 아무래도 걱정이 앞섭니다. 하오나 소녀에게는 청이 하나 있습니다. 도련님께서 저의 청을 들어주실 수만 있다면 도련님의 청혼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수덕은 침을 삼키며 다가앉았다.
“청이라니 그게 무엇이오니까? 말씀하소서. 무엇이든지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저의 부모님께서 일찍이 비명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모님을 위해서 절을 지어드리고 싶습니다. 그 청만 들어주시면 도련님의 아내가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문제 없습니다. 제가 비록 힘은 미약하오나 절을 짓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수덕도령은 다음날부터 덕숭산 기슭에 절을 짓기 시작했다. 벽돌을 찍고, 기둥과 서까래와 들보를 깎고, 주춧돌을 마련하고 그리하여 마침내 한 달 뒤에 법당이 완공되었다. 수덕은 그 길로 덕숭낭자를 찾았다.
“절이 완성되었습니다. 낭자! 저와 함께 절 구경을 가시지 않겠습니까?”
“하오나 도련님께서는 욕망이 가득한 마음으로 절을 지으셨습니다. 욕망을 끊고 오로지 신심에 의해서 지어진 절이라야 오래가는 법입니다. 보십시오.”
수덕은 덕숭낭자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덕숭산 기슭 새로 지은 절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수덕도령은 눈앞이 캄캄했다. 그는 다시 절을 짓기 시작했다. 또 한 달, 마침내 절이 완성되자 덕숭낭자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낭자의 집에 이르기도 전, 새로 지은 절은 다시 불이 나서 재로 화하고 말았다.
수덕도령은 당시 덕이 고매한 지명스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절을 짓기 시작했다. 한여름에 시작한 절이 두 번의 화재를 만나고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인 늦가을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 단청도 했고 벽화도 그려넣었다. 그는 절이 완성되는 동안 단 하루도 목욕재계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언제나 합장하고 오로지 염불삼매에 들어 있었다.
웅장한 대웅전을 바라보며 흡족한 마음을 가눌 길 없는데 덕숭낭자가 웃으며 다가와 옆에 섰다.
“이제야 소녀의 원이 풀렸나이다. 도련님, 이 은혜를 어찌해야 다 갚을 수 있겠는지요. 참으로 고맙습니다.”
수덕도령은 흐뭇한 마음으로 덕숭낭자에게 말했다.
“은혜라니요? 오히려 낭자 덕분에 저 또한 복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낭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어서 더욱 기쁩니다.”
수덕도령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덕숭낭자의 손을 덥썩 잡았다. 서기599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덕숭낭자가 살그머니 손을 빼며 말했다.
“우리는 아직 혼인한 사이가 아닙니다. 혼인한 뒤에 소녀를 거두어도 늦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혼인의 예를 올렸다. 그들은 신혼의 첫날밤을 맞았다. 신랑인 수덕이 신부인 덕숭을 안으려 하자 덕숭이 말했다.
“비록 부부지간이지만 잠자리는 따로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부부가 방을 따로 쓰다니요?”
“애욕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애욕을 떠나 우리는 도반이 되어야 합니다. 부부란 바로 도반입니다. 애욕을 초월하면 우리는 세세생생 부부가 될 수 있으나 애욕에 얽매이면 우리는 금생만 부부로 지낼 수 있습니다. 하오니 잠자리를 따로 하고 영원한 도반으로 지내심이 좋을 듯 합니다.”
하지만 수덕은 덕숭을 끌어안았다. 그런데 잡히는 것은 그녀의 버선 뿐, 그녀의 몸은 그곳에 없었다. 신혼집도 없어졌다. 다만 버선을 들고 있는 수덕 자신만의 모습이 황야에 서 있을 뿐이었다.
수덕은 낭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절이 세워진 산을 ‘덕숭산’이라 명명하고 자신이 낭자를 위해 지은 절을 지명 스님의 증명을 거쳐 ‘수덕사’로 명명했다. 그때부터 산 이름이 ‘덕숭산’으로, 절 이름이 ‘수덕사’로 불리게 되었다.
수덕사는 바로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 덕숭낭자의 청을 받아들여 수덕도령이 지은 절이다. 덕숭낭자는 수덕도령에게 불살생과 불사음의 불계를 심어준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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