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품은 지리산] 선불교의 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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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품은 지리산] 선불교의 요람
  • 효신 스님
  • 승인 2021.12.28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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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 불어온 조사선풍祖師禪風

종착지, 그곳은 우리 여정의 짐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공간을 기대하게 한다. 그래서인지, 백두산이 흘러내린 산이라 해서 두류산으로 불렸던 백두대간의 종착지 지리산은 넉넉하고 부드러운 품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실상은 다기다양한 웅대한 산악 지형으로, 마치 중생의 번뇌처럼, 길을 잃어버리면 헤어나올 수 없는 고난도 미로의 공간을 지녔다. 

미로의 꼬여 있는 길은 번뇌와 보리의 한끗 차이를 몸소 보여주는 듯하고, 여기에 명료한 해답을 주려는 듯 천 개가 넘는 크고 작은 절들이 있다. 선(禪)의 종지만큼 단순하고 명료한 가르침이 있겠는가? 선의 가람이 최초로 창건된 곳이 바로 여기 지리산이다.

지리산의 방위는 천왕봉을 축으로 한 북서남동, 또는 산의 주능선을 기준으로 한 남북으로 잡을 수 있다. 주능선이 기준이 된 남북은 각각 겉과 속으로, 남쪽 겉지리에는 큰 절이 많고 북쪽 속지리에는 작은 암자와 민간신앙 당[巫堂]들이 산재한다. 이는 고대국가의 형성 시기부터 산신신앙의 대상으로 부각된 지리산의 특성을 말해준다. 

이제 천왕봉의 북서남동쪽 길을 따라, 지리산이 품고 있는 선지(禪旨)를 구하는 여정을 떠나보자.

실상사 홍척 스님 부도. 
설악산 진전사에는 도의가, 남쪽 지리산에는 홍척이 법을 전했다.

 

실상산문

천왕봉에서 북서쪽으로 향하면 우리나라 맨 처음 선문을 개창한 가람인 실상사에 도착한다. 너른 평지에 자리한 이곳에 구산선문의 초두 실상산문을 연 이는 홍척 선사다. 홍척은 당나라에 유학해 마조 문하였던 서당지장 밑에서 16년의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다. 2년 후 흥덕왕 3년(828), 지리산으로 와 산문을 열었다. 원래는 지실사(知實寺)였으나, 홍척의 시호인 ‘실상선정국사(實相禪庭國師)’의 앞말을 따 고려 초부터 실상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실상산문은 여타의 구산선문이 지방호족들의 도움을 받았던 것과는 달리 왕실의 비호 아래 선풍을 일으켜 급격히 성장했다. 

이는 홍척 선사가 흥덕왕과 선강 태자를 제자로 맞아 왕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민애왕, 신무왕, 문성왕, 헌안왕 등이 실상사에 머문 기록을 통해서도 왕실과의 돈독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교학이 주류였던 당시 분위기로 보면 민중보다는 새로운 사상에 개방적인 왕실에서 더 용이하게 접근했을 것이다.

홍척 선사보다 서당지장의 법을 먼저 받고 온 이는 가지산문의 시조인 도의 선사이다. 5년 먼저 귀국한 도의는 설악산에 은둔했기에 비록 선찰(禪刹)을 홍척보다 늦게 세웠지만, 개인적 선의 가르침은 먼저 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을 가리켜 북산의 남악척(北山義南岳陟)이라 하는데, 북쪽 설악산 진전사에는 도의가, 남쪽 지리산 실상사에는 홍척이 법을 전했다는 뜻이다. 

홍척의 선문은 몰념몰수(沒念沒修)고, 도의는 무념무수(無念無修)인데 결국 한 스승의 문하였음을 보여주는 선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대비된 성향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은둔의 수행을 택한 도의와는 달리 국사로 활동한 홍척은 매우 활발한 기질이었을 것이다. 홍척은 흥덕왕의 초청으로 830년 무렵 경주로 갔다가 836년 설악산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의 문하에는 수철을 비롯한 1,000여 명의 제자들이 있다.

실상사 위로 올라가면 암자인, 백장암(옛 이름 백장사)이 나온다.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一日不作一日不食)’의 『백장청규』로 유명한 백장회해의 이름을 딴 절로, 실상산문 스님들의 선방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실상사가 폐허가 된 후, 약 200년 동안 실상사의 스님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실상사가 소장 중인 홍척 스님의 제자 편운 화상 부도의 명문 탁본. ‘정개(正開)’라는 후백제 연호를 쓴 유일한 기록이다.
홍척 스님 부도 탁본, 실상사 소장

 

벽송지엄

실상사에서 동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대원사를 향하는데, 그 사이 간방(북동)인 함양 마천 쪽에 벽송사가 있다. 간방의 터는 풍수에서 하늘의 시장을 뜻하는 별자리 천시원(天市垣)을 향하기 때문에, 재물과 재화가 풍족하고, 이를 기반으로 인물이 많이 배출된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예부터 은둔자들은 주로 간방의 자리로 향하곤 했다. 불교 탄압이 기성을 부리던 조선시대에 이곳에 숨어들어와 조선의 선풍을 일으킨 이가 바로 벽송지엄이다. 벽송사는 지엄의 당호에서 비롯했다. 

허백당 성현의 『벽송당기(碧松堂記)』에 소나무에서 당호를 취한 이유가 언급돼 있다. 지엄은 성현과의 대화에서 ‘소나무의 견고하고 변치 않는 성품은 불법의 도를 증명하는 것’이라 했다. 

그 본원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중생이 모두 선에 교화되는 바이고, 소나무의 가지와 잎이 층층이 층을 이뤄 무성히 자람은 우리 중생이 모두 큰 지혜를 우러러 그 지혜에 의지하고 비호받는 이치와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허백당에게 “세상 어느 곳엔들 산이 없겠으며, 어느 산엔들 소나무가 없겠습니까. 내가 가는 곳이라면 소나무가 따르기 마련이니, 소나무와 나는 바로 한적한 가운데 만난 벗입니다. 소나무는 무진장한 것이라, 취하여도 고갈되지 않고 써도 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소나무를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라며 푸른 소나무처럼 선 수행이 끊어짐 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비쳤다. 

벽송사 장군송

원통전 뒤 언덕에 있는 두 그루의 도인송과 미인송은 지엄의 말을 상기시켜 준다. 특히 부용만개(芙蓉滿開), 청학포란(靑鶴抱卵)의 풍수 입지로 조산과 안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벽송사 법당의 경관은 요즘 SNS상에서도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인기가 높다.

지엄 스님은 태어날 때부터 큰 골격과 날렵한 몸을 지녀, 무예에 뛰어나고 병서를 좋아하는 무관 출신이었다. 1492년, 여진족과 싸워 큰 공을 세웠으나 살생에 허무함을 느껴 28세에 계룡산 상초암으로 출가한다. 이후 황악산의 벽계정심 스님을 찾아가 그 법을 잇는다. 

정심 스님은 명나라로 유학해 임제종의 법맥을 이었으나, 연산군 시대의 척불 정책으로 황악산에서 재가자 모습을 한 채 땔나무를 장에 내다 팔며 숨어 지내고 있었다. 이런 그를 지엄이 찾아와 법맥을 잇게 된다. 훗날 지엄의 문하로 청허휴정(서산), 부휴선수, 송운유정(사명), 청매인오, 환성지안 등이 배출돼 조선 선의 종가를 이루게 됐다. 

안거 기간에 스님들은 선방으로 온다. 동안거 기간 8명의 스님이 결제 중인 벽송사 선방.

지엄은 솥을 아홉 번이나 걸고 깨달음을 얻었던 구정(九鼎) 선사와 같은 배움의 길을 걸었다. 스승 정심은 지엄에게 밥하고 빨래하고 땔나무를 장에 내다 파는, 일상의 궂은일만 시킬 뿐 공부에 대한 질문에 자세히 답해주지 않았다. 지쳐버린 지엄이 하산하기로 마음먹고 보따리를 싸 떠나는데, 스승이 그를 부르며 “옜다, 여기 내 법을 받아라!” 소리치며 주먹 쥔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를 본 지엄은 대오했다. 이후 ‘구자무불성(拘子無佛性)’ 화두를 참구해 타파했고, 고봉원묘의 『선요』를 통해 알음알이를 벗어나게 됐다. 이러한 경험으로 대혜와 원묘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선풍을 전개했다. 

지엄이 중시했던 종밀의 『선원제전집도서』, 지눌의 『절요』, 『대혜어록』, 원묘의 『선요』는 이후 강원의 교과목 제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지엄은 선교겸수(禪敎兼修)의 체계와 간화선풍을 선양했고, 삼문의 수행을 지향한 흔적이 남아있다. 그의 사상은 휴정 선사에 의해 정립됐다. 

지엄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지 않고, 하루 한 끼, 문을 걸어 잠그고 외부와 교류를 두절한 채 정진하다가, 1520년 56세에 벽송사를 창건했다. 창건 이후 수많은 선사가 배출됐고, 스님은 지리산 수국암에서 『법화경』 강의 도중에 입적했다. 세납 70세, 법납 42세였다. 입적 날을 잡아 생사 해탈에 관한 법문을 남기고 떠난 19세기 서룡 스님의 설화도 벽송사에 전해져 온다. 그는 “불법을 닦을 때 생사를 해탈하려면, 먼저 생사가 없는 이치를 알아야 하고[知無生死], 다음 생사가 없는 이치를 증득하여야 하며[證無生死], 마지막으로 생사가 없는 것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用無生死]”고 했다. 

조선시대 지리산에 들어와 선풍을 일으킨 〈벽송지엄 스님 진영〉, 해인사 성보박물관 소장.

 

연곡사·쌍계사·단속사

서룡 스님의 ‘지증용무생사(知證用無生死)’의 도리를 걸망에 담아, 서남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구례 연곡사(鷰谷寺)에 이르게 된다. 연곡사는 한국전쟁 때 빨치산 활동으로 유명했던 피아골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 민족의 가장 슬픈 상처를 말해주듯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절은 오랫동안 그렇게 폐사 상태로 있어야만 했다. 피아골의 기운이 그런 것인지 역사적으로 이 절은 여러 번 전소됐다. 조선 임진왜란 때는 승병의 역할이 컸고, 국권 상실기에는 항일 의병의 근거지여서, 항상 그 보복으로 일본에 의해 여러 번 절이 전소되곤 했다. 

이 절은 인도 고승인 연기 조사가 백제 성왕 22년(544) 때 창건했다. 연기 스님이 터를 잡을 때, 큰 연못의 물이 소용돌이치며 제비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연곡사라 이름했다고 한다. 고려 초까지 이름난 선종 사찰로 수많은 수좌의 선 수행 요람이 됐다.  

도선 국사 등 이름난 많은 고승을 배출했지만, 조선의 척불정책으로 그 힘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다시 선풍이 일어나는데, 그 주인공은 소요태능 스님이다. 태능 스님은 임란 이후 연곡사를 중창하면서 여기에 총림을 개설해 400여 명의 수좌와 함께 선풍진작을 도모했다. 그의 시 “뜨락에 내리는 비에 꽃은 웃음 짓고 / 난간 밖 바람에 소나무 운다 / 참선을 해야만 깨닫는가 / 있는 그대로가 원만한 깨달음인 것을”에서 수행관을 엿볼 수 있다. 

좌측 전면의 팔각부도는 서산 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 후 불탄 연곡사를 중창한 연곡사 소요 스님 부도다. 연곡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돼 선풍을 높인 사찰이다. 
연곡사에 있는 부도 중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작품으로 꼽히는 동쪽 부도. 사자, 용, 가릉빈가 모습이 정교하게 표현돼 있다. 

다시 남동쪽으로 향하면 하동의 쌍계사에 이르게 된다. 쌍계사는 신라 문성왕 2년(840)에 진감혜소 선사가 중국 혜능 선사의 돈오선을 맨 처음 전한 도량으로, 선과 범패 그리고 차 재배의 연원이 되는 곳이다. 진감은 31세라는 늦은 나이에 출가해, 배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마조의 제자인 신감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인가 받았다.  

진감의 종지(宗旨)는 조사당에 그가 모신 혜능, 남악, 마조, 제안, 신감 6명의 진영에서 드러난다. 제자들에게 “본인의 행적을 남기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헌강왕이 시호 ‘진감(眞鑑)’을 내리고, 최치원은 비문을 지어 그의 행적은 오롯이 남아있다.

동쪽으로 향하면 우리의 마지막 여정인 단속사(斷俗寺) 터에 다다른다. 지금은 터만 남았지만, 조선시대 김일손의 지리산 여행기인 『두류산기행록』을 통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최치원이 쓴 입구의 표식 바위인 광제암문(廣濟岩門)에 짚신을 벗어두고 들어가 도량을 돌아보고 나오면 신발이 썩어 있을 만큼 넓은 대찰이라 전한다.

단속사는 8세기경 신라 때 창건돼 조선 전기까지 대표적인 선종 사찰로 유지됐다. 고려 무인 집권기에 사찰의 전성기를 누렸으며, 선종을 고수하고자 한 조계종의 사찰이었다. 세종대 선·교 양종으로 교단을 정리할 때 선종 18사 중 하나였지만, 15세기 후반 이미 사찰이 많이 퇴락했고, 정유재란 때 사찰 전체가 불타 완전히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신충의 경덕왕 초상화와 황룡사 벽화를 그렸던 솔거의 그림인 〈유마상〉이 이 절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알 길이 없다. 

어떤 형체도 남김없이 완벽하게 속세와의 인연을 끊게 된 것은 절 이름 때문이었을까? 빈터에서 얼핏 떠오르는 공의 도리를 챙기며, 하산의 내리막길로 걸음을 옮긴다.  

최치원이 썼다고 전해지는 단속사 광제암문(廣濟嵒門). 단속사는 8세기 창건돼 조선 전기까지 대표적인 선종 사찰이었다. 
연곡사 소요태능 탑의 부조

 

 

사진. 유동영

 

효신 스님
철학과 국어학, 불교를 전공했으며, 인문학을 통한 경전 풀어쓰기에 관심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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