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날레 등 지역 행사에 가면 가장 먼저 해당 지역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가를 보게 된다. 부산비엔날레에서도 그랬다. 부산의 지역성을 비엔날레가 어떻게 담고 있을지가 궁금해 부산비엔날레를 찾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 하고도 반나절 꼬박 부산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는 부산현대미술관, 영도, 부산 원도심 일대를 모두 둘러봤다.
| 지역성이라는 이름에 내민 도전장
문자로 그림을 그리고 익숙한 관용구들에 독특한 조형성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작업을 해온 스웨덴 작가 칼 홀름크비스트(Karl HOLMQVIST)는 이번 부산비엔날레에 한글을 이용한 작품을 몇 점 선보였다. 누런 종이 위에서 의미와 소리, 자음과 모음이 모두 따로 노는 장면은 묘한 재미를 줬다. 한글을 모르는 작가가 서툴게 따라 ‘그린’ 한글은 익숙했던 한글을 낯설어 보이게 하는 효과를 내기도 했다. 흔히 선험적 관념을 상징하는 ‘문자’의 상투성을 아주 단순하지만 명쾌한 방식으로 깨는 그의 작품은, 부지불식간에 있다고 믿게 되는 ‘지역 정체성’이라는 개념에 유쾌한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듯 보였다.
도시 공간을 인식하게 하는 건물의 벽과 같은 표면적인 요소들로 도시의 스펙터클을 드러내거나 공간의 본질을 묻는 작업을 해온 박상호 작가 역시 지역 정체성에 관한 근본적 질문을 상기시켰다. 파리하면 에펠탑을 떠올리면서도 에펠탑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히 그려내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처럼, 개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 도시에 대한 이미지는 실제를 정확히 반영하기보다는 고착화되기 마련이다. 그가 차용한 건물의 외피들도 그럴듯하게 만든 것일 뿐 실존하는 건축물을 완벽히 복제하고 있지는 않다. 영화 세트장과 같이 외양은 유사하나 건축적으로 아무런 쓸모가 없는 파사드(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들. 박상호 작가의 조각들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장소의 실체가 정녕 존재하는지, 속 빈 껍데기만 가지고 지역성을 정의하려 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있었다.
| 지역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선
코로나로 여행이 어려워진 시대, 부산비엔날레에 초대받은 덴마크 작가 라세 크로그 뮐레르(Lasse Krogh Møller)는 부산으로의 ‘언택트’ 여행을 시도했다. 두 발로 직접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하곤 했던 그가 이번에는 책상 위에서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자신을 대신해 부산을 답사해 줄 사람들을 찾은 그는, ‘대리 탐험가’들의 도움으로 부산 곳곳을 여행할 수 있었다. 그와 그의 대리 탐험가들이 부산을 보여주는 방식이 무척 흥미롭다. 그(들)에게 부산은 맨홀 뚜껑 사이에 껴 납작해진 장갑이고, 영도·송도와 다대포 바다로 가는 길을 그린 작은 약도이며, 누군가 쓰다 버린 칫솔이고, 타다 남은 담배꽁초이다. 몸으로 직접 체험하지 못한 여행이어서 그랬을까. 그(들)의 수집품 목록에 오른 일상적이고 사소하며 잡다한 물건들은 하나같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권용주 작가는 방수포, 포장 천막, 스티로폼, 인조 식물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쌓아 올린 구조 위로 물이 뿜어져 나오는 인공폭포를 선보였다. 도록에 실린 인터뷰에서 그는 “삶의 현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임기응변의 생존 에너지”라는 표현으로 작품을 설명했다. 그에게 부산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폭포수, 말 그대로 인공폭포와 같은 생명력을 지닌 삶의 현장이다. 화려하거나 장식적이기보다는 되는대로 물을 뿜어내며 파괴적 생명력을 드러내는 인공폭포는 어둑어둑한 영도 창고 안에서 커다란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 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공기 안의 수증기가 조건에 따라 응결되어 생겨나는 구름처럼, 세상 만물은 온갖 인연과 계기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질 뿐 실체적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바로 본무자성(本無自性)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불가의 유명한 시구이다. 지역과 그 지역에 삶의 터전을 이루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별함과 생명력이 ‘실체적 지역성’을 찾고자 하는 무의식적 추동으로 인해 가려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 2020부산비엔날레는 지역 행사임에도 지역성이라는 구호에 매몰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의 실체 없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부산을 더 잘 느끼게 만든 멋진 행사였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구름처럼, 실체 없는 것을 표상하되 그것에 갇히지 않는 것. 2020부산비엔날레가 부산을, 지역을 말하는 방식이었다.
이달의 볼 만한 전시
빌 비올라(Bill Viola): 조우
부산시립미술관 | 부산 | 2020.10.21.~2021.04.04 | 051)744-2602 | art.busan.go.kr
이우환 작가와 미술사적 맥락을 함께하는 작가들을 소개하자는 취지로 기획된 부산시립미술관 연례 기획전 <이우환과 그 친구들>이 올해에는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와 함께한다. 동양 사상에 기반한 빌 비올라의 독특한 비디오 아트를 한자리에서 만나보자.
이퀼리브리엄: 인간과 환경의 경계에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 | 2020.11.20~2021.03.14 | 1899-5566 | www.acc.go.kr
‘이퀼리브리엄’은 생태계 종의 종류와 수량이 항상 균형을 이루는 평형 상태를 지칭한다.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기후변화와 환경 이슈에 주목하는 한국, 대만, 베트남, 인도네시아 출신 작가들의 평화와 공존에 대한 시각을 만나볼 수 있다.
서동진 vs 함양아: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 서울 | 2020.10.20~2021.02.14 | 02)2124-8800 | sema.seoul.go.kr
작가 함양아와 평론가 서동진이 ‘오늘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주제로 대화를 시도한다. 이들은 불안을 잠식시키고
가볍고 밝은 삶으로 향해갈 방법은 스스로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둘의 생각과 태도를 살펴볼 수 있는 작품들이 전시된다.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 전시장이 휴관했거나 예약제로 운영 중일 수 있습니다. 방문 전 꼭 확인하세요.
글. 마인드디자인(김해다)
사진. (사)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 제공
마인드디자인
서울국제불교박람회, 붓다아트페스티벌을 8년째 기획·운영하고 있다. 최근에 오픈한 명상플랫폼 ‘마인드그라운드’를 비롯해 전통사찰브랜딩, 디자인·상품개발(마인드리추얼), 전통미술공예품 유통플랫폼(일상여백) 등 다양한 통로로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우리다운 문화콘텐츠 발굴 및 활성화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