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든 스님] 의승군의 불교사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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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든 스님] 의승군의 불교사적 가치
  • 오경후
  • 승인 2022.03.29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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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불 시대의 승군, 불교를 일으키다
<서산대사화상당명병서(西山大師畵像堂銘幷序)>(보물), 정조 친필. 서산대사 입적 후 180여 년 지난 1788년(정조 12) 대흥사에 서산대사와 유정, 처영대사를 모시는 표충사가 건립됐다. 1794년 대흥사에 서산대사의 진영이 봉안되자, 정조는 친히 지은 <서산대사화상당명>과 그 서문을 써서 대흥사에 내려보냈다. 대흥사 성보박물관 소장

의승군의 활약

임진왜란은 선조 25년(1592) 4월 왜군의 동래성(東萊城) 침략으로부터 시작됐다. 최초의 의승군인 공주 갑사의 영규(靈圭) 스님은 800명의 의승군을 거느리고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이후 8백 의승군은 조헌(趙憲)의 7백 의병과 합세해 그해 8월 왜적에게 함락당한 청주성(淸州城)을 수복했다. 왜란 발발 이후 첫 승전이었다.

의승군의 본격적인 활동은 선조 25년부터였다. 피난길에 오른 선조가 의주(義州) 행재소(幸在所)에 머물 때 승병모집을 위해 묘향산(妙香山)에 있던 서산대사 청허휴정(淸虛休靜) 스님을 부른 이후부터 의승군은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휴정 스님은 나라를 구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왕은 그에게 8도16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 직을 내려 전 승군을 관장하게 했다. 이후 휴정 스님은 전국 8도 사찰에 격문을 보내 궐기할 것을 호소하고 73세의 노령으로 승군 1,500명을 거느리고 순안 법흥사에 주둔했다. 이후 법흥사의 의승군 수는 5,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 밖에 호남 지리산에서 처영(處英) 스님 또한 의승군을 모아 봉기했다.  

<동래부 순절도(東萊府 殉節圖)>(울산시 유형문화재 제30호), 1834년 변곤 작. 
1592년 동래부사 송상현과 군민들이 왜군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사건을 묘사했다. 울산박물관 소장

휴정 스님은 선조에게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가지 못할 스님은 절을 지키게 하면서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부처에게 기원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통솔해 전쟁터로 나아가 나라를 구하겠다고 했다. 늙고 어린 스님을 제외한 모든 스님이 유사시에는 승군이었다. 위로는 궁극의 깨달음을 얻고 아래로는 자신뿐만 아니라 부모와 시주, 그리고 국왕과 나라를 위해 산중에서 수행해야 하는 수행자의 본분이었지만, 나라와 백성이 곤란에 처했을 때는 스님들이 계율을 어기고 칼과 창을 들어야 했다. 당시 의승군은 중앙에 도총섭(팔도십육종도총섭)을 두고 그 아래로는 전국 8도에 각각 선·교 양종 2명씩 16명의 총섭을 둔 조직체계였다. 조정으로부터 임명돼 직첩을 받았던 도총섭과 총섭은 ‘군대를 이끌고 왜적을 토벌한 승려[領軍討賊之僧]’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도총섭·총섭의 지휘를 받는 의승군은 도원수(都元帥)의 지휘하에 관군과 협력 또는 독자적으로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군량 운송과 산성 축성 등 후방지원을 담당하며 준관군(準官軍)의 형태로 활동했다.

<부산진 순절도(釜山鎭 殉節圖)>(보물), 1760년 변박 작. 1592년 4월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부산진에서 벌어졌던 왜군과의 전투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당시 부산진첨사 정발 장군은 성안의 군민 1,000여 명과 끝까지 항전하다가 전사했다. 육군박물관 소장

임진왜란 초기 대규모의 의승군은 지상전뿐만 아니라 해전에서도 활약했는데, 1592년 10월 이순신 장군이 조직한 의승수군은 300여 명이나 됐다고 한다. 선조 26년(1593) 4월 서울이 수복되고 왜적이 남하해 전황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부터 의승군은 군량 운송, 산성 축성, 둔전(屯田) 개간, 땔감 마련 등 전쟁물자 비축의 임무를 수행했다. 

상이 정원에 전교하기를 “휴정은 비변사의 계사(啓辭)에 따라 당상관에 제수했는데 방외(方外)의 노승에게 당상관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근래 승려들이 적을 참획(斬獲)한 것은 모두 휴정의 통솔에 의한 것이니, 그에게 비단 1필을 하사하고 그의 제자에게는 공이 있는 사람의 아들과 사위, 동생과 조카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예에 따라 군직을 제수하기도 하고 면역시키기도 하되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하라”하니, 비변사가 획계하기를 “사미에게 군직을 제수하거나 면역시키는 일은, 그중에 특출하여 칭송할 만한 자로는 속명이 곽언수(郭彦秀)인 의엄과 속명이 변헌(卞獻)인 쌍익(雙翼)이 있습니다. 의엄은 전에 왜적을 만났을 때와 군량을 모집할 때에 모두 공이 있었는데도 관직을 원하지 않았고 지금도 관직을 원하지 않고 선가(禪家)의 판사(判事)가 되기를 원하니, 해당 부서로 하여금 원하는 대로 직첩을 주게 하소서. 변헌은 이미 사정(司正)을 제수하였으니 사과(司果)로 승진시키소서” 하였다.

『선조실록』의 선조 26년 5월 15일 기록이다. 전란이 소강 국면에 접어들자 선조는 휴정 스님의 공훈을 인정해 당상관에 제수(除授)했다. 왕이 휴정 스님에게 병권(兵權)을 주고, 당상관까지 제수하자 들끓는 조정의 반대 여론을 완화하고자 한 의도였다. 휴정 스님은 보고서를 만들어 군공을 세운 승군이 선과첩(禪科牒,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승려에게 지급한 승려 자격증)을 받도록 조치했다. 사명대사 유정(惟政) 스님 역시 당상관에 제수했으며, 휘하 승군들에게 공에 따라 시상하도록 했다.

왜란 중에 신료와 유자(儒者)들은 승군이 전공(戰功)을 세운 것을 못마땅하고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산중에서 근신하며 수행해야 할 자들이 공명심에 눈이 멀어 전장으로 달려 나갔다고 중상모략했고, 역사를 기록한 사관(史官)은 ‘막대한 나라의 재물로 군관을 양성했지만, 왜적이 침입했을 때 용맹하게 나서는 이들은 찾아볼 수 없고 나라에서 그동안 천하게 여겼던 오랑캐 무리가 몸을 돌보지 않고 사직(社稷)을 지키고자 했으니 심히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의승군으로 참여했던 스님들은 공명심보다는 백성과 나라의 안위를 위해 일어섰다.

서산대사의 신발로 전해오는 유품. 대흥사 성보박물관에는 서산대사의 발우, 수저 등 유품이 보관돼 있다. 대흥사 성보박물관 소장

 

산성을 축조하다

전란 이후 조선이 직면한 과제는 나라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국방 강화는 가장 시급해서 팔도의 군사적 요충지에 산성을 축조하는 일이 전란 중에도 급선무로 대두됐다. 산성을 쌓는 일은 선조 26년부터 28년까지 전라·경상·충청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선조 27년에는 전남 장성에 입암산성(笠巖山城)을 쌓고 사찰을 지어 영구한 계책으로 삼고자 했다. 이후 병자호란 전후로 시행된 남북한산성 공사는 승군제도가 조직적으로 정비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남한산성은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과 후금(後金)의 조선에 대한 압력이 점차 가중되자 그해 7월에 공사를 시작해 인조 4년(1626) 11월에 완성됐다. 당시 벽암각성(碧巖覺性)과 응성(應聖) 스님은 팔도의 승군을 모집해 2년 4개월 만에 공사를 마쳤다. 축조 후 방어에 동원된 스님들은 하삼도(下三道, 충청・전라・경상도)와 강원도의 스님 가운데 도첩이 없는 스님을 뽑아서 3개 조로 나누어 부역하게 하고 부역을 마친 이후에는 도첩을 지급해 돌아가게 했다. 북한산성 또한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이어 나라의 보장지처(保障之處)로 인식해 숙종 37년(1711) 4월에 승려를 동원해 공사를 시작하고 그해 10월에 완성했다. 두 산성이 축조된 이후 방어를 위한 조치를 내려 남한·북한산성에 각각 의승 350명씩 차례로 수호하게 했다.

의승군은 이밖에 전란과 전염병으로 희생당한 시신을 매장하거나, 제언(堤堰)공사, 벌목과 석재를 운송하고, 벽돌 굽는 일로 전란 이후 국가재건에 기여했다. 전쟁과 혹심한 기근·추위가 엄습한 선조 26~27년에는 경성 안팎에 시체가 많이 쌓여있었다. 하지만 인력이 모자랐던 터라 선조는 의승군이 중앙과 지방에 산재한 시체와 해골을 묻어주도록 명했다. 이와 같은 사례는 자연재해로 백성들의 희생이 지속됐던 1601년부터 1750년까지 계속 나타났다. 

대흥사는 매년 서산대사 제향의례를 개최한다. 유교식 제향과 불교식 헌다례를 지내며 서산대사의 뜻을 기린다. 

 

의승군을 제향하다

“불교가 중국에서부터 해동에 이른 지가 1천 7백여 년이 된다. 돌이켜 보건대, 우리 조정에서는 유교를 숭상하고 도(道)를 중하게 여기는 것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도구로 삼아, 300의 군현에 모두 부자(夫子)의 묘(廟)가 있어 멀거나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봄에는 거문고를 타고 여름에는 시를 읊어서, 이단의 학(學)인 도교가 마침내 전해지지 않았고, 오직 승려들만 한갓 오래된 절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깊은 산골짜기의 우거진 숲속이나 큰 늪 가운데는 호랑이와 표범의 소굴이기도 하며 못된 무리들이 서식하는 곳이기도 하여, 부서(簿書)가 이르지도 못하며 소송(訴訟)이 있지도 아니하고 병식(兵食)을 의뢰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비구대중(比丘大衆)으로 진정시켜 길이길이 큰 재난에서 보호받게 하니, 대체로 승려들이 참여하여 거기에 힘을 썼다. 이것이 『범우고』를 짓게 된 까닭이기도 하며, 또한 종산서원(鐘山書院)에 불교 서적을 두어서 주자를 위해 게시해 두고 보았던 남은 뜻을 모방한 점이 있는 것이다.”

정조(재위 1776~1800)의 명으로 편찬한 『범우고』의 제문(題文)이다. 정조는 불교에 우호적인 왕이 아니었다. 즉위 후 조상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원당(願堂)을 철폐했고, 스님들의 도성 출입을 엄중히 금지하기도 했다. 정조는 ‘불교가 중국에서 전래됐지만, 조선은 유교를 숭상해 도교는 자취를 감췄고, 불교는 승려들이 절만을 지키고 있을 정도로 이단이 쇠락했다’고 전제했다. 그러나 궁벽진 산골은 나라의 법령과 제도가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해 소송할 길도 없으며, 위태로운 상황에서 군대와 군량미조차도 의뢰하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했다. 다행히 스님들이 존립해 최소한의 법령과 제도가 전해지고, 군대와 군량미를 마련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전란에 참여해 나라를 재난에서 구해낸 것이라고 했다. 정조가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참여한 무학대사나 휴정·유정과 같은 호국승려라든가 왕실불교와 관련된 사찰에 각별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이기도 하다.

정조는 『범우고』의 첫 부분에서 “부서(簿書)는 옛날에도 있었지만, 예악(禮樂)이 우선이고, 소송은 옛날에도 있었지만, 교화가 실제가 되고, 병식(兵食)은 옛날에도 있었지만, 풍속이 근본이 된다”고 했다. 요컨대 불교가 비록 이단이지만, 스님들이 국가 운영의 기본이기도 한 예악과 교화, 풍속의 유지에 힘쓰는 바가 지대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더욱이 이러한 이유가 『범우고』를 짓게 된 까닭이라고 했으니 편찬 목적이 불교를 탄압하고 승려에게 잡역(雜役)을 부과하거나 잡공(雜貢)의 수취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은 재위 12년 7월에는 대흥사 청허휴정 스님의 사당에 ‘표충(表忠)’이라는 편액을 내렸으며 즉위 16년 윤4월에는 석왕사에 ‘석왕(釋王)’이라고 사액했다. 

의승군의 불교사적 가치는 불교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 살핀다면, 호국, 국가재건, 사회경제, 호국불교 선양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묘향산 보현사 수충사(酬忠祠), 보현사 스님들은 서산대사의 진영을 걸고 제사 지냈으며, 후에 사명대사와 처영대사를 함께 모셨다. 『북한의 전통사찰 2』에 수록된 사진,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제공
대흥사 표충사(表忠祠),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건립한 사당이다. 서산대사, 사명대사, 처영대사를 배향하고 있다. 사진 대흥사 제공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조교수. 동국대 및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조선후기 사지편찬과 승전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한 한국불교사에 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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