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국과 불교] 죽은 자를 위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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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국과 불교] 죽은 자를 위한 공간
  • 홍병화
  • 승인 2021.10.27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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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침사와 분암, ‘억불숭유’ 명분 내세운 조선 초 지배층의 현실

왕릉 수호 사찰 ‘능침사’의 시초 

권력자일수록 죽은 후 큰 무덤을 만든다. 권력자들 역시 사후세계를 믿었고, 무덤의 크기는 곧 권력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불교와 같은 고등종교의 수용으로 세련되게 다듬어지면서 체계화되기에 이른다.

중국에서 불교는 유교와 도교에 비해 늦은 외래 종교이지만, 남북조(南北朝)시대를 지나 수(隋)·당(唐)대를 거치면서 유교, 도교와의 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된다. 유교는 사상적 체계가 국가 운영에 적합해 선화(善化)됐지만, 생활 속에서는 불교보다 괴리감이 컸다. 유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효에 대해 불교는 정돈된 내세관을 내세워 선망(先亡) 부모의 명복을 비는 방식으로 손쉽게 자리 잡았다.

능침사(陵寢寺)는 왕릉을 수호하기 위해 설치된 사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5세기 초엽에 세워진 고구려 개조 동명왕릉(東明王陵) 앞에 있는 정릉사(定陵寺)가 현재까지 알려진 최초의 능침사다. 

평양 진파리 고분군의 전(傳)동명왕릉과 정릉사지,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최근 동북아 최초 능침사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논의에 따르면, 발견된 유구로만 보자면 고구려가 중국보다 더 이르다. 물론 다양한 이견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여러 학설 중 하나로 받아들이는 게 현명한 태도다. 하지만 현재까지 동북아시아의 최초 능침사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고구려 절터는 관심이 집중되는 유적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나라가 불교를 아무리 능동적으로 수용했다고 하더라도 지정학적인 한계로 불교의 전래가 중국보다 빠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고구려의 능침사 사례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불교라는 종교의 학문적 성격과 이를 누릴 수 있는 계층이 종교의 유입 초기일수록 지배층이라는 사실을 보면, 불교는 주로 집권층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불교는 교리적 속성상 점차 널리, 점차 밑으로 스며들었다고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삼국 중 불교의 수용이 가장 늦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 따라서 능침사에 관한 객관적 증거도 삼국 중 가장 늦은 시기의 유적들에서 확인된다. 기록에 의한 근거보다는 유구나 유물의 비교를 통해 시기를 추정하자면, 백제 능사와 비슷하거나 혹은 조금 늦은 시기라고 할 수도 있다. 경주 서악동 고분들과 주변 애공사지 등이 그 실례이다. 물론 기록을 통해 능침사로 확인된 사찰들은 이보다 늦은 문무왕(재위 661~681)의 감은사와 신문왕(재위 681~692)의 황복사, 원성왕(재위 785~798)의 숭복사 등이다.

 

능침사의 공백기

왕조 시대가 이어지는 동안 왕조는 바뀌더라도 능침사와 같은 불교의 역할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고려시대에는 능침사에 관한 기록이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도 개경 봉은사에 있는 태조 진전(眞殿, 임금의 초상화를 모신 곳)을 중심으로 신앙화되다시피 한 태조에 대한 진전의례가 일찍부터 자리 잡았고, 왕실이 주관하는 불교행사 등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행해졌던 것과 관련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고려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위상에 비해 능을 관리하고 산릉에서 명복을 비는 의례가 행해졌다는 기록이 없다는 데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광종(재위 949~975)의 헌릉(憲陵)에 정자각(丁字閣, 왕릉 앞에 지어진 ‘丁’자형의 제사 건물) 유구가 확인됐고, 강화에 있는 원덕태후(?~1239)의 곤릉(坤陵)에서도 정자각 터가 발굴됐다. 

헌릉과 정자각 유구(대정 5년 고적조사보고서, 김동욱 논문에서 재인용).

이를 볼 때 산릉제사를 치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고려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보면 산릉제사는 왕이 참여하는 제사가 아니라 관리에 의해 설행되고 일상화된 제사로, 왕실에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또한 산릉제사의 형식과 성격도 어떤 방식으로 설행됐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고려시대에도 정자각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조선 초 국가가 치러야 하는 기본적인 의례의 방법과 절차를 정해 놓은 책인 『국조오례의』에 의해 국가제사가 정비되기 전까지는 고려와 조선의 산릉제사는 서로 비슷했을 것이다. 장소와 건축이 같고 치러야 하는 의례의 목적이 같다면 절차와 방식도 유사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민왕(재위 1351~1374) 대에 가서야 능침사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찰이 처음 확인되는데, 바로 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 또는 연복사(演福寺)로 더 잘 알려진 운암사(雲巖寺)다. 이처럼 능침사가 고려 말에 이르러서야 등장하는 것은 중국 내의 군사적 혼란과도 관계가 있다. 중국 능침사의 운영도 수·당을 거쳐 북송으로 이어진다. 13세기 말에야 원이 남중국까지 정벌하면서 남중국과 자유롭게 교통할 수 있게 된 것과 고려 말에나 능침사가 다시 이어진 이유가 연관됐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와 나란히 쌍릉으로 조성된 공민왕의 능이 이후 조선 왕릉제도에 모범이 됐다. 공민왕 생전 노국대장공주 능의 능침사로 운암사를 지정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운암사의 능침사로서의 역할도 다른 능제(陵制) 요소와 더불어 조선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운암사가 능침사로 지정되기까지 곡절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 정확한 사정까지는 알 수 없다. 고려 말 공민왕 대에 능침사가 다시 조영되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밝혀야 할 과제다. 다만, 공민왕릉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최초로 장명등(長明燈)을 사용하고 다양한 석물을 배치하는 등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능역을 장식하면서, 이러한 스타일이 이후 조선왕릉의 모범이 됐기 때문이다.

북한 국보 제123호 공민왕릉 현릉과 정릉.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와 나란히 쌍릉으로 조성됐다. 북한 개풍군 해선리 무선봉의 산중턱에 자리했다. 

 

짧지만 강한 능침사의 귀환

고려시대의 긴 공백기를 우회하듯 이어진 능침사의 전통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오래가지는 못하는데, 이후 조선이 성리학 국가로 정비된 까닭이다. 따라서 그동안 묵인하던 불교식 제사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취하게 되고 능침사 혁파의 요구가 거세진다.

조선 초 능침사에서 지낸 불교식 제사의 내용은 간접적으로 전하는 기록으로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중종실록』에 실린 기사를 보면 왕과 비의 위판(位版, 죽은 사람의 위를 모시는 나무 패)을 가져와 부처에게 절을 시키는 것은 물론, 숨겨야 할 임금의 이름을 함부로 써 붙여 놓는 등 불경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기록한다. 이 외에도 위판을 목욕을 시키는 등 왕과 비가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는 중종 3년(1508)에 설행되는 사찰 기신재(忌晨齋, 기일 새벽에 지내는 불교의례)를 참관한 신하들의 표현인데, 왕이라고 해서 특별한 방식으로 명복을 빌어준 게 아니라 불교식 천도재의 영가(靈駕)가 왕과 왕비였던 것이다. 이 시기는 본격적인 기신재 폐지 주장이 나오던 시기라서 사찰에서는 참관하러 온 신료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신재의 과정에서 보기에 불편한 요소를 미리 순화했을 텐데도 신료들의 눈에는 제사의 과정이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망극함이었다.

이때는 이미 개국 후 100년이 훨씬 넘은 시점이고 『국조오례의』가 편찬된 지 40여 년이 지난 후임에도 산릉제사를 이렇게 지냈다고 하니 조선 초는 어땠을지 짐작 간다.

 

조선 사대부의 능침사, 분암

왕실에 능침사가 있었다면 귀족에게는 분암(墳庵)이 있었다. 중국에서 초기 능침사는 황실만의 상징이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귀족들 역시 같은 이유로 가문의 무덤을 관리할 사찰의 필요성을 느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당대를 거쳐 송대에 이르러서 ‘墳寺(분사)’라는 형태로 구체화됐다.

우리나라 귀족도 자신의 가문 무덤을 관리하고 조상들의 명복을 빌어주는 역할을 사찰에 맡겼다. 이를 짐작할 수 있는 사례로 고려 초 인주 이씨 가문과 법상종 사찰들과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이들의 관계처럼 고려에서도 유력한 가문과 사찰이 송의 분사와도 같은 사찰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짐작한다. 다만 중국의 사례처럼 ‘墳寺’라고 불리지만 않았을 뿐, 이와 같은 요구와 이에 부응하는 역할을 하는 사찰은 많았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대륙의 영향을 안정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원이 남중국을 정벌한 13세기 말 이후다. 고려시대가 능침사의 공백기였다고 해서 분사나 분암과 같은 불교와 귀족 간의 관계도 공백이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이미 우리나라는 사찰을 제사만이 아닌 수기(修己, 스스로 수양함)의 장소로도 사용하고 있었고, 유력한 가문일수록 사찰이 포함된 생활공간을 누리는 게 특별한 경우가 아니었다. 특히 고려 후기에 이르러 사찰이나 암자를 글 읽는 장소로 삼는 일은 유학자들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직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고려 후기 유행한 별장(別莊)과 분암은 밀접하게 관련됐을 것이다. 이처럼 별도의 거처를 정해 쉬고, 손님을 맞이하고 책을 읽고자 했던 유행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현실적으로 수묘(守廟, 무덤 관리)와 추천(追薦, 명복을 빎) 장소의 필요성과 결합하게 됐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분암은 고려시대 별장의 성격과 같은 연장선상에서 파악해 볼 수 있다.

이처럼 능침사와 분암은 조상숭배라는 유교적 가치관과 정돈된 내세관을 제시할 수 있는 불교의 접점에서 시작된 동북아시아의 특징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억불과 숭유라는 완고한 입장을 견지하며 출발한 조선의 개국이었음에도 분명하게 능침사를 혁파하지 못한 것은 호불적 성격이 강한 왕실의 힘이 더 컸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찰을 이용하는 조상숭배의 습관이 다른 대안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을 만큼 뿌리 깊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조선은 선언을 통해 사회를 성리학이 지배하는 나라로 만들려 했지만, 개국의 주체조차 대부분은 불교적 정서에 깊이 젖은 표리부동한 인간으로 한동안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조선 초의 현실이었다. 

 

홍병화
건축학박사로 전국 전통사찰 전수조사 책임연구원·서울시 문화재위원회 건축전문위원·조계종 포교원 전문포교사 교수 등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시 은평구 한옥위원이자 건축사사무소 상상재에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 『전통건축구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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