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약 7년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을 말한다. 7년의 전란 동안 조선의 스님들은 스스로 ‘의승군’이 돼 강토를 침범하는 외적과 맞서 싸웠다. 의병의 전사(戰史)에 가려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최근 불교계를 중심으로 조선 의승군의 역할을 새롭게 조명하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침략군이었던 일본군 진영에도 스님들이 있었다. 왜군의 진영에서 7년 전쟁의 한 부분을 담당했던 일본의 스님들은 누구일까.
히데요시를 보좌한 스님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6~1598)는 자신의 보좌로 승려들을 중용했다. 임제종 쇼코쿠지(相國寺) 주지 사이쇼 죠타이(西笑承兌, 1548~1607), 난젠지(南禪寺) 주지 겐포 레이산(玄圃靈三), 도후쿠지(東福寺) 주지 이쿄 에이테츠(惟杏永哲)가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교토 선종 고산(五山)의 명망 높은 승려들로,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정치 자문이나 외교문서의 기초를 담당하거나 사신으로도 활동했다. 전쟁 과정에서는 히데요시를 따라 침략 전진기지인 큐슈의 나고야에서 머무르며 자문 역할을 했다.
승려들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히데요시의 자문 역할을 할 수 있던 것은 히데요시가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文盲)’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문무를 겸비했던 조선의 장수들과는 달리 전국시대 일본의 무관은 오로지 전쟁 기술 하나만 뛰어나면 된다는 인식이 컸고, 평민 출신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아 밑바닥부터 올라온 인물이어서 글 자체를 배울 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당시 정치·외교 문서 작성에 능하고, 주자학에도 밝았던 교토 고산의 선종승들이 히데요시와 성주들의 눈에 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임진왜란에서는 참모 등의 역할로 종군(從軍)했던 것이다.
종군기록을 남긴 일본 스님
실제 조선을 침공한 왜군 무장들은 각각 승려를 대동해 전투에 참가했다. 제1군 소요시 토시(宗義智, 1568~1615)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600)를 묘신지(妙心寺)의 텐케이(天荊)와 세이후쿠지(聖福詩)의 게이테츠 겐소(景轍玄蘇, 1537~1611)가 각각 수행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와 함께 제2군의 장수였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8~1618)는 타이인(泰長院)의 제타쿠(是琢)가,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1533~1597)는 안코쿠지(安國寺)의 에케이(惠瓊, ?~1600)가 보좌했다. 제7군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1553~1625)에게는 만넨젠시(萬年禪師)와 슈쿠로 산가쿠(宿蘆俊岳)라는 승려가 있었다. 2차 침공이었던 정유재란에는 제2군 오타 카즈요시(太田一吉, ?~1617)의 의승(醫僧)으로 수행한 안뇨지(安養寺) 주지 게이넨(慶念, 1636~1711)이 종군승(從軍僧)으로 참여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종군승으로 참여한 이들은 어디까지나 참모나 보좌 역할이었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는지 전쟁의 과정이나 당시 소회를 글로 남길 수 있었다.
소요시 토시를 수행한 텐케이는 <서정일기(西征日記)>를, 나베시마 나오시게를 보좌한 제타쿠는 <조선일기(朝鮮日記)>를, 모리 데루모토의 종군승 슈쿠로는 <숙로고(宿盧稿)>를 남겼다. 정유재란에서 종군한 게이넨은 일본 전통 가요인 와카체 일기인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를 썼다. 이들의 종군일기는 당시 종군승들이 어떻게 전쟁에 참여했고,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떤 마음으로 전쟁을 바라봤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다. 종군기에 나타난 몇몇 인물들의 행적들을 쫓아가보자.
종군기록 <서정일기>
대마도 태수에게 종군명령을 받은 텐케이는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했다. 파죽지세로 밀고 오던 왜군은 5월 3일 제1, 2군이 한양에 입성했고, 종군승인 텐케이도 한동안 한양에 머물렀다. 그는 한양에 머무는 동안 무장들을 자문하고 외교문서를 작성했으며, 승려로서 왜군의 제의(祭儀)를 담당하기도 했다. 조선인들을 회유하는 글을 짓기도 했으며, 점령하에 있는 조선인들의 탄원을 글로 답하는 역할을 했다. 밀정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는데, 텐케이는 조선인 내통자를 통해 조선인을 감시·고발했다. 실제 그는 주막 주인인 이효인이 고발한 저항인 9명과 궁정 관인을 왜군 무장에 알려 처형시키기도 했다.
전란 중 타국살이였지만 매일 술에 취해 여흥을 즐기는 등 텐케이는 제법 윤택한 생활을 했다. 그는 함께 종군했던 승려 겐소에게 5월 9일 취해서 시를 보내기도 했다.
오늘 아침 국화를 보니 새로 술을 빚어야겠다 생각했소(今朝逢菊要新釀)
새 술이 익으면 마땅히 그대에게 보내리라(新釀熱時宜作君)
그대도 술이 생기면 나에게 알려주오(君有酒生前須我)
고래로 이 물건(술)은 무덤을 적시지는 못하는 법이잖소(古来此物不霑墳)
고상한 한시로 포장돼 있지만, 내용은 ‘국화를 보니 술 생각이 나고, 죽기 전에 술이나 먹자’는 것이다. 전란 중에, 그것도 선승이 쓴 글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그의 종군기 <서정일기>에는 일본 무장이 하사한 술과 조선인 내통자들이 보낸 술에 대해 빠짐없이 기록돼 있다.
조선 침략 정당성 주장한 슈쿠로
<서정일기>나 <조선일기> 등에서 저자인 승려들은 전쟁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숙로고>를 쓴 종군승 슈쿠로는 좀 다르다. 그는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정당성과 민간인 학살의 당위성에 대해 구구절절 기록하고 있다. 주군의 부대가 6월 15일 경상도 용궁현감 우복룡이 이끄는 조선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여기서 슈쿠로는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적극 지지한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우리 군은 개선해 군영으로 돌아와서 베어온 귀를 요시카와 경의 앞에 늘어놓았다. 경이 말하기를 한 사람이라도 남겨두면 다친 호랑이를 남겨두는 꼴이다. 노약자, 부녀자를 가리지 말고 한꺼번에 죽여야 한다.”
슈쿠로는 글 머리에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대국을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다(治大國, 若烹小鮮)’를 인용하며 ‘전쟁 같은 대사(大事)에 사소한 것에 신경 쓰면 일을 그르친다’는 식으로 민간인 학살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산과 들이 모두 불타고 있다”
일본 종군승들의 종군기 중 가장 객관적이면서, 승려로서 소회를 담담히 그려낸 것은 게이넨의 <조선일일기>다. 그의 종군기는 정유재란 발발 직후인 1597년 6월 24일부터 1598년 2월 2일까지 약 9개월간의 기록이다.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의승으로서 주군의 건강을 살피고, 다친 장수를 성심껏 치료했다. 또한 종군 승려로서 진영에서 기도회를 주도하고(게이넨은 참여자가 저조해 한탄한다), 죽은 병사들의 재(齋)를 지냈다. 그러면서도 정토진종 종조인 신란의 기일 법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신의 슬픔을 토로하기도 한다. 임진왜란이라는 7년 전쟁 속에 정유재란이 포함되지만, 정유재란은 앞선 5년간의 전쟁과는 차이가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에 참여하는 장수들에게 “전라도를 남김없이 단번에 쳐라”고 지시했고, 그로인한 민간인에 대한 공격도 수위가 높았기 때문이다. 60세라는 노구에 자신의 성주 오타 카즈요시를 따라 종군한 게이넨에게는 그 현장은 지옥도 그 자체였다. 8월 초 남원성에서 보여진 참상에 대해 그는 이렇게 술회한다.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 죽인다. 산 사람은 금속 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어버이는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처음 보게 됐다. 조선 아이들을 잡아 묶고 부모는 쳐 죽여 갈라놓으니 다시는 볼 수가 없게 된다. 남은 부모 자식의 공포는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 오는 때와 같다.”
그는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본군의 만행과 일본 인신매매상들의 행태를 객관적이면서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불제자로서 적국 백성에게 행하는 비인도적 처사를 향한 분노이기도 했지만,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괴로운 종군이 없었다면 조선에 와서 허무하고 추한 모습을 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괴로운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다. 늙은 몸으로 이 같은 고통과 괴로움을 맛보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 정도로 분할 뿐이다.”
임진왜란이라는 7년 전쟁은 전쟁의 주모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그 과정에서 군인은 물론 수많은 양민이 죽고, 포로로 끌려가거나 노예상에게 팔려 이탈리아까지 간 조선인도 있다. 일본의 승려들은 7년 전쟁의 조력자로서 역할을 했다. 그 경중의 차이는 있어도 침략 전쟁에 일조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신성민
2004년 <주간불교>에 입사해 현재까지 불교계 언론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현대불교신문> 취재부장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