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미디어는 4월 20일부터 4월 26일까지 문경 세계명상마을에서 열리는 제4회 간화선 대법회 선지식 법문을 웹사이트와 불광미디어 유튜브 채널에서 중계합니다.
도가 높거나 그래서 이 자리에 앉은 게 아닙니다. 지금도 선원에서 다른 대중과 정진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오늘 드릴 말씀은 첫째는 무상, 둘째는 불교의 핵심 진리가 무엇인가, 셋째는 그 진리를 몸으로 체험하고 경험하는 간화선 그리고 간화선의 회향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첫째, 무상입니다. 왜 무상을 이야기하느냐? 제가 절에 들어온 지 51년 차입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법상에도 오르고 법문도 하게 됐습니다. 처음 출가할 때는 일찍 출가해서 나보다 나이 적은 행자가 들어왔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습니다. 어느덧 50년 세월 흘렀습니다. 그렇게 흘렀습니다. 오늘 새벽에 머리카락 깎았는데 내일 되면 또 까칠해집니다. 수염도 그렇습니다. 하나도 그대로인 게 없습니다. 무상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늘 변하고 있습니다. 이 무상한 세월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늘 그날이 그날입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늙었습니다. 내일은 또 수명이 하루 줄어듭니다. 마치 물고기가 사는 호수의 물이 줄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곤 합니다. 늘 이런 마음으로 살다 보니 어느덧 세월 이렇게 흐른 겁니다. 천년 만년 살 것 같으면 미뤄도 되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만난 불법인데 남의 돈 세는 것만 관심이 있을까요. 정작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무상감이 들지 않으면 한발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서울 어디든 보면 지나가는 사람은 똑같습니다. 휴대폰입니다. 점심에는 컵 하나 들고 휴대폰 들고 갑니다. 거의 똑같아요. 물론 업무를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틈틈이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은 아닙니다. 템플스테이 기간 동안 휴대폰을 3일만 통제하면 처음엔 답답해 하다가 나중에는 편안해합니다. 정말 소중하게 무엇인지 들여다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상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수시로 바뀌는 계절. 이 아름다운 자연도 나중에는 이 녹색도 물들고 떨어집니다. 스님들은 동안거, 하안거 한 번 하면 벌써 한 해 지나갑니다. 엊그제 같은데 금방 석 달, 석 달입니다. 정말 우리는 급합니다. 급하게 느끼셔야 합니다.
무상감을 느끼면 발심이 됩니다. 발보리심의 준말입니다. 위 없는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입니다. 진발심이라고해서 최우선 순위입니다. ‘이 진리는 뭘까’ ‘어떻게 하면 나도 본래 부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을까’하고 ‘나도 깨달아 봐야겠다’라며 온 마음과 몸을 바쳐 닦겠다고 하는 게 발심입니다.
아무 목적 없이 앎도 없이 그냥 앉아서 참선만 한다고 깨칠까요. 깨쳤다고 해도 역대 제불조사와 같은가? 이건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예전에는 사이비 종교가 많았습니다. 깨달았다는 교주가 나와 혹세무민합니다. 그러나 불교적 깨침은 자기가 깨쳤다고 깨친 게 아닙니다.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역대 선지식으로부터 검증받아 인가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점검, 인가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한마디로 연기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공입니다. 다른 말로 무아, 또 다른 말로 하면 중도입니다. 연기, 무아, 공, 중도는 말만 다르지 내용은 같습니다.
모든 현상은 인연 따라 생겼다가 사라집니다. 이 산천초목도 연기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공이라고 합니다. 왜? 변하기 때문입니다. 고정돼 있으면 변하지 않습니다. 이 현상은 순환하고 있습니다. 연기에 소멸되고 일어나고 머물고 소멸되고 있습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공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비었기에 다 가능한 것입니다. 없다는 말로만 해석하면 오류입니다.
공에도 치우침이 있습니다. 반야심경을 보면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다고 합니다. 왜 거기에 집착합니까? 공도 공하다. 공하다고 하면 공에 떨어집니다. 한쪽에 치우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잠시 있는 것입니다. 산천초목의 지금 있는 모습을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있다는 견해가 상견(常見, 항상하다는 견해). 없다는 견해가 단견(斷見)입니다. 공에도 치우치지 않고 있다는 가명(假名)에도 치우치지 않는 게 중도입니다.
중도는 양극에 치우치지 않는 바른 견해입니다. 중도가 부처님 말씀을 한 마디로 대변하는 것인데, 이 사상을 철두철미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중도 정견을 세우면 내 것이 일까요? 아닙니다. 내가 원래 부처님을 확인하는 작업, 수행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 염불, 선행, 경전 연구 등 다 좋습니다. 다 공부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선은 가장 빠르게 질러가는 길입니다. 자기 본래면목 자리를 스스로 확인하는 작업, 과정 이게 선입니다.
중도 체득한 분의 시와 관련한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집 한 채 짓고 수행하는 스님이 보름달 휘영청 밝은 날, 샘에 물을 뜨러 갔습니다. 병에 물을 담으니 달빛도 함께 들어왔지요. 시는 산승이 달빛을 탐했다는 표현을 썼지만 아닙니다. 아무튼 거처로 돌아가 다른 병에 물을 옮기는 순간 달빛도 사라졌습니다. 이 이야기 어디에도 치우침이, 얽매임이 없습니다. 이런 시나 그림을 창작한 분은 중도를 체험한 것입니다.
중도 정견을 확립한 다음에는 자기 것이 아니기에 몸소 체험이나 수행으로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비다. 오늘은 간화선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인도에서 발원한 부처님 가르침이 인도의 28대 조사까지 흘러옵니다. 28대 조사 달마 스님이 중국으로 건너왔습니다. 한 500년간 선이 없었습니다. 동토(東土), 즉 인도에서 본 중국이나 한국에는 그랬습니다. 동토에 선의 씨앗을 심은 스님이 달마입니다. 달마 스님은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정신을 가져왔습니다. 사람 마음의 성품을 보아 본래면목 자리를 확인한다는 겁니다.
달마 스님에서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 스님으로 면면히 이어져온 시대를 조사선 시대라고 합니다. 누가 물으면 거기에 대답을 하셨습니다. 묻는 이의 근기가 수승하면 깨우쳤습니다.
중국은 큰 대륙입니다. 지금처럼 차도 기차도 비행도 없었습니다. 스승을 만나러 산 넘고 물 건너 이역만리로 선지식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한 걸음 두 걸음이 다 수행입니다. 옛날에 노보살님들 절에 가서 가기 전날 목욕재계하고 암자에 쌀 이고지고 올라가셨습니다. 정성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너무 쉽습니다. 물론 마음의 차이겠지만 그렇습니다.
한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찾아갔습니다. 거기를 섣부른 마음으로 갈 수 없습니다.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 자리에 조주 스님이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여쭙니다.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기상천외한 말씀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부처님은 열반경에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왜 없다고 하십니까?’ 모르고 묻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조주 스님은 다시 ‘성품에 업식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답합니다. ‘없다’하는 순간 깨쳐야 하는데 못하니까 다시 말합니다.
‘조주 스님은 열반경도 안 봤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이역만리 찾아간 의미가 없어요. ‘나도 알고 있는데’ 이러면 의미가 없습니다. 찾아갈 때 마음은 이 답답한 마음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신심으로 찾아가는 겁니다. ‘없다’하는 순간 알아야 하는데. 못하면 어떻게 할까요. ‘어째서 없다고 하는 걸까?.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이 의문의 연속에 작은 틈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어째서 의심을 불러 일으키는 게 간화선의 시작입니다. 찾아갈 때 믿음과 신심. 내가 본래 부처라는 믿음, 선지식을 향한 믿음, 선지식의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 다음에는 의심입니다. ‘너 이거 참구해라’ 하는 화두는 없습니다. 못 깨치니까 어째서, 어째서 참구해 들어가는 것이 조사선의 정신을 이어가는 간화선입니다.
목마른 자 물 찾고, 배고픈 자 먹을 것을 찾듯이 간절하게 전심진력으로 의심해야 합니다. 의심이 억지로 됩니까? 처음에는 어렵습니다. 의심해야 하니까 하나보다 합니다.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의심이 자리를 잡습니다. 이것을 의정이라고 합니다. 내 의심이 감정하고 하나가 됩니다. 감정은 이성처럼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대의정이라고 합니다. 이게 되면 화두가 제대로 들린다고 합니다. 억지로가 아닌 저절로 시도때도 없이 화두를 들려는 노력 없이 화두가 들리는 것입니다.
화두를 드는 나와 들리는 화두가 하나로 될 때, 한 덩어리가 될 때, 이것을 대의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관과 객관이 소멸된 자리입니다. 이것을 대의단이라고 합니다. 이 대의단이 돼야 실질적으로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화두를 들려고 공부하는 게 아니라 화두를 타파하려고 공부합니다.
닭이 알을 낳아서 병아리를 만드는 데 21일 걸립니다. 그때 어디갔다 왔다 합니까. 꾸준하게 같은 체온으로 꾸준함으로 품습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여러분은 그렇습니까? 스님들도 화두 걸리면 열심히 하는데 안 걸리면 허송세월 보내는 것을 반복합니다. 반복하다 보면 점이 선으로, 선이 면으로, 면이 공간으로 됩니다. 낙숫물이 바위 뚫듯이 꾸준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어미 닭만 알 수 있는 일이 생깁니다. 알에서 보내는 ‘나갈게요’ 하는 신호를 어미 닭은 느끼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나온다는 신호가 줄(啐)이고 어미가 부리로 쪼는 게 탁(啄)입니다. 줄탁동시(啐啄同機)입니다. 선지식과 제자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무리 선지식 찾아가서 물어도 함부로 답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알려주는 순간 답이 아닙니다. 1 더하기 1은 2다 이거 알려고 화두 들지 않습니다. 화두는 오답은 있을지언정 정답은 없습니다. 오답의 기준은 바로 중도입니다.
태고보우 선사가 태고암서 정진하다 깨닫고 중국으로 가서 임제종 18대손 석옥청공 선사를 찾아갑니다. 질문을 던지고 점검합니다. ‘우두법융 스님이 도신 스님 만나기 전에는 어떻게 많은 새들이 꽃을 물고 왔는가?’ 태고보우 스님은 망설이지 않고 답합니다. ‘부귀하면 자식들도 우러러보기 때문입니다.’ 석옥청공 스님이 다시 묻습니다. ‘도신 스님을 만난 뒤에는 왜 꽃을 물고 오는 새가 없는가.’ ‘가난하면 자식도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나무들은 겨울이면 잎을 떨굽니다. 벌거벗은 나목이 됩니다. 이 나무에 뭐가 들러붙겠습니까? 도신 스님 만나기 전에는 마음의 때를 못 벗어서 번뇌망상이 많이 붙은 것입니다. 도신 스님 만난 후에는 마음자리를 밝혀 번뇌가 없다는 뜻입니다. 청정한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그 마음자리 밝히는 게 수행이고 선입니다.
정리하자면, 부처님 말씀은 활과 같습니다. 친절하게도 마음 심(心)자 하나 설명하는 팔만사천법문이 나왔습니다. 선은 활줄과 같다고 했습니다. 활줄과 활이 연결될 때 둘러 말하지 않습니다. 선의 용어는 간명합니다. 안목 있는 분들이 볼 때 오늘 제 설명은 부질없다고 하겠습니다.
대의단이 잘 안되면 용맹심을 내야 합니다. 대분심이라고도 합니다. 역대 제불조사가 출격 대장부라면 나라고 안 되겠느냐. 마음자리 밝힌 분 있다면 나는 안 되겠는가?! 위대한 선사들 그 마음바탕은 여러분과 다 같습니다. 다만 그분들은 했고 우리는 안 한 것입니다.
부처님 마음이 여러분 마음입니다. 분심 내서 한 번 정진해보시길 바랍니다. 깨달음을 이웃과 함게 회향한다는 원력으로 정진하면 성취가 클 것입니다. 간절만큼 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영진 스님은
백담사 무금선원 유나이자 전국선원수좌회 대표. 스님은 1972년 김제 금산사에서 출가해 봉암사, 해인사, 통도사, 백담사, 은해사 등 여러 선원에서 정진했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조계종 기초선원장 겸 동화사 선원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