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장식 없이 오로지 흰색으로 구워낸 담백함과 어리숭하게만 생긴 둥근 맛”.
미술사학자 최순우는 달항아리를 이렇게 표현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대 디자인에도 사용될 만큼 한국 전통의 가치를 대표하는 상징이 된 달항아리. 17~18세기 조선에서 제작된 달을 닮은 백자는 미술가들에게도 한없이 영감을 주어 왔고 또 주고 있는 기물이기도 하다. 김환기, 최영욱, 주세균 세 명의 미술가들 손끝에서 환생한 달항아리들을 통해 한국 전통의 면면을 살펴보자.
| 김환기의 달항아리:
고요하고 다사로운 한국 클래식
달항아리 그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김환기 화백.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서구 모더니즘 열풍이 한창 불던 시기 일본에서 그림을 수학했던 그는 달항아리를 비롯한 조선 시대의 모티프들을 자신의 반추상작품에 도입하여 ‘한국적 모더니즘 회화’를 창시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던 인물이다. 직접 달항아리를 수집하고 늘 들여다보며 예찬하는 등 그의 달항아리 사랑은 남달랐다.
“나는 아직 우리 항아리의 결점을 보지 못했다. 둥글다 해서 다 같지가 않다. 모두가 흰 빛깔이다. 그 흰 빛깔이 모두가 다르다. 단순한 원형이, 단순한 순백이, 그렇게 복잡하고, 그렇게 미묘하고, 그렇게 불가사의한 미를 발산할 수가 없다. 고요하기만 한 우리 항아리엔 움직임이 있고 속력이 있다. 싸늘한 사기지만 그 살결에는 다사로운 온도가 있다. 실로 조형미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그가 처음부터 달항아리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사물의 본질을 화폭에 담고픈 욕망으로 기하학 추상을 실험해왔던 그는 1937년 귀국 직후 본격적으로 우리 전통 미술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조선 공예품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에 열중했던 일본의 근대 공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의 영향으로 촉발된 조선백자에 대한 관심이 지식인들을 사로잡고 있을 당시였다. 1930년대 중반 이후 김 화백을 비롯한 상당수의 화가가 조선백자를 그림의 소재로 삼기 시작했고, 해방 이후 민족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조선백자는 한국의 전통적 가치를 지니는 “클래식”으로 승격돼 오늘에 이르렀다.
이후, 국제적 미술계에 진출하고자 프랑스에서 머물며 작업하는 동안 김 화백의 달항아리 애착은 더욱 커졌다. 그에게 달항아리는 점차 ‘한국성’을 작품에 심기 위한 단골 소재가 됐다. 훗날 파리 시절을 회상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이란 강렬한 민족의 노래인 것 같다. 나는 우리나라를 떠나봄으로써 더 많은 우리나라를 알았고, 그것을 표현했으며, 또 생각했다.”
| 최영욱의 달항아리:
수더분하면서도 당찬 내 나라 내 뿌리
여러 겹 흰색을 겹쳐 칠한 캔버스에 살짝 도드라지게 달항아리 형태를 만든 다음, 달항아리 표면에 난 미세한 균열을 세밀한 실선으로 표현해 내는 최영욱 작가. 최 작가는 그의 달항아리 그림들을 ‘카르마’라는 제목으로 부른다.
“빙열(氷裂·도자기 표면의 균열)은 만났다가 헤어지고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는 우리의 인생길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의도한 데로만 가지 않고 어떤 운명 같은 것이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나는 그 운명, 업, 연을 선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큰 범위에서 그의 달항아리 역시 ‘한국 전통의 가치를 상징하는 클래식’으로서 그 생명력을 부여받았다. 2007년 최 작가는 학원 강사 생활을 청산하고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후 떠난 뉴욕에서 달항아리를 재발견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전시돼 있던 달항아리를 마주했던 순간이었다. 중국관이나 일본관보다 터무니없이 작은 한국관에 놓여 있던 달항아리에서 ‘보잘것없어 보이는 당당함’을 감지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30분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달항아리를 바라봤다… 밑에서 올려다보니까 달항아리의 당당한 기운이 딱 느껴져 깜짝 놀랐다. 마치 서울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처럼 늠름했다. 겉모습은 둥글고 수더분하지만, 속으로는 당차더라. 사람도 저렇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달항아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전업 작가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리라는 굳은 결심이 내 나라 내 뿌리에 대한 애잔함과 버무려져 달항아리를 다시 보게 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꾸준히 달항아리에 매달려 정진한 끝에 작가는 자신만의 차분하고 편안한 달항아리를 만들어냈고, 빌 게이츠 재단에 작품이 소장되며 지금은 인기작가의 반열에 올라 활발한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주세균의 달항아리:
전통에 대한 현대적 화답
한편 주세균 작가의 달항아리는 ‘전통’의 의미를 되묻는다. 그는 인터넷으로 검색한 국보 제309호 달항아리 이미지에 기반해 직접 백자를 성형한 후, 표면의 균열과 반점들은 연필로 모사했다. 2차원적 사진 정보에만 의존해 제작한 주 작가의 달항아리는 ‘진짜’ 달항아리와 분명 닮았지만 ‘가짜’임을 확연히 선언한다. 아주 성의있게, 그렇지만 애초에 선택해서는 안 되는 재료인 연필이
라는 ‘싸구려’ 재료로 완성된 그의 ‘가짜 달항아리’는 오롯이 보존되고 계승돼야 한다고 믿어지곤 하는 ‘전통’에 대한 재치 있는 말대꾸처럼 느껴진다.
“오래된 전통은 변하기가 어렵다. 나 역시 과거의 여러 유·무형적 학습을 통해 만들어진 관념과 기준들을 매일 새롭게 진행되는 현재의 변화에 맞추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현재의 불안함이 미래의 또 다른 전통이 된다고 생각하면 지금의 전통 또한 과거의 불완전함의 과정이기에, 알고 있는 것과 알게 되는 것들 간의 조율은 당연해 보인다.”
식민지와 냉전 시대의 아픔을 겪고 서구 모델을 따르는 급격한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추구할 수밖에 없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한국 전통의 의미를 물어야만 했다. 어느새 우리 정서 속에 깊게 자리 잡은 서양과 구별되는, 때로는 일본과 구별되는 ‘우리만의 고유성’에 대한 갈망. 그 목마름이 달항아리에 스며 있다. 코로나 사태에 잘 대처하고 있는 1등 나라로서 그 어느 때보다 대한민국이 많이 회자하고 있는 지금. 한 번쯤 물어볼 때다. 한국의 전통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에 자성(自性)이 있는지, 나의 달항아리는 어떤 모습인지.
이달의 볼 만한 전시
명상 Mindfulness
피크닉 | 서울
2020.04.24~2020.09.27 | 02)318-3233 | 예약 관람
명상의 힘을 회화, 영상, 공간디자인 등 작품을 통해 체험할 수 있도록 기획된 전시. 남산 아래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피크닉에서 잠시 현실적 고민에서 벗어나 의식의 바다를 헤엄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
포레스트 뮤지엄
KT&G 상상마당 춘천 아트갤러리 | 춘천
2020.05.15~2020.09.13 | 070)7586-0550 | 예약 관람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균류와 미생물, 동식물과 인간을 잇는 거대한 연결망인 나무를, 숲을 본다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관찰이며 관계에 대한 조망이다. 김이박, 엄유정, 조혜진, 한영진 작가의 숲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Towards - 김보희 초대전
금호미술관 | 서울
2020.05.15~2020.07.12 | 02)720-5114
상상과 현실 그 사이 어딘가의 풍경을 담당하고 편안한 화풍으로 그려내는 한국화가 김보희의 개인전. 자연이 제공하는 사색의 순간과 그러한 자연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50여 점의 작품을 만나보자.
글.
마인드디자인(김해다)
사진.
문화재청, 환기미술관, 최영욱·주세균 작가
마인드디자인
한국불교를 한국전통문화로 널리 알릴 수 있도록 고민하는 청년사회적기업으로, 현재 불교계 3대 축제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서울국제불교박람회·붓다아트페스티벌을 6년째 기획·운영하고 있다. 사찰브랜딩, 전시·이벤트, 디자인·상품개발(마인드리추얼), 전통미술공예품유통플랫폼(일상여백) 등 불교문화를 다양한 형태로 접근하며 ‘전통문화 일상화’라는 소셜미션을 이뤄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