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영의 조각은 유리창에 잠시 맺혔다가 사라지는 이슬 같다. 차 안의 따뜻한 공기와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유리창이라는 표면에서 수분이라는 재료로 맞닥뜨렸을 때 생기는 이슬. 곧이어 사라지거나 조건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탈바꿈하기도 하는 공기 중의 결정체. 이슬을 대수롭지 않게 ‘보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이슬을 ‘해석하려는’ 사람은 없다. 보거나, 보지 않거나. 이슬을 대하는 우리에게는 단 두 가지의 선택지가 존재할 뿐이다.
| 때론 모르는 게 약이다
아, 차가 참 맛이 좋다! 다음 순간, 패키지를 살펴본다. 브랜드도 산지도 가격도 살펴본다. 포털사이트에 검색도 한 번 해본다. 유명한 차일까? 어떤 종류의 차일까?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는 차일까? 슬슬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한다. 뭔가 거대하고 심오한 차의 세계에 갓 발을 들여놓은 입문자가 되어, 차에 관한 지식 1부터 100까지를 모두 파악해야만 이 차의 진가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예술을 난해하다고 느끼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눈앞에 놓인 이 작품이라 불리는 사물의 이면에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지식과 계보와 의미들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부담감 말이다. 물론 한 사물이 ‘예술’로 불리기까지 거쳐온 지난한 역사적 순간들이나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작품’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완전히 잊기란 어렵다. 그러나 내가 마시는 차의 정보를 알지 못한다고 하여 차 맛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다! 내 혀가 느끼는 맛에, 내 코끝에 와 닿는 향기에 조금 더 집중해보기를, 정서영은 ‘조각적으로’ 제안한다.
| 난해한 예술 앞에서 쫄지 않는 법
<테이블 A>를 보자. ‘이건 또 무슨 난해한 예술인고!’ 싶어 머리가 지끈거리는가? 그래도 괜찮다. 테이블 형태를 이루고 있는 이 ‘예술’을 읽으려 하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관찰’해보자. 명상하는 중이라 생각하면 좋다. 호흡을 관하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가만히 지켜보듯, 눈앞의 ‘예술’을 그저 관찰해보는 것이다.
커피 테이블에 쓰이곤 하는 커다란 원형 유리를 작은 스툴 의자 두 개와 나뭇조각이 받치고 있다. 나뭇조각 위에 또 다른 작은 나뭇조각들을 올려놓아 의자 두 개와 높이를 맞춘 모양이다. 유리판 위에는 세 종류의 또 다른 조각들이 놓여 있다. 고속도로 모양의 조각, 손가락이 꺾인 모양처럼 보이는 하얀 조각, 주먹 쥔 손 같아 보이는 검정 조각. 궁금해진다. ‘이 모양들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걸까? 고속도로와 주먹의 관계는 뭘까?’ 명상 수련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려본다. ‘해석하려 하지 말고, 관계 지으려 하지 말고, 그냥 바라보라.’ 내 눈앞에는 지금 정서영이라는 사람과 (아마도) 그의 조수들의 힘으로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바라캇 컨템포러리’라는 미술 전시장에 옮겨진 사물들이 있다. 무수한 인연들 - 작가 본인의 결심 (그리고 그 결심을 가능하게 했던 작가를 둘러싼 수많은 사건), 사물들의 역사 (의자와 유리판 등 사물들이 거쳐온 생산과 유통 과정들을 포함한), 미술 전시장이라는 공간의 역사 (한국의 미술 중심지와 다름없는 삼청동이라는 지역성을 비롯해 건축에서 미술을 따로 떼어내어 미술을 감상용으로 취급하기 시작한 ‘순수 미술’의 탄생사, 그리고 ‘순수 미술’의 개념을 수입하여 응용·발전해온 한국미술의 역사를 포괄한) 등 - 의 화합으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사물들은 바로 이 모양으로 나라는 사람과 마주하고 있다. 그뿐이다. 작품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 독해 불가능한 사물들 앞에서 쫄지 않을 수 있다. 이면에 숨겨진 ‘나만 모르는 상징과 비밀들’을 캐내려 하지 않을 때만, 논리정연하게 분석해서 ‘알려고’ 하지 않을 때만, 이 사물들은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평소에도 매 순간 ‘하필이면’ 자신이 그 장면을, 사람을, 사물을 보고, 거기에 있다는 특별한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고. 그런 마음으로 <우주, 코>를 보면 좋겠다.
“우주로 날아갈 때는 코를 빼놓고 간다”는 문구가 새겨진 세라믹 판이다. 문장을 구성하는 거의 무작위에 가까운 단어들, ‘우주’, ‘날다’, ‘코’, ‘빼놓다’가 여러 시적 감흥을 일으킨다. 작가가 왜 이런 문구를 쓴 건지, 종이에 펜으로 써도 되었을 것을 왜 세라믹이라는 매체를 이용한 건지에 대한 궁금증은 나중에 생각하자. 도자기 판 위에 번진 채 구워진 이 문구가, 미세한 깊이가 느껴지는 세라믹의 물성이 공기를 두드리는 소리를 우선 들어보자. 정 작가에게 사물이 조각되는 순간은, 의미를 구현해내기 위해 동원된 물질들이 전시장에 놓인 순간이 아닌, 사물과 나 사이에 일어나는 공명이라는, 찰나보다 긴 순간이기 때문이다.
|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었는데 하필이면
20매 정도 분량의 이 원고를 쓰기 위해 휘갈겨 쓴 200매 분량의 낙서를 훑어본다. 앞뒤 없는 읊조림과 오타들, 괴상망측한 단어들. 지금 보고 있는 이 원고는 그 가운데서 낚아챈 10%다. 10%를 위해 생략한 90%에 대해 굳이 말하는 이유가 미처 낚아채지 못한 나머지 180매의 낙서들에 혹시 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가치들에 대해 섭섭함을 토로하기 위함은 아니다. 오히려, 이 20매의 가벼움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럴 수도 있었고 저럴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넘기게 된 이 원고의 가변성 말이다. 정 작가가 가방 속 열쇠를 찾다가 무작위로 관계없는 물건들을 잡게 되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한 사진 작품인 <증거>에 보이는 ‘낚아채는 손’처럼, 이 글도 관계하는 모든 시공간적 인연들에 의한 화합물이다.
‘하필이면’ 이렇게 마무리되는, ‘하필이면’ 월간 「불광」 2020년 8월호에 실린, ‘하필이면’ 지금 바로 당신에게 읽히고 있는 이 글이 어떠한 공명이라도 일으킬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이달의 볼 만한 전시
관객의 재료
블루메미술관 | 파주
2020.04.25~2020.09.13 | 031)944-6324
돌이나 나무와 같은 전통적인 재료부터 빛이나 소리, 개념 등 작품 재료는 무한하다. 전시는 세상의 모든 재료를 사용하는 작품이 그보다 더 무한히 다양한 관객의 내적 재료와 만나는 모습에 주목한다. 예술을 통해 내 안에 품고 있는 ‘재료’를 만나보자.
김신일 개인전: In Between Five Colors 오색사이
갤러리시몬 | 서울
2020.07.04~2020.08.08 | 02)549-3031
생각으로 개념 지을 수 없는 무한한 것들이 살아 숨 쉬는
‘사이의 공간’에 집중해온 김신일 작가의 개인전.
다섯 가지 색깔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섬세한 세상을 관조하는 작가의 시선을 함께 느껴보자.
기산 풍속화에서 민속을 찾다
국립민속박물관 | 서울
2020.05.20~2020.10.05 | 02)3704-3114
19세기 말 20세기 초,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의 작품 340여 점이 전시된다. 조선을 다녀간 외국인들에게 주로 판매된 그의 그림들은 현재 서구 미술관과 박물관에 단일작가로는 최다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동서양의 교차하는 공간으로서의 기산의 그림들을 만나보자.
글. 마인드디자인(김해다)
사진. 바라캇 컨템포러리 제공
마인드디자인
서울국제불교박람회, 붓다아트페스티벌을 8년째 기획·운영하고 있다. 최근에 오픈한 명상플랫폼 ‘마인드그라운드’를 비롯해 전통사찰브랜딩, 디자인·상품개발(마인드리추얼), 전통미술공예품 유통플랫폼(일상여백) 등 다양한 통로로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우리다운 문화콘텐츠 발굴 및 활성화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