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불교를 그리다] 김홍도의 삶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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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불교를 그리다] 김홍도의 삶과 그림
  • 진준현
  • 승인 2022.05.26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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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강세황과의 만남,
대大화가 김홍도의 탄생
필자 미상, <강세황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의 스승 표암 강세황은 뛰어난 글씨, 그림, 시를 남긴 문인화가이자 시인으로 ‘시서화 삼절’로 불렸다. 관직은 지금의 서울 시장에 해당하는 한성 판윤을 지냈다.

그 스승에 그 제자, 강세황과 김홍도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옛날 화가를 들라면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경)일 것이다. 김홍도는 일찍부터 국민화가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점은 단원( 檀園)의 ‘園’ 자를 넣은 많은 후대 화가들의 호가 있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긍원(肯園) 김양기, 혜원(蕙園) 신윤복, 초원(蕉園) 김석신과 이수민(호가 동일), 희원(希園) 이한철, 오원(吾園) 장승업 등이 있다. 특히 오원 장승업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안견, 김홍도와 함께 3대 화가로 꼽히는 인물인데, 김홍도를 의식해 “나도 원이다”라는 뜻의 ‘오원’으로 자호한 것을 보면 조선 말기까지 단원의 명성이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유명한 김홍도는 어떻게 조선 후기 최고의 화가가 될 수 있었을까?

김홍도는 평범한 김해 김씨 집안의 아들로 경기도 안산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윗대에는 낮은 벼슬을 한 적이 있으나 조부, 부친대에는 벼슬이 없는 서민 집안 출신이다. 김홍도가 안산 출신임을 짐작하는 근거는 그의 스승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쓴 「단원기(檀園記)」 기록을 통해서다. 강세황은 김홍도가 어린 시절부터 자기 문하에서 배웠다고 했는데, 그때는 강세황 자신이 안산에 있던 처가 근처로 내려가 30년간이나 살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강세황은 어린 김홍도를 발견하고 그의 재능을 일찍부터 키워줬던 것이다. 그런데 강세황이 누구인가? 강세황은 영조 후반부터 정조대에 걸쳐 예술계의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시서화 삼절(詩書畵 三絶, 시·서·화 세 가지가 모두 뛰어난 사람)’로 불리며 당대 유명한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안산은 당시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선생과 그 제자, 친지들이 살고 오가던 문화중심지였다.

<균와아집도>(부분도)
강세황의 친구인 문인화가 허필이 제발문을 쓰고, 강세황이 구도를 잡고, 심사정이 소나무와 돌을, 최북은 채색을, 그리고 김홍도가 가장 어려운 인물을 그렸다고 전한다. 거문고를 켜는 이가 강세황, 퉁소를 부는 청년이 김홍도다. 
김홍도·심사정·강세황·최북 합작, <균와아집도>, 지본담채, 59.7×11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763년 김홍도가 19세 때 스승 강세황과 심사정, 허필, 최북 등이 균와에 모여서 음악을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거나 바둑을 두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강세황과의 만남은 대(大)화가 김홍도의 성장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 강세황은 명문 집안 출신이었으나 60세가 되기 전에는 처가가 있는 안산에 내려가 살 정도로 집안이 넉넉하지 못했다. 그러나 강세황은 명필로,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로, 시인으로 이름이 난 사람이었다. 강세황의 안목(眼目)이 대화가가 될 김홍도를 알아보고 일찍부터 이끌어준 것이다. 김홍도는 그런 강세황을 스승으로 존경하고 따랐음을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에 그려진 그의 공손한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최고의 스승을 만나 성장한 김홍도. 스승과 친하던 심사정, 허필, 최북 같은 유명한 화가들과도 일찍 가까이 어울렸던 김홍도는 자신의 천재성을 갈고 닦았다. 그래서 곧 도화서(圖畵署,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하던 조선시대 관청)에 뽑혀 들어가고, 이어 최고들만 모인 도화서 내에서도 제일인자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군선도>, 지본담채, 48.2×26.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군선도>(국보), 1776, 지본담채, 575.8×132.8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김홍도가 그린 도교에 관계된 초자연적인 인물상을 표현한 도석인물화다. 인물의 윤곽을 굵은 먹선으로 빠르고 활달하게 묘사한 뒤 얼굴과 손, 물건들은 가는 붓으로 섬세하게 처리해 인물들의 표정을 살렸다. 묘사된 인물들을 추정컨대, 오른쪽에 외뿔소를 타고 『도덕경』을 들고 있는 노자를 선두로 복숭아를 든 동방삭 등의 신선들과 동자들로 모두 3무리로 나뉘어 있다. 

 

옥(玉) 같은 모습, 난초 같은 향기

대화가 김홍도는 어떻게 생겼을까? 아쉽게도 당시에 그의 초상화가 그려진 기록은 있으나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지켜본 스승 강세황은 「단원기」에서 “용모가 아름답고 속에 품은 뜻이 맑다”라거나 “풍신(風神)이 뛰어나 진(晋)나라 송(宋)나라의 고사(高士)와 같다”라고 했다. 제자라서 이쁘게 본 것일까?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도 한결같은 증언을 한다. 

성호 이익 선생의 조카로 당대 문단의 거목이었던 이용휴(李用休, 1708~1782)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김홍도의 초상화를 보고 지은 글에서 “오늘 군의 초상화를 보니 옥(玉) 같은 모습, 난초 같은 향기가 들은 바보다 훨씬 낫구나. 이는 한 온아한 군자의 모습이다”라고 극찬했다. 또 후대의 화가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은 『호산외기(壺山外記)』에서 “아름다운 풍채에 도량이 크고 넓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신선과 같다고 했다”라고 기록했다. 

이런 뛰어난 외모를 가진 김홍도는 성품도 온화하고 겸손해 그를 만난 많은 사람이 좋아했다고 한다. 덧붙일 점은 김홍도는 음악에도 정통했다. 스승 강세황은 “(김홍도가) 음률에도 해박해 금적운사(笒笛韻詞, 거문고와 대금, 문장)에 그 묘함을 다하였다”라고 했고, 김홍도와 함께 경상 감사를 수행해 안동 청량산을 노닐었던 유명한 문인 성대중은 김홍도가 부는 피리소리에 대해 “멀리서 들으면 필시 신선이 학을 타고 생황을 불며 내려오는 것이라 할 것”이라고 기록했다.

<무동>, 《단원 풍속도첩》(보물) 중에서, 지본담채, 22.7×26.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아사운인(雅士韻人)의 인생관과 종교

김홍도는 화가였으나 일찍부터 사대부 문인 강세황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답게 당대의 유가(儒家) 철학을 생활신조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그의 자(字) 사능(士能)이다. ‘사능’이란 『맹자』에 나오는 “항산이 없으면서도 항심을 유지하는 이는 오직 선비라야 할 수 있다(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보통 사람은 일정한 소득이 있을 때는 평정심을 유지하다가, 일정한 수입이 없어지면 가난에 굴복해 비굴해지거나 타락하기 쉽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선비는 가난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기 소신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이다. 김홍도는 이름을 대신해 많이 사용하는 자를 통해 이처럼 유가 철학에서 요구하는 굳건한 독립적 인격을 지향한 것이다. 자는 대개 성년이 될 때 어른이 지어주는데, 김홍도의 자 사능은 스승 강세황이 지어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른 사람이 지어줬더라도 김홍도의 뜻과 합치되는 것으로 정했을 것이다. 

김홍도는 화가로서 그림의 예술적, 철학적 가치에 대한 굳은 신념이 있었다. 당시 사대부 사회에서는 동양 예술철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부족한 일부 양반들이 그림을 얕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김홍도는 달랐다. 대우암(對右菴)이라는 그의 당호에서 그림과 글씨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서화동원론(書畵同源論)의 전통적 신념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대우암’이란 그림과 글씨를 중시한다고 일반적으로 쓰이는 좌도우서(左圖右書)에서 나온 말로 생각한다. 즉 우서에 대응하는 좌도, 즉 그림을 그리는 암자라고 당호를 지은 듯하다. 이용휴의 김홍도를 위해 써 준 「대우암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홍도는) 스스로 자부심이 크고 또 그림을 가볍게 보지 않았으니, 대개 그 인품이 아주 높아 아사운인(雅士韻人)의 풍모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정성을 다해 그린 작품을 사교를 위한 선물 따위로 제공하고자 하지 않았다.” 

김홍도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철학적 신념을 가지고 중요시했으며, 결코 그림을 출세나 아부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거리의 판결>과 <어물 장수>, 《행려풍속도8폭병풍》 중에서, 1778(34세), 견본담채, 각 42.7×90.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행려풍속도8폭병풍》는 김홍도의 
나이 서른 넷에 강희언의 집 담졸헌(澹拙軒)에서 그린 것으로 산천을 유람하는 풍류과객이 지방의 풍속을 취재하듯이 살펴보고 있는 모습이다. 각 폭의 위쪽에는 스승 강세황의 그림평이 적혀 있다. 
<고기잡이(해암타어)>와 <봄날 밭갈이(춘일우경)>, 《풍속도8첩병풍》 중에서, 1795(51세),
지본담채, 각 39×10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는 예술가답게 낭만적인 멋과 풍류가 있었다. 강세황은 김홍도에 대해 “풍류가 호탕하여 매번 칼을 두드리며 슬픈 생각에 강개하여 몇 줄기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고 기록했다(「단원기우일본(檀園記又一本)」). 또 유명한 조희룡의 『호산외사』의 기록에 나오는바, 그림을 그려주고 받은 돈 대부분을 술을 받아놓고 친구들과 매화음(梅花吟, 매화를 감상하며 술을 마심)을 하는데 써버리니, 가계에는 별로 보탬이 되지 않았다는 일화에서도 그런 풍류적 면모를 볼 수 있다.

이처럼 김홍도는 당대 일반 지식인들처럼 유교적 교양과 예술론을 지니고 있었으나, 종교로서는 불교를 신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은 김홍도가 1791년 12월 충청도 연풍 현감으로 부임한 후에 공정산(公靜山, 현 조령산) 상암사(上菴寺)에 기우제를 지내려고 올랐다가 녹봉(祿俸)을 던져 시주한 점에서 알 수 있다. 이때 김홍도의 상관인 충청 감사 이형원(李亨元)과 괴산 군수 이영교(李英敎)도 함께 시주해 탱화를 그리고 불상을 수리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은 『조선사찰사료』에 실려 있는 「공정산상암사중수기(公靜山上菴寺重修記)」에 비교적 소상하게 실려 있다. 여기에 의하면 태수(연풍 현감) 김홍도가 이 절에서 기원한 덕분에 늦게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당시 김홍도는 나이 48세였는데 현재 김홍도의 외동아들로 역시 유명 화가인 긍원 김양기(金良驥)가 이때 얻은 아들이다. 

<송하맹호도>, 견본담채, 43.8×90.4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조선 후기 최고의 천재 화가

김홍도는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풍속화를 잘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다. 보물로 지정된 국립박물관 소장 《단원 풍속도첩》이나 두 점의 《풍속도8폭병풍》은 조선 후기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대표적 풍속화들이다. 그리고 국립박물관 소장 <화성능행도병풍>이나 김홍도가 삽도를 그린 『원행을묘정리의궤』 등은 왕실과 궁중의 풍속을 그린 작품으로 조선 후기의 화려하고 장엄한 궁중 행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기록이기도 하다. 그런데 풍속화는 김홍도의 그림세계를 보여주는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홍도를 마치 풍속화 전문 화가로 생각하는 이유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일반인들이 가장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그림이 풍속화였기 때문이다. 사실 산수화나 사군자, 고사인물화 등은 그림 이외에 역사나 철학에 대한 이해가 갖춰져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옥순봉>·<사인암>·<소림명월>, 《병진년화첩》(보물) 중에서,
1796, 지본담채, 각 31.6×26.7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김홍도는 못 그리는 분야가 없었지만 초상화가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김홍도가 도화서 화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한 초상화, 즉 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그릴 때는 반드시 김홍도가 참여했다. 그런데 그는 어진을 그릴 때 항상 가장 중요한 주관화사가 아니라 제2인자라 할 수 있는 동참화사를 맡았다. 김홍도가 용안(龍顔)을 그리는 주관화사를 맡지 않은 것은 초상화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김홍도는 예술적 취향을 중시해 사진처럼 똑같이 그려내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홍도는 도석인물화, 즉 신선도와 불교 소재 그림도 잘 그렸다. 그래서 정조는 용주사 후불탱화의 감동(監董) 및 『부모은중경』 삽도 제작도 김홍도에게 맡긴 것이다. 이 불화들은 김홍도의 역할로 인해 불화 중 전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작품들로 주목된다. 만년에 그린 <염불서승도>는 마치 세상을 떠나는 김홍도의 자화상과 같다. 

김홍도는 또 진경산수화를 새롭게 발전시키는 데도 큰 공헌을 했다. 그는 1788년 정조의 명을 받아 금강산과 관동팔경 일대를 사생 여행해 100여 점의 초본을 그려 왔다. 그리고 이에 의거해 10m가 넘는 비단 두루마리에 진채(眞彩, 진하고 강한 채색)로 <금강산도>를 그려 정조에게 바쳤다. 이 기념비적인 작품을 정조와 신하들이 감상하며 많은 시로 읊기도 했으나, 후일 그림은 궁중의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그러나 김홍도가 그렸거나, 이것을 모사한 많은 금강산화첩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국립박물관 소장의 <해동명산도첩>도 이 중 하나다. 김홍도가 금강산 여행을 통해 그린 진경산수화들은 사실적, 서정적인 면에서 표현적, 주관적인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을 새롭게 변화, 발전시킨 것이다. 그래서 많은 후배 화가들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진경산수화의 새로운 변모와 제2의 유행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김홍도는 화조화, 동물화 분야에도 최고였다. 특히 호랑이 그림은 아마 지구상에서 김홍도처럼 잘 그린 화가는 없을 것이다. 삼성미술관 리움과 개인 소장의 두 점의 호랑이 그림은 한국호랑이를 가장 멋지게 형상화한 그림일 것이다. 김홍도는 또 평생도, 곽분양행락도, 호렵도, 책가도 등을 창안하거나 새롭게 변형, 발전시켰다. 그리고 병풍 형식의 대형작품을 즐겨 그려 종전의 소품 위주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소재와 화법의 다양성과 기법 면의 완결성, 그리고 거기에 한국적인 서정성을 가미한 김홍도의 다양한 그림들은 조선시대 회화의 폭과 넓이, 그리고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념비들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진준현, 『단원 김홍도 연구』, 일지사, 1999·2008
오주석, 『단원 김홍도-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 화가』(열화당, 1998)(솔, 2006)
장진성, 『단원 김홍도-대중적 오해와 역사적 진실』, 사회평론아카데미, 2020

 

진준현
서울대박물관에서 30여 년 동안 학예사, 학예관으로 근무하고 퇴임했다. 한국미술사학회 이사, 서울시와 경기도문화재위원을 지냈으며, 현재도 한국회화사 분야 연구와 자문 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대 인문대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오원 장승업 연구」로 석사를, 「단원 김홍도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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