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든 스님] 승군이 참여한 주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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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든 스님] 승군이 참여한 주요 전투
  • 김남수
  • 승인 2022.03.29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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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 흙으로 쌓은 산성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산성 안에는 승전을 기념하고자 1603년 세운 대첩비가 있으며, 한강을 뒤(남쪽)에 둔 배수진을 친 형상이다. 삼국시대 이후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했다. 

의주로 피신한 선조는 묘향산에 거주하던 서산대사에게 의승군의 궐기를 당부했다. 팔도 각지에서 의승군이 일어나 후방 지원업무, 산성 축조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지만, 관군이 일본군에게 패전을 거듭한 개전 초기에는 직접 전투에 참여해 중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의승군이 직접 참여한 전투와 의미를 살펴본다.

 

청주성 탈환 - 1592년 여름

큰 적이 청주에 들어와 군사를 나누어 약탈과 살육을 함부로 하자, 승명이 영규라는 자가 있어 그 무리를 많이 모아서, 모두 낫을 가지게 하였고, 호령이 매우 엄하여 적을 보고 피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드디어 청주의 적을 공격하니, 연일 서로 버티어 크게 이긴 일도 없으나, 또한 물러서지도 않았습니다. 적이 마침내 성을 버리고 가니 모두가 영규의 공이 옵니다.
__  『기재사초(寄齋史草)』

의승군이 참여한 최초의 전투다. 계룡산 갑사에서 출가한 기허영규(騎虛靈圭) 스님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을 이기지 못해 3일 동안을 통곡하고 승장이 되어 의승군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했다. 1592년 여름, 옥천의 조헌(趙憲, 1544-1592)이 의병을 규합해 청주성을 수복하고자 할 때, 영규 스님은 의승군을 모아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 승군은 800명에 이르렀다. 영규 스님이 이끄는 의승군은 자못 군율이 엄해 공성전에서 선봉이 되어 활약했다. 

청주성을 수복한 조헌과 영규 스님은 이어 8월 18일 금산으로 내려가 적과 맞싸웠다. 당시 의승군은 2,000명 정도였다. 영규 스님은 의병군의 전열을 재정비한 후 관군의 지원을 받아 금산성을 공략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헌이 이를 무시하고 공략에 나서자 출동해, 조헌과 영규 스님은 물론 최후의 1인도 없이 전멸하고 말았다. 선조는 청주성 승전 소식을 듣고, 영규 스님에게 당상관의 벼슬과 옷을 하사했다. 아쉽게도 임금이 내린 상사(賞賜)가 도착하기 전 영규 스님은 금산전투에서 전사했다.  

청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개전 후 육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승전보였고, 초기 의병이 거둔 주요 승리의 하나였다. 이 전투로 호남을 막아냈고 관군이 명군과 함께 반격할 시간적 여유를 갖게 하는 등 군사적으로도 의미가 큰 활동이었다.

 

평양성 탈환 - 1593년 2월

평양성 북쪽 모란봉(牧丹峯) 위에는 적 2,000명이 있었는데 청백색의 깃발을 세웠으며, 거마목(拒馬木)을 벌여놓고, 북치고 떠들어대며 함성을 지르면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봉우리가 높이 솟아서 형세가 최고로 요긴하였다. 제독이 이에 남방 군사 1지대(枝隊)를 파견하여 모란봉 길을 따라 나가며 올라가면서 공격하고자 하니, 우리나라도 승병으로 그 형세를 돕게 하였다. 
__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의주로 몽진한 선조는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1592년 7월 명군이 전쟁에 참전한다. 이후 조선군과 명군은 평양성 탈환전에 들어갔다. 사명대사 유정 스님은 의승군 1,000명을 거느리고 평양성 동쪽에 진을 쳤고, 서산대사 휴정 스님의 의승군 1,500명은 순안의 법흥사에 주둔했다. 의승군은 무장을 갖추고 전술을 익히며 전열을 재정비하면서 본격적인 전투 준비를 했다. 

1593년, 명군 제독 이여송은 유성룡과 평양성 수복을 본격적으로 준비한다. 조명연합군은 일본군보다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의승군도 수천 명에 달하는 적지 않은 숫자였다. 의승군의 주력은 평양성 탈환전에 요충지인 모란봉(牡丹峰) 전투에 참여했다. 이 전투로 평양성을 잃은 지 7개월 만에 탈환했다. 선조는 의주를 떠나 남하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은 서울로 후퇴했다. 이제까지 후퇴만 계속하던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주요 계기가 됐다.

 

1593년 2월, 행주대첩

의승군이 하진(下陣)에 있었는데 왜적 1명이 성안으로 마치 위에서 떨어지듯이 넘어 들었으나, 그가 미처 땅에 서지 못한 찰나에 의승군이 찔러버렸다. 왜적 2명이 또 넘어 들었는데, 의승군이 미처 찌르지 못한 사이에 왜적이 칼로 의승군을 베고 곧바로 상진(上陣)으로 달려들었다. 
__  『선조실록』

평양성 탈환전이 전개되던 선조 26년 2월, 금산사 출신의 처영(處英) 스님은 호남에서 1,000여 명의 의승군을 모집해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의 막하로 들어갔다. 

처영 스님이 이끄는 의승군은 관군과 합세해 금산 배고개[梨峙]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1593년 2월의 행주대첩에서 승병 700여 명을 이끌고 왜군 3만 명을 무너뜨리는 대승을 거둔다. 행주산성의 지형은 후방에 한강이 흐르고 있는 배수진의 형태다.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성벽도 매우 낮은 토성에 불과해서 조선군은 토성 위를 목책으로 둘러싼 채 싸움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의승군은 성의 서북쪽을 지켰다. 의승군이 지킨 서북쪽은 한강으로 둘러싸인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이 침입할 수 있는 주요 통로였다. 전투의 최전선이었다. 의승군이 약간 물러나 적들이 크게 소리치며 난입해 위기를 맞기도 했다. 권율이 칼을 빼 전투를 독려하자 죽기로 힘껏 싸워 승리했다. 벽제관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군은 조명연합군에 대한 반격을 꾀하고 있었는데, 한양을 수성하던 일본군은 이 전투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철수한다. 

구례 석주관성(石柱關城),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진을 설치했고, 임진왜란 당시 석주관성을 쌓았다. 주변에 섬진강이 흐르고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다. 
칠의사(七義祠) 묘 및 추모시설. 석주관에는 정유재란 때 전사한 7인의 의병장 묘가 있다. 
해방 후 칠의각(七義閣)과 영모정(永慕亭)을 지어 공훈을 추모했다.

 

석주관(石柱關) 전투 – 1597년 11월

피난인 수백 명이 같은 소리로 의병을 조직하고 왜적 수백 명을 격살하였는데, 양식이 떨어져 나머지 병졸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으니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스님들도 역시 임금님의 백성이므로 마땅히 한번 죽는다는 마음으로 다소의 승도들을 거느리고 겸하여 절의 양식을 업고 와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_ 『기화엄사화상○격문(奇華嚴寺和尙○檄文)』

군량 103석을 석주대장소에 운반해 내렸으며, 승군 153명이 제 의사(諸義士)와 함께 ○(전투) 중에 죽었다.
_ 『화엄사승정유란일기(華嚴寺僧丁酉亂日記)』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남원성과 전주성이 함락됐다. 구례는 남원과 전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여서 일본군은 구례 지역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석주관(石柱關)으로 향했다. 일본군의 진입을 막아내기 위해 의병과 의승군이 석주관에서 전투를 벌였다. 신해(信海) 스님은 화엄사에 적을 둔 의승군이다. 의승군들은 전시에는 전라 좌수영 산하에 편제되지만, 평시는 구례와 하동 사이의 개활지인 석주관 방어가 임무였다. 의병과 피난민을 위한 식량 보급을 요청하자 군량 보급은 물론 153명의 의승군이 전투에 참여해 전멸했다. 

 

● 참고문헌
양은용, 「뇌묵처영의 의승 활동과 금산사」, 한국종교 47, 2020
조기룡, 「청허 휴정과 의승군의 활동과 역할에 대한 재조명」,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69, 2016

 

사진. 유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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