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묘허 스님은 처음 뵈었는데도 친근하고 편안하였다. 때마침 사리를 분배 받으러 온 여러 스님들에게 사리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말씀을 듣다보니 “지장이여, 그대의 신력(神力)이 불가사의하며, 그대의 자비가 불가사의하며, 그대의 지혜가 불가사의하며, 그대의 변재가 불가사의라. 시방제불이 다 함께 그대의 공덕을 찬탄하며 천만 겁에 이르더라도 다하지 못하리로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스님이 회주로 계신 단양 방곡사, 신탄진 신흥사, 김해 원명사가 다 유명한 지장도량이다. 김해 원명사 지장보살상은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눈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이적을 보여 입소문이 자자한데, 방곡사에 모신 거대한 지장보살입상도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숙세부터 맺어진 지장보살과의 인연
“은사스님(故 화엄 스님)은‘아들을 의사로 만들어 독립운동가들을 돕겠다’는 모친의 권유로 오사카 의대를 졸업하셨지요. 이차대전 때 군의관으로 끌려가자, 모친이 매일 저녁 등을 밝혀 놓고 지장보살님께 기도하였는데, 어느 날 등이 잠깐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등이 없어졌던 바로 그날 밤 아들은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잠결에 뛰어나와 등불을 따라갔는데, 그때 미군들이 막사를 폭격하여 다 죽고 혼자 살아남아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한 이적을 체험하시고 일생 동안 지장기도를 하셨고, 은사스님도 어머니의 지장신앙을 이으셨습니다.”
은사스님의 뜻을 받들어 머무는 곳마다 지장도량으로 일구니 보기 드문 효 상좌라고 찬탄하니, 불가(佛家)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참으로 지중하다며, 숙세(宿世:전생)부터 인연이란다.
“어머님이 생남불공을 드렸는데, 꿈속에 노스님이 아기를 안고 나타나셔서 키우다가 돌려달라기에 꿈속에서도 자식을 갖고 싶은 마음에 ‘예’ 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경전에 의하면 지장보살은 머리를 깎은 스님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어머님은 지장보살님에게 얻은 아들이 결국 출가하고, 지장보살을 받드니 다 인연의 소치라고 하셨지요.”
불교에는 팔만 사천 가지 방편문이 있다. 그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지만, ‘고통에 빠진 중생들을 제도하고 그 모두를 성불시킨 뒤에 스스로 성불하겠다.’는 지장보살의 큰 서원을 현실 속에 구현할 때 고통의 사바세계가 그대로 평화로운 불국토가 될 것이다.
스님의 출가인연 또한 남다르다. 어릴 적에 아들이 없던 큰집의 양자가 되었고, 큰어머니가 교회를 다녀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 갑자기 병이 났는데 백약이 무효하였다. 병문안 온 분들이 ‘불공 드려 낳은 아들인데 교회 가서 잘못 된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절에 가면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집을 뛰쳐나와 열네 살 때 찾아간 곳이 상주 남장사였다. 병세는 씻은 듯 사라지고, 지금까지 건강하니 신비롭기만 하다.
사형들의 보살핌 덕분에 어려운 줄 모르고 행자시절을 보냈다. 강원에서 『고봉화상 선요』를 보면서 선방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노정기(路程記:부처님의 가르침)만 붙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강원을 졸업하자마자 선방으로 향했다. 화두를 들면 하루가 언제 가는 지도 모르게 시간이 흘렀다. 신심이 나서 열심히 공부했다. 스님은 공부는 공부꾼끼리 하는 이야기이며, 공부의 경지는 입만 떼면 십만 팔천 리 멀어지는 것이란다. 하지만 가장 깨닫기 쉬운 방법이 참선이요, 하면 된다는 믿음, 능히 도를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원력을 가지고 공부하면 다 된다고 하는데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마치 전설 속의 이야기 같은 경계는 그 때의 일이고, 지금은 지금 하는 일에 열심히 노력할 뿐입니다. 포도를 먹으면 맛있다는 것이 교(敎)요, 포도를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 선(禪)이라면 직접 포도 맛을 느끼는 게 깨달음입니다. 포도를 먹은 사람이라야 포도 맛을 알기 때문에 표현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불법을 올바로 가르치지 않으면 내 인생만 그르치는 게 아니라 남의 인생도 그르치게 된다, 수행력이 뒷받침되지 않고 말로만 포교하는 것은 껍데기 포교임을 역설하는 스님의 말씀이 마음을 울렸다.
채우면 넘치고 비우면 담긴다
“복만 짓고 혜를 닦지 않으면 깨닫기 어렵고, 수행만 하고 복을 짓지 않으면 덕이 없습니다. 함께 닦아나가야 합니다.”
어릴 적에 노스님들로부터 “명예나 돈, 권력을 쫓으면 사문이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기에 평생을 수좌로 살겠다고 원을 세웠다. 강원을 졸업하고 연이어 11하안거를 성만한 것도 다 그 때문이다.
“마음대로 뜻대로 안 되는 게 본업(本業)입니다. 신흥사 그 작은 절이 내 청춘과 내 인생, 수행을 잡아먹었지요.”라고 웃으면서 업이야말로 무서운 것이라고 한다. 선방에서 만난 도반 때문에 들렀던 신탄진 신흥사에서 선객의 운명이 바뀌어졌다. 신도들을 뿌리칠 수 없어 졸지에 주지소임을 맡았다. 18년 동안 신흥사를 일구면서 포교에 열심이었다. 그 후 한 불자의 큰 시주로 김해 원명사를 인수, 조계종단에 등록하고 8년 동안 주지소임을 맡았다. 성지순례에서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김해 원명사를 단독 시주한 불자, 또다른 불자가 부지를 기증하고 신도들의 성원으로 방곡사를 일구었다는 주위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 스님이야말로 복덕과 지혜가 구족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욕심을 채우려고 하면 넘치고, 비운 그릇에는 자동적으로 담기게 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다 자기가 지은 복만큼 사는 겁니다. 복은 구해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 것이라는 이치만 알면 없다고 괴로울 것도 없고 있다고 뽐낼 것도 없지요. 복 짓는다 하면 물질부터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물질로 복을 짓는다면 부자만 복을 더 지을 것입니다. 복은 물질의 다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생각 여하, 마음가짐에 달려 있습니다. ”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업밖에 없다는 스님은 인과를 믿는 불자들이 많아질 때 그만큼 이 세상이 평화로워진다며 불광출판부에서 펴낸 『오대산 노스님의 인과 이야기』를 고맙게 잘 읽었다고 칭찬해 주었다. 아울러 인과를 절대적으로 믿으면 수행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특히 스님들은 열심히 수행만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역설하는데 스님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인지라 더욱 절절하게 다가왔다.
수행은 나 스스로가 나를 구제하는 것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타력신앙인데, 불교는 내 인생의 창조주도 구세주도 나라는 것을 자각하고 수행하는 종교입니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미래사회의 희망은 수행의 종교인 불교에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불보살에게 매달리는 불자들도 많다. 그래서 스님은 더욱 수행을 강조한다. 수행하면 스스로 구제하는 자력신앙의 묘미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똑같은 거리라도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서 도착하는 시간이 다른 것처럼 수행에 속도가 붙어야 하고, 그러려면 일정기간 철저하게 선방에서 수행에만 몰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하는 후학을 위해 방곡사에 선원(무문관)을 짓고 있다.
신흥사와 원명사는 포교도량으로 만들고 방곡사는 후학들이 여한 없이 공부할 수 있는 터전으로 일구고 있는 스님의 원력에 수희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유서 깊은 절이라도 스님들이 수행을 하지 않으면 마구니 소굴이고, 초막일지라도 공부 잘하는 스님이 있으면 영험도량인 법, 스님이 머무시는 방곡사야말로 축복받은 도량이 아닌가. 스님의 원력에 힘입어 머지않아 완성될 이 도량의 무문관에서 출현할 눈 밝은 선지식들이 벌써부터 그립다. 한 부처님이 탄생하면 만 중생이 구제된다고 하지 않던가. 방곡사의 지장보살님도 불가사의한 위신력을 보태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